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그들의 신음

유리벙커 2016. 3. 8. 01:19

폴란드에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소금광산이 있다.

이번 동유럽 5개국 관광 중 유독 관심을 끌었던 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소금광산이다.

석탄이 아니라 소금으로 된 산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소금광산의 규모와 유래는 검색어만 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가이드와 함께 소금광산으로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만해도 동굴로 들어갈 때처럼 허리를 굽히거나 안전모를 써야 하는 건 아닌가 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나무로 된 계단은 아주 탄탄하고 좋은 질감이었으며, 어느 좋은 건물의 내부를 걷는 듯 조도도 알맞았고, 공기는 맑고 시원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 소금광산엔 2040개의 방이 있어 까딱하다간 길을 잃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길이 갈라지는 곳곳엔 출입을 금하는 줄이 쳐져 있었고, 현지 가이드(연세가 퍽 든 폴란드 할아버지였다.)가 안내하는 길만을 따라가야 했다.

지하로 된 광산의 높이는 40층 빌딩 정도라고 했다.

우리는 그 깊이를 하나하나 계단을 밟으며 내려갔다.

내려가던 중 계단에서 잠시 아래를 내려다봤다.

끝이 보이지 않게 빙글빙글 도는 깊고 깊은 지하였다.



이 깊은 곳에서 소금을 캐서 지상으로 올렸을 그들.

긴 줄을 타고 두려움과 싸우며 오르내렸을 그들. 그리고 소금가마들.

거기에 더한 어둠.

지독한 어둠.

광솔 불을 지피느라 바닥을 기다시피 하는 광부의 조형물은 그때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허리를 펼 수 없게 좁은 공간이었다.)

그들의 고통은 노동과 더불어 심연과도 같은 어둠이었을 터였다.

현지 가이드와 함께 한참을 내려가며 소금으로 된 벽을 보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기도 했다.

짰다. 벽 전체가, 아니 바닥이며 천장이며 모든 게 소금이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믿어야 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내려가는 동안 벽에는 여러 조각물들이 새겨져 있었다.

모두 광부들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어둠을 이겨내려, 고통과 외로움과 그리움을 견뎌내려 안간힘을 썼을 흔적들.

어느 곳에 이르자 말과 광부의 조형물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말이 광산에 들어오자면 공간이 좁아 큰말은 안 되고 망아지여야 했단다.

망아지가 광산에 들어오면 차츰 빛을 보지 못해 눈이 멀게 되는데 그럴 때까지 소금을 운반하다 죽는다고 했다. 광부 역시 죽어서야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기술을 혁명이라 부르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

지금처럼 엘리베이터가 있거나 소금을 캘 기계가 있었더라면 당시의 광부나 말이 죽어서야 빛을 볼 수 있는 상태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어서야 빛을 볼 수 있다는 그 아이러니는 당시엔 그저 참혹한 현실일 뿐이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여러 코스를 거쳐 지하 성당으로 갔다.

성당의 규모는 무척 컸다. 솔직히 성당이라기보다 궁전 같았다.

천장엔 거대한 샹들리에가 있었고 샹들리에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성당 벽면엔 성화로 조각된 여러 성화가 있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아기 예수를 안고 가는 마리아상, 최후의 만찬상, 등...





 


성화들만 없었다면 궁전이라고 해야 어울릴 정도였다.

지금은 결혼식도 올리고 연주회도 한다고 하니 오히려 그게 더 맞지 않나 싶었다.

그럴 정도로 공간은 넓었고 샹들리에의 촛불은 환했다. 


샹들리에며 성화는 모두 소금으로 된 것이며 광부들이 만든 것이라고 했다.

성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데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 ‘노예들의 합창’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순간 그대로 멈춰버렸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익히 듣고 좋아하던 나부코가 마치 부드러운 물체로 내 몸 안을 흘러 떠다니는 듯했다. 울컥, 슬픔이 차올랐다. 광부들이, 아니 광부라 불리던 노예들은 자유를 원하던 히브리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고통과 신음이 ‘노예들의 합창’으로 메아리쳐 지하 성당을 울렸다.

사실 슬픔이라는 단어조차 사치다.

나부코가 주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도 슬픈 음 역시 슬픔을 치장한 또 다른 언어다.

그 절대적 현실 앞에서 광부들, 다시 말해 노예들이 겪었을 절망과 참담함은

어떤 단어나 음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표현한다는 자체가 과욕이다.

벽면을 둘러보았다. 여러 성화가 있었지만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건 예수의 ‘최후의 만찬’상이었다.



예수와 제자들의 표정이 어쩌면 그렇게 생생한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게 아니라 속으로 삭일 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깊은 고통이었다.

 ‘최후의 만찬’을 조각했던 광부의 내면은 바로 예수가 이미 알아버린 ‘최후’와 다르지 않았다.

늘 최후를 생각하며 지냈을 광부들.

가족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삼켰을 노예들.

언제 벗어날지 모를 캄캄한 어둠과 절망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이 최후라고 생각하며 지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의 고통과 마주한다지만,

그들이 겪었을 고통보다는 웅장한 성당의 규모와 걸작의 조각물에 감탄한다.

모든 부富는 노동에 의해 이루어지고, 노동은 노동자에 의해 부로 바뀐다.

그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잊는다.

잊어야 괴롭지 않기 때문이다.

괴로움도 때론 마주해야 할 때가 있고, 마주해야 한다.

노동이 신성한 까닭은 고통을 수반하기에 그렇다.

고통을 배제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소금 벽면의 조각물들이 하나같이 걸작인 이유는 고통을 몸소 작품에 투사했던 때문이리라.

또한 전문가가 아닌 광부가 이토록 좋은 작품을 만들 정도면

그 당시 폴란드(혹은 유럽)의 문화적 배경과 예술성은 아주 높았으며, 그 수준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금광산을 다녀온 후, 우연히 베르디의 나부코를 다시 듣게 되었다.

그 슬픈 음에서 ‘그들’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낮은 자리의 사람들과 신음을 듣는다. 

 어떤 글이나 음으로도 그들의 그때를, 그 암흑을 같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잊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