나의 이야기

우리 몸의 불

유리벙커 2013. 9. 5. 12:49

 

어느 날부터인가 가스레인지가 잘 켜지지 않는다.

호크를 누르면 따따따 소리만 날 뿐 불이 올라오지 않는다.

가스레인지를 자주 쓰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날이 눅눅해서인가?

가스레인지를 켤 때면 몇 번이나 시도해야만 간신히 켜진다.

가스레인지를 새 걸로 바꿔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인다.

그러다 보니 불이 잘 붙지 않는 이유를 알아냈다.

내가 쓰는 가스레인지는 붙박이용으로 건전지를 넣어야 했던 것.

그러니까 건전지가 수명을 다했다는 뜻.

새 걸로 교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소득처럼 기쁘다.

그래서 건전지 넣는 곳이 어디인가 살펴본다.

가스레인지 여기저기를 살펴봐도 건전지 넣는 곳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건전지 넣는 곳을 발견한다.

그곳을 열고 다 된 건전지를 빼고 새 건전지를 넣는다.

그런 후 두근두근, 호크를 누른다.

와~~ 신기할 정도로 단번에 불이 올라온다.

나는 마치 처음 불을 본 사람처럼,

혹은 원시림에서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인 사람처럼 즐겁기만 하다.

 

 

불이 붙지 않는 가스레인지,

건전지가 있어야 불이 올라왔던 가스레인지,

그것은 우리 몸의 생리와 비슷하다.

우리 몸에는 수많은 불이 있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세포 하나하나가 불이다.

그 불의 힘으로 우리는 죽기 전까지 살아간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 때마다 몸의 불이 하나씩 꺼지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수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스레인지와 다른 점은 우리의 불은 건전지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

그러니 잘 살아보자고?

굳이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

시간엔 나이가 없지만,

우리는 시간의 나이를 먹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 사실만 알면 그만이다.

너무 시니컬한 얘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