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한 사회
피로한 사회
-개명/작명에 관한 소견-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이름을 바꾸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보기에 지금 쓰는 이름은 부르기에도 듣기에 좋은데 좀 뜨악했다.
이유인 즉, 뭘 해도 잘 안 풀린다는 거다.
이름에 써서는 안 될 한자가 들어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 혼자 생각해 보았다.
그동안 지인이 살아온 것을 보면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원했던 남자와 결혼도 하고 이직한 직장도 좋은 편이다.
헌데 지인의 말로는,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많다는 것이다.
개명을 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사연을 들어보면 지인의 직장 문제는 이름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거절이란 없이 뭐든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는 태도.
그러니 일이 몰리고 야근이 잦을 수밖에. 소심한 노력형의 기본형.
우리에겐 세종대왕이 있다.
세종대왕은 예쁜 한글을 만드셨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지 중국 사람이 아니다.
굳이 한자에 의미를 부여할 까닭은 없다.
우리 식대로 한자 때문에 개명을 원한다면
한자 영향권이 없는 많은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인터넷에도 이름에 쓰면 안 되는 한자가 올라온 적이 있다.
개명을 하라는 은근한 상업술이다.
또한 자신의 이름에 불만이 있고 개명하는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다.
지인의 말에 의하면 지인이 알아본 작명소는 본점이 서울에 있고 지점은 지방에 여러 개 있다고 한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실소로 그치기만 할 일은 아닌 듯싶다.
개명을 원한다는 건 그만큼 살기가 팍팍하다는 의미고,
개명을 해서라도 팍팍한 삶을 바꿔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욕망의 출발은 개인에게도 있지만 그보다 사회에 있다.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좀 더 빠르게,
좀 더 센스 있게,
좀 더 많이,
좀 더 완벽하게,
만능인이 되길 다그친다.
사회는 이미 ‘갑’이 되었고 사람들은 ‘을’이 되어 갑질의 눈치를 본다.
사회라는 거대한 ‘갑’의 요구를 묵살/무시할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할까.
그러니 개명이라도 해서 ‘갑’의 요구에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하고 싶을 터다.
하지만 말이다, 노력이 모자라 가난하게 사는 건 아니다.
빈둥거리며 사는 사람도 로또가 되는가 하면,
죽어라 앞만 보며 산 사람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이름을 바꾼다고 인생이 잘 풀리고 원하는 대로 살 수만 있다면 누군들 바꾸지 않을까.
지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안 풀린 경우보다 풀린 경우가 많다.
좋지 않았던 것에 비중을 두면 좋았던 것마저 그저 그런 것으로 탈색된다.
삶이란 풀릴 때가 있는가 하면 꼬일 때도 있다.
잘 풀리기만 하면 어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꼬이기도 해야 풀기 위해 애도 쓰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한 인간이 된다.
그래서,
인생의 카드란 그리 녹녹하기만 한 건 아니다.
드러내 보이지 않지만 웅숭깊게 자리한,
인간 스스로 헤쳐 나갈 기회와 힘을 주는 포커페이스이자
별스럽지 않은 듯한 별스러움의 카드다.
오늘을 산다는 건 오늘 내게 주어진 카드를 한 장 젖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기쁨과 좌절, 용기와 체념, 그리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카드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몸으로 행하는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