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데이
2016년 <<작가연대>> 여름호에 실린 글을 옮겨본다.
원더풀 데이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성혜는 소파 깊숙이 엉덩이를 집어넣는다. 오전의 햇빛이 유리창을 뚫고 거실에 깔린다. 빛이 거실 맞은편 주방으로 길게 뻗는다. 하이그로시로 시공된 흰색의 싱크대가 빛을 튕겨낸다. 빛이 거실 벽, 모네의 복사판 풍경화에 내려앉는다. 풍경화가 몽환의 색을 어른어른 내쏜다. 빛이 벽지에 퍼져 옅은 회색으로 바뀐다. 벽지에 찍힌 아주 작은 도트가 빛을 반사한다. 빛이 풍경화 건너편 소파로 간다. 소파는 흑갈색 인조가죽으로 새것 냄새를 풍긴다.
성혜는 소파 팔걸이에 한쪽 팔을 대고 비스듬히 눕는다. 지금의 이 상태는 최적이다. 티브이는 꺼져 있고, 빛은 적당하고, 아침 공기는 맑다. 배가 고픈 듯 아닌 듯한 상태도 좋다.
성혜는 몸을 반듯하게 펴 똑바로 눕는다. 어쩌면 기다림은 길어질지도 모른다. 그는 찬찬한 사람이라 대충 사 오진 않을 것이다. 마블이 좋은 고기를 찾아 읍내 여러 정육점을 돌아다닐 테고, 무공해 상추와 깻잎, 오이를 사러 밭주인을 찾아다닐 수도 있다.
성혜는 몸을 돌려 엎드린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다. 가정이라는 행복의 성을 쌓으려 그와 호흡을 맞추며 차근차근 벽돌을 올렸다. 그런데 허전하긴 왜 이렇게 허전한가.
성혜는 한참을 엎드려 있다 조용히 일어난다. 꺼져 있는 티브이도, 적당했던 빛도, 산뜻했던 공기도 갑자기 무료해진다. 고픈 듯 아닌 듯했던 배도 고파온다.
성혜는 거실 창에 쳐진 망사 커튼을 살짝 들춘다.
펜션 앞마당은 온통 물 오른 잔디다. 펜션 여주인이 옆구리에 세탁바구니를 끼고 잔디 끝으로 간다. 고불고불 파마한 듯한 짙은 갈색 털의 강아지가 여주인을 따라 간다. 여주인이 장대에 매어둔 빨랫줄 앞에다 세탁바구니를 놓는다. 여주인은 세탁바구니에서 젖은 세탁물을 꺼내 탁탁 털어 넌다. 갈색 털의 강아지가 여주인의 주위를 맴돌다 잔디에 코를 박다 한다. 여주인이 회색 개량한복 주머니에서 빨래집개를 꺼내 세탁물에 물린다. 기다렸다는 듯 초여름의 햇살이 세탁물에 걸터앉는다.
성혜는 휴대폰과 지갑을 들고 룸을 나간다. 칼날에서 튕기는 빛과도 같은 빛이 여과 없이 눈을 파고든다. 성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빛이 점점 강도를 높인다. 펜션 잔디 끝에 울타리로 서 있는 작은 나무들이 다투어 물을 올린다.
펜션 여주인이 빈 세탁바구니를 들고 몸을 돌린다. 성혜는 데크로 된 계단을 내려간다.
여주인이 성혜 앞으로 와 활짝 웃는다.
“편히 주무셨어요? 날씨가 참 좋죠?”
성혜는 데크 마지막 계단에 서서 예, 하고 짧게 대답한다. 펜션 여주인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성혜의 얼굴을 보곤 입을 다문다.
성혜는 펜션을 나온다. 다들 저 펜션 여주인처럼 예, 이 한마디에 물러난다. 예와 아니오, 이 간결한 의사 표시는 늘어질지도 모를 수다를 예방한다. 쓸데없는 호기심과 추측과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기도 한다. 예와 아니오, 이보다 훌륭한 도구는 없다.
성혜는 펜션 앞 공터 주차장으로 간다. 그의 차는 없다. 성혜는 펜션에서 쭉 뻗은 오솔길로 접어든다. 소로 양 옆으론 계수나무가 일렬로 서 있고 계수나무 뒤론 잘 정돈된 밭이 있다. 감자밭과 깻잎밭 고랑엔 분수호스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밭 뒤론 폭이 제법 너른 강이 있다. 밭에서 강으로 내려가는 소로엔 트랙터 한 대가 흙을 뒤집어쓴 채 놓여있다.
