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왜 아이히만인가

유리벙커 2015. 8. 7. 01:15

600만 명의 유럽 유대인들의 학살을 의미하는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살인을 저지른 독일 나치스.

그들 중 익히 이름이 알려진 사람 중에는 아이히만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아이히만인가. 이러한 의문으로 읽게 된 책이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국제재판소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있었다)을 직접 가서 보면서 그에 관한 글을 썼는데 그게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렌트가 법정에서 증언하는 아이히만을 보며 쓴 특징/결함은 이렇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던 자.” - 15쪽.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다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 - 97쪽.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 곧 판단의 무능성을 가진 자.” - 20쪽.

간략하게 정리한 이 대목을 보면 이런 의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저런 평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낼 수 있었는가.

사실 아이히만이 마지막으로 단 계급은 친위대 중령이다. 히틀러에게 직접 지시를 받을만한 계급도 아니었고 모종의 일을 독단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히틀러가 죽자 자신을 지시해 줄 사람이 없다는 점을 한탄했고, 지시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난감해 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 작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까지 그의 이력은 평범했다.

그는 학업 성적이 좋지 못해 간신히 고등학교를 나온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동안 친구의 권유로 나치당에 들어가고, 이어 친위대로 간다.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한 점, 자신의 존재감을 확신할 수 없었던 점이 친위대라는 발판을 기회로 차근차근 존재감을 만들어간다. 그렇다고 계급을 빌미로 권력을 남용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럴 만큼의 배짱이나 언어 능력이 없었다.

 

 

나치스는 본격적으로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부터 ‘언어규칙’이라는 걸 만들어낸다. “‘언어규칙’을 보면, 학살은 최종 해결책, 완전 소개, 특별취급으로, 유대인의 이송작업은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으로 불렀다. 나치스는 이렇게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려 했다.” -21쪽. “언어가 고정되어버림으로써 사유와 판단이 현실과 유리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22쪽. 아이히만이야말로 그 ‘언어규칙’을 그대로 따랐고, 그 점이 유대인 인종 청소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은 하나같이 아이히만을 정상인이라고 말했다. 어떤 의사는 자신보다 훨씬 더 정상적이라는 말도 했다. 한나 아렌트 역시 법정에서 진술하는 아이히만을 보며, 형편없는 기억력과 허풍이 있긴 하나 악마로 보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아이히만이 ‘악의 평범성’을 지닌 보통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아렌트는 말한다. “악이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근원에서 나온다.” - 16쪽. “그의 인류에 대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근본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하자면 아무 것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38쪽. “아렌트의 보고에는 아이히만이 저지른 흉악한 악행이 고의이거나 사건에 고안된 것, 즉 범죄의 의도를 미리 갖고 있거나 고려했던 것은 아니었다.”-35쪽.

그렇다면, 왜 아이히만인가에 대한 의문에 앞서 어째서 유대인인가, 여러 민족 중에 독일이 하필이면 유대인을 찍어 말살하려던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은 세계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때 히틀러의 등장은 우왕좌왕하는 독일인에게 구심점의 축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세계 여러 국가도 히틀러의 등장을 반겼고 인정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려는 작업으로 유대인 추방을 생각해낸다. 자본을 많이 소유한 유대인을 중심으로, 그들의 재산도 몰수하고 그것으로 전쟁 준비도 도모한다.

여기서 왜 유대인인가에 대한 답으로, 아렌트가 말한 사르트르의 인용문은 참으로 적절하다. “사르트르는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에서 만일 단 한 사람의 유대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창조해 내거나 만들어 낼 것, 유대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사르트르에 따르면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33쪽.

사르트르의 말은 쉽게 말해 유대인은 ‘만들어진 집단 희생양’이고, 우리 누구도 유대인이 될 수도 있고 만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렇듯 유대인 학살은 ‘치밀한 계획’으로 단계를 밟아간다. 우선 ‘언어 규칙’을 만들고, 유대인만의 정착촌을 만들어 이주시키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선 유대인을 무국적자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무국적자는 그 어떤 말썽이 나도 세계 어느 나라도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둔 조치다. 나치스는 유대인을 무국적자로 만들고자 어마어마하게 많은 서류를 요구했고, 서류비용으로 엄청난 비용을 쓰게 한다.

이런 과정에서 유대인 지도자들은 지극히 친절하게 나치스에 협조한다. 즉 강제 추방을 시킬 유대인의 명단을 아이히만에게 넘겨준다. 또한 “폴란드와 루마니아 정부도 공식 선언을 통해 유대인을 제거하고 싶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127쪽.

