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초짜들의 행진

유리벙커 2016. 2. 13. 02:50

작지만 큰 이야기를 시작한다.

운전경력 4년 차의 젊은 여자가 있다.(가칭 춘향이로 칭한다)

운전경력 4년 차의 나이든 여자가 있다.(가칭 보바리로 칭한다)

두 여자는 운전을 하다 접촉사고를 낸다.

가볍다면 가볍고 예민하다면 예민한 접촉사고다.

두 여자는 말없이 신경전을 벌인다.

이때 춘향이의 남편이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온다.

보바리의 남편도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온다.

춘향이의 남편은 춘향이의 입장을 대변하며 보바리를 설득하려 한다.

그 말에 보바리는 “내 잘못은 없다, 춘향이가 먼저 내 차에 부딪쳤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춘향이의 남편은 계속해서 춘향이의 편을 들며 열변을 토한다.

이에 보바리는 춘향이의 남편에 화도 나고 실망도 한다.

이때 보바리의 남편이 나선다.

보바리의 남편은 춘향이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한다.

보바리는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춘향이 편을 들어주냐”고 화를 낸다.

그제야 보바리의 남편은 슬쩍 보바리 편을 들어준다.

그러나 춘향이와 보바리의 감정싸움은 더욱 악화된다.

악화는 점점 심해지고 해결점은 멀어진다.

할 수 없이 두 남자가 따로 만난다.

만나서 설왕설래로 각자 자신의 아내 입장을 말하지만

두 여자의 감정싸움을 종식시키기엔 역부족임을 실감한다.

오히려 춘향이의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라,

보바리의 남편이 이런 말을 하더라, 하면서 일은 더욱 커진다.



위의 이야기는 운전 경력 4년차의 초보 운전자 이야기다.

사실은 초보 운전자의 이야기를 빗댄, 결혼 4년 차의 초보 며느리와 초보 시어머니의 이야기다.

우리는 흔히 젊은 기혼자를 보면 결혼 몇 년차냐고 묻는다.

하지만 며느리를 본 시어머니에겐 시어머니 몇 년차냐고 묻지 않는다.

며느리가 초보면 시어머니도 초보다.

며느리가 초보면 아들도 초보다.

시어머니가 초보면 시아버지도 초보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엔 아들 며느리는 초보지만,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초보가 아니다. 초보여서도 안 된다.

이유는 딱 하나. 나이를 먹었다는 것. 나이를 먹었으니 노련하리라는 선입견.

타인이건 본인이건 그렇게 생각한다.


다시 생각해 보자.

결혼이란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노련한 사람은 없다.

다시 말해 결혼 당사자이건 그의 부모이건

결혼이라는 낯선 세계는 초보의 세계이다.

특히 나이든 초보들의 미스는 이것이다.

부모니까, 어른이니까, 뭐든 유능하게 해야 한다는 마인드.

젊은 초보들의 미스는 이것이다.

부모는 뭐든 포용하는 존재, 자신들은 어여쁨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마인드.



이렇든 저렇든 초보들이다.

초보들이 유능하면 얼마나 유능할 것이며, 노련하면 얼마나 노련할 것인가.

인생깨나 산 것처럼 호기를 부릴 필요도 없고,

인생 초년생이라고 그저 양보만을 바랄 것도 없다.

그래봐야 진만 빠지고 힘이 들어간 어깨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