성혜는 계수나무 길을 차분차분 걷는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면사포인 양 성혜의 머리에 앉는다. 어디선가 상긋한 냄새가 안개처럼 퍼진다. 성혜는 깊이 숨을 들이쉬다 내쉰다. 이 좋은 냄새도 조금 지나면 거기서 거기가 된다. 사람 사는 것도 거기서 거기.
계수나무 길이 끝나는 지점엔 양쪽으로 갈린 길이 있다. 오른쪽은 차도로 나가는 길, 왼쪽은 강으로 가는 길. 강으로 향한 쪽 밭에는 농부가 밀짚모자를 쓰고 농약 살포기를 등에 메고 있다. 그는 농약을 치려는 게 아니라 아침 장을 보러 갔다. 그의 행선지는 차도 쪽이다.
성혜는 오른쪽 길로 꺾는다. 길 중간쯤에 이르자 이름 모를 활엽수가 있고 활엽수 몸통엔 펜션 이름이 적힌 화살표 모양의 나무 팻말이 걸려있다. 그는 저 화살표를 거꾸로 지나 읍내로 나갔을 일이다. 성혜는 갑자기 배가 고파온다. 왠지 모르게 속도 아리고 가슴도 툭탁거린다.
휴대폰이 울린다.
“엄마야, 뭐해? 펜션은 좋아?”
성혜는 펜션은 괜찮고 산책을 나왔다고 대답한다.
딸의 목소리는 풍선만큼이나 가볍지만 조급함이 묻어나온다.
“혼자? 아니면 아빠랑?”
성혜는 짐짓 딸의 속내를 짐작하며 대답한다.
“아빠랑.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딸은 킥킥 웃는가 싶더니 들뜬 목소리를 쏟아낸다.
“눈치 한 번 빠르네. 하고 싶은 말은 내가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거. 나, 여기서 결혼하면 안 될까? 이라크 남자랑.”
성혜는 알아서 하라고 짧게 말한다. 딸도 그런 대답이 나올 줄은 예상하고 있었을 터이다. 딸은 지금 미국 명문대에 유학 중이다. 그는 탄탄한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더없이 자상하다. 예와 아니오 사이에서 헤맬 일은 없다. 약점이 무엇이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문제는 없다. 헌데 이 허기는 무엇인가.
성혜는 차도가 있는 쪽으로 올라간다. 차도에서 북쪽 방향의 길은 가보지 않았다. 남쪽 방향은 펜션을 오며 보았던 길로 읍내가 있는 데다. 성혜는 남쪽으로 뻗은 길을 걷는다. 차들이 빈번하다. 마주보고 오는 차들이 신경에 거슬린다.
성혜는 길을 건너려 비보호 신호기가 있는 곳에 선다. 관광버스가 좌우로 흔들리며 다가온다. 버스 안에는 등산복을 입은 여자들이 통로로 나와 춤을 춘다. 여자들 속엔 남자 몇도 섞여 있다. 관광버스가 신호기를 지나 멀어진다.
성혜는 길을 건넌다. 생각지도 않게, 춤추는 여자들 틈에 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성혜는 푸훗, 웃는다. 이건 상상할 수 없는 상상이다. 그는 노래나 노래방을 끔찍이 싫어한다. 더구나 아침 장을 보러 간 그가 관광버스에서 춤을? 배가 고프긴 고픈 모양이다.
차도 옆엔 밭뙈기들이 있고 밭작물들은 벌써 달궈지는 기온에 이파리를 늘어뜨린다. 차들의 소음은 달아오르는 열기와 경쟁이라도 하듯 맹렬하다. 소리와 기온과의 전쟁. 성혜는 귀를 틀어막는다. 바깥의 소음과는 다른 소음이 와글댄다. 뇌의 저 어디쯤에서 버글거리는 정체 모를 소음. 성혜는 손가락을 뗀다.
성혜는 버스 정류장 앞에 선다. 거리는 먼지로 풀썩이고, 정류장 앞 구멍가게는 다 쓰러져간다. 6.25 전쟁 통을 재현한 영화 세트장이 따로 없다. 그 세트장 한복판엔 골프 티에 휴대폰과 지갑을 든 여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
성혜는 정신을 차리고 구멍가게로 간다. 구멍가게 유리문은 비와 먼지와 바람과 햇빛에 시달린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성혜는 유리문 안을 기웃대다 안으로 들어간다.
굴속 같은 남자가 티브이를 보다 말고 성혜의 아래위를 훑는다. 성혜는 주춤하다 냉장고가 있는 데로 간다. 냉장고 역시 가게 유리문과 다르지 않다.
성혜는 냉장고에서 사이다 캔을 꺼낸 후 남자에게 다가간다.
“저기... 혹시 두세 시간 전에 어떤 남자가 생수나 커피 같은 거 사러 오지 않았나요?”
남자는 거스름돈을 주며 성혜의 아래위를 훑기만 한다.