이렇게 강제 이주가 유럽 전역에서 시행되자 유대인을 거주시킬 수용소(게토)가 부족해진다. 이에 나치스는 유럽 여러 국가에 게토를 짓는다. 하지만 그마저 한계에 달하고, 나치스는 가스 살인을 고안해낸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안락사 시킨다는 명목 하에 “나치스 용어로 하면 ‘사람들에게 안락사를 허용함으로써’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는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177쪽.

이때 “살인자가 된 사람들의 마음에 꽂힌 것은 단지 역사적이고 장엄하고 독특한 어떤 일,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관계하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살인자들은 사디스트나 천성적인 살인자가 아니었다. 반대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육체적 쾌락을 얻는 사람들을 모두 색출하는 데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 174쪽

 

                                                                             <아이히만의 재판 현장>

 

독일이 전쟁에 패하고 히틀러가 자살하자, 아이히만은 다른 전범자들이 외국으로 도피한 것처럼 아르헨티나로 간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전범자들을 찾아 여러 국가를 다니는 동안, 나치스에 호의적이던 아르헨티나에선 그 어떤 전범자도 내주지 않았다. 이에 이스라엘은 아르헨티나의 허락 없이 몰래 아이히만을 체포해온다. 아이히만은 체포되기 며칠 전부터 자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랬음에도 아이히만은 도망치기는커녕 기꺼이 체포된다. 왜 그랬을까.

아이히만은 평범한 생활이 지루했다. 숨어서 사는 것도 지루했고, 무엇보다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망이 컸다. 해서, 아르헨티나에서 자서전을 쓰고 방송 인터뷰까지 한다. 말하자면 나 여기 있으니 잡으러 오라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이름을 날리고 싶은 명예욕, 오직 그것 때문이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를 존경했는데 이유는 딱 하나였다. 하사 출신인 히틀러가 한 나라의 총통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히만의 명예욕은 나치스 시절부터 있었다. 아이히만은 중령 계급에서 멈추자 전선으로 가길 무척이나 원했다. 전선으로 가야 진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부의 판단은 달랐다. 아이히만은 전선으로 보낼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 그랬는지 아이히만은 게토를 짓고, 살인가스를 고안해내고, 실행한 사람이 자기라고 떠벌이며 다녔다. 주변 사람들은 아이히만의 말을 믿었고, 아이히만은 그 점에 만족했다.

이런 이유로 전범들의 입에선 아이히만이 나왔고,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아이히만은 결국 이스라엘 법정에 서고, 법정은 아이히만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없느냐고 질문한다. 아이히만은 “명령 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18쪽. 아이히만의 변호사 역시 아이히만은 상부에서 지시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변호한다. 공판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엔 아이히만의 말과 그의 변호사의 말에 공감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한다. 전범들 중엔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인물도 있었지만, 아이히만은 여전히 무대에 선 배우처럼 교수형을 당하러 갈 때마저 장례식장에서 연설하듯 말한다. 다시 말해 교수형을 당할 자가, 마치 교수형을 당할 자를 위해 연설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을 교수형에 처하기로 결정한 후, 두 시간 만에 실행한다. 세계 여론에 떠밀려 아이히만을 살려두게 되면 행여 무죄 판결이 나오지 않을까 염려해서다.

 

                                                                             <27세 때의 한나 아렌트>

 

 

우리에게도 유대인의 역사와 비슷한 역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앞잡이’라 부르던 조선인들. 일제에 반감을 품은 조선인을 색출하고, 일본으로 ‘공출’할 사람들의 명단을 넘겨준 조선인들. 위안부로 보내기 위해 일본군과 함께 감언이설을 남발하고, 갈만 한 여자들의 명단을 뽑아준 조선인들.

그들도 아이히만이 말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한다.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고, 상부(일본)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시대가 그랬다고. 그러나 지금 우리는 ‘친일파’의 명단을 뽑아내고 그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생각해 보면 숙명처럼 다가온 이러한 사건은 어느 민족이나 겪는 아픔이자 고통이며 지울 수 없는 상처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만큼 잊으면 안 되는 상처이기도 하다.

문득, 아이히만 대신 내 이름을 넣는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난다. 생각은 다시 정의란 무엇인가, 시대에 따라 유동성이 있는 것인가, 절대적 정의란 과연 있을 수 있는 것인가로 나아간다.

분명한 것은, 세상엔 아이히만이 여전히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한편 아이히만과는 다른, ‘도덕적 선택’을 하거나 한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도덕적 선택’을 한 사람들의 피 값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