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유쾌한 <<절망의 인문학>>

유리벙커 2015. 5. 18. 13:53

수많은 책이 있지만 훌륭한 책은 얼마나 될까.

오창은 교수의 『절망의 인문학』을 읽으며 번뜻 떠오른 생각이다.

이 책은 발로 뛰고 많은 사료를 정리한, 땀이 흠뻑 밴 몸이자 육성이다.

한마디로 훌륭하고 용감한 책이다.

현장에 관한 글을 쓰자면, 나오는 사람들과 단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인데 오창은 교수는 모든 것을 실명으로 썼다. 그만큼 당당하고 떳떳하다는 뜻이자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라고 짐작해본다.

 

 

400쪽의 내용은 4부로 나뉘어 있다.

1부 <호황의 절망>

2부 <내부의 절망>

3부 <제도의 절망>

4부 <약소자의 절망>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줄을 치며, 포스트잇을 붙이며 “맞아, 이거야, 그래, 그랬어” 라는 감탄을 쏟아냈다.

처음 인문학을 공부할 때가 바로 그랬다. 그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눈이 확 떠지는 느낌이랄까. 세상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구나 심장이 뛰었다. 그 후로 인문학 공부에 열을 올렸고, 철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의 내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처럼 소설을 쓸 수도 없었거니와, 내 안에 갇혀 시름시름 앓거나 방황하고 있으리라. 인문학과 철학은 나를 살아있게 하는 에너지이자 긍정이다. 긍정은 긍정이되 부정을 통한 긍정이다. 주는 대로 무조건 받아먹는 긍정이 아니라 의심을 하고 따져본 후에 깨닫게 되는 긍정이다.

일반적인 얘기 하나를 해본다. 결혼식 때면 신부 어머니는 분홍색 한복을, 신랑 어머니는 푸른색 한복을 입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정한 것일까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선호하는 컬러, 피부색에 맞는 컬러로 입으면 안 된다는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전통이라는 미명 하에 개성을 죽이고 나란히, 나란히, 줄을 맞춰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에 순순히 따르는 사람들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해괴한, 논리 아닌 논리를 당연시 따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답답함이 밀려온다.

인문학과 철학을 몰랐을 때의 나 역시 저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인문학과 철학은 하나의 길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여러 갈래의 길과 그 길을 탐험하게 하는 재미를 준다. 부정을 통해 긍정으로 나아간다. 인문학과 철학에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오창은 교수의 『절망의 인문학』은 나를 사로잡았다. 읽는 동안 나는 어떤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빼어난 옥수수였다. 통통하니 상아색으로 빛을 내며 쪽 곧게 알이 박힌 옥수수. 끄트머리까지 성실히 꼭 박혀 있는 옥수수.

나는 분명, 잘생기고 튼실한 옥수수 알을 하나하나 따먹는 기분으로 『절망의 인문학』을 읽었다.

내용을 정리하려니 워낙 좋은 말이 많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실력이 달린다는 얘기다. ㅋ ㅋ

해서, 아쉽지만 몇 대목을 옮겨보는 걸로 『절망의 인문학』을 소개한다.

 

 

“인문 강좌는 곧바로 효과를 산출하는 투자가 아니다. 자치 단체가 성과 산출 위주로 인문학에 접근하는 것은 위태롭게 느껴진다.”

“이명원은 인문학 열풍을 시장의 논리와 연동하면서 상품화되고 있는 양상이라고 봤다.”

“윤채영 고양국제고등학교 교사는 이것과 관련해 의미 있는 말을 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인문학이 성장했는데, 이것은 지배 엘리트에게 역사와 문학을 가르침으로써 지배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자기계발서가 자신을 제어하는 기술을 다룬다면, 인문학은 자신을 스스로 깊이 들여다보는 힘을 기르게 한다.”

“인문학이 자본주의 체제를 다시 활성화하는 도구로 전락한다면, 인문학이라는 이름뿐인 껍데기만 남게 된다.”

“인문학은 민주주의와 더불어 성숙해야 할 우리 시대의 자산이다.”

“한국에서 문학 연구자가 되고 인문학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고 주변을 부정해야 하는 길에 들어서는 일이다.”

“인문학은 삶의 가치문제를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학문이다.”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문 고전의 힘이다.”

“인문학은 인간을 문제 삼으며 인간적 가치를 탐색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인간적 가치가 형성되는지를 문제 삼는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거리를 두는 자기 객관화 능력을 기르는 수련이 인문학 공부다. 자기 자신을 낯설게 하려고 문학작품을 읽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며, 역사적 근원을 따진다.”

“문제는 앎이 아니라, 삶이다.”

“인간을 고민하지 않으면, 인간일 수 없다.”

“시스템은 주체를 소외시킨다.”

“세계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람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현실을 불편하고 낯설게 바라볼 때, 그곳에 진짜 현실이 있다.”

 

 

 

이 책엔 여러 사람과 인터뷰한 내용도 실려 있다.

그 중 『녹색평론』의 김종철 발행인은 권터 안더스 말을 인용하여 말한다.

“수목은 중력의 힘에 의해 아래쪽으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중력에 역행한다.”

인간의 정신과 행동이 어떠해야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이어 김종철은 말한다.

“대학은 출발부터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이었어요. 최초의 대학이라고 꼽히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과 프랑스의 파리 대학이 어땠나요? 학생과 교수 중심이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그 내용은 당대의 실용 학문으로 차 있어요. 그때 대학에서 가르친 신학, 법학, 의학은 철저히 지배 권력에 봉사하는 실용 학문이었습니다. (중략) 오죽하면 칸트가 ‘교수는 정부의 도구’라고 오늘날 들어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를 이미 18세기에 했겠어요.”

 

 

 

또한 김동춘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 중 한 대목, “지배하지도 않고 지배당하지도 않는 앎, 그것은 진정한 탈식민의 전략”이라는 말은 참으로 어렵지만 포기해선 안 된다는 자각을 준다.

 

 

 

다른 한 사람, 재일동포 학자인 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의 발언은 요즘 인터넷에 뜨는 지역차별과  소수자, 남북 문제에 관한 댓글에 대한 답으로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운명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존재입니다. (중략) 한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할 때, 그 차별은 자신이 만든 게 아니라 다수자가 만든 거예요. (중략) 전쟁을 해도 좋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이고요. 그렇지 않다면 자기는 죽지 않고 다른 사람은 죽어도 된다는 이야기죠. 그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자기중심주의죠.”

 

 

 

좋은 대목이 숱하게 많지만 일일이 옮길 수 없어 아쉽다.

책을 덮으며 떠오른 생각으로 마무리한다.

인문학/인문학 행사에 관한 비판도 만만치 않게 나오지만, 내가 이슬비에 옷 젖듯 인문학과 철학으로 세계를 다시 보게 된 것처럼, 인문학과 철학을 접한 사람들 역시 나와 비슷하리라 여긴다. 그것이 인문학과 철학의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