성혜는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며 차도로 고개를 돌린다.
“은회색 승용차를 탔는데. 이 앞에다 차를 세웠을 거예요.”
남자는 오종종하니 꾀죄죄한 얼굴로 성혜를 빤히 보기만 한다.
성혜는 가게를 나온다. 지열이 구물거리며 올라온다. 성혜는 캔을 따 목을 한껏 젖혀 넘긴다. 톡 쏘는 감이 시원하다기보다 벌에 물렸을 때처럼 화끈댄다.
성혜는 가게 앞에 버리다시피 놓인 소파에 엉덩이를 걸친다. 거리의 차들은 먼지와 소음과 배기가스를 내뿜으며 달린다. 차들의 목적지는 앞이다. 앞을 향해 달리고 달려도 앞은 끝나지 않는다. 그의 앞은 어디인가. 마블이 좋은 생고기와 무공해 야채가 있는 곳이 아닌가. 그는 그것들을 찾아 이 근처 어딘가를 뒤지고 있으리라. 그래도 그렇지, 너무 오래 걸린다.
버스가 가게 앞에 선다. 버스 문이 열리자 뚱뚱한 할머니가 몸을 옆으로 틀며 조심조심 발판에 발을 내딛는다. 버스 안에선 머리를 틀어 올린 중년여자가 성혜를 보고 있다. 어디 예식장에라도 가려는지 화장이며 머리가 미용실에서 방금 나온 모양새다. 여자 뒷자리에는 중년남자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채 밖을 내다보고 있다.
버스가 슬금슬금 출발한다. 성혜는 느닷없이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난다. 두세 걸음 쯤 앞선 버스로 뛰어가 주먹으로 버스를 친다. 버스가 선다. 성혜는 허겁지겁 버스에 오른다.
중년여자 뒤에 앉았던 남자는 여전히 반대편을 보고 있다. 성혜는 버스 통로를 걸어 남자가 앉은 자리를 지난다. 밖에서 보았던 남자의 옆모습은 영락없는 그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그럼 그렇지, 생고기와 야채와 승용차를 두고 이런 버스를 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성혜는 남자 뒤로 가 앉는다. 남자의 뒤통수가 와락 눈을 비집는다. 남자의 뒤통수는 비어 있다. 그의 뒤통수는 무엇인가로 꽉 차 있다. 빈 뒤통수가 태연히 창밖을 내다볼 줄 안다면, 뭔가로 꽉 찬 뒤통수는 태연히 창밖을 내다볼 줄 모른다. 성혜는 입가를 비틀며 피식 웃는다.
버스가 선다.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와 노년으로 접어든 남자, 성혜 앞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내린다. 여긴 읍내다. 정육점이 있고 마트가 있고 어쩌면 예식장이 있을지도 모를 읍내 중앙 통. 성혜는 급히 차에 올랐던 것처럼 허둥허둥 내린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어딘가로 흩어진다. 대도시에 비해 읍내는 단조롭지만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성혜는 낯선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마트가 눈에 띈다.
읍내 마트는 대도시 마트와는 다르다. 꼭 필요한 공산품 몇 가지가 있을 뿐 야채나 과일, 고기 등속은 보이지 않는다.
성혜는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를 꺼내 계산대로 간다.
“저기... 혹시 두세 시간 전에 커피와 생수를 사러 온 남자 없었나요? 은회색 승용차를 탔는데.”
계산을 하던 청년이 시원시원 대답한다.
“아, 그 외지 분요? 이 리터짜리 생수 두 병하고 커피 한 병 사갔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차를 타셨기에 또렷이 생각납니다.”
성혜는 청년의 대답에 성마르게 묻는다.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아니,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보셨나요?”
청년은 뜨악해 하더니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냐는 투로 대꾸한다.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저는 이 자리에서 바코드만 찍는데.”
성혜는 마트를 나온다. 허탈한 웃음 같은 것이 속 어디에선가 느물거린다.
성혜는 마트 앞에 망연히 서 있는다. 햇빛이 바늘을 뾰족이 세운다. 눈이 아프고 살갗이 따끔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자와 선글라스를 챙겨 나올 걸 그랬다. 성혜는 셔츠 깃을 올려 드러난 목을 가린다.
평일이어선지 상점들은 문을 연 채 한가롭다. 성혜는 생수를 따 한 모금 마신 후 걸음을 뗀다.
정육점 앞이다. 그와 연배로 보이는 남자가 잘 바른 고기를 쇼케이스에다 진열하는 중이다.
성혜는 정육점으로 들어가 남자에게 말한다.
“저기... 혹시 두세 시간 전에 여기서 고기 사간 남자 없었나요? 은회색 승용차를 탔는데. 댁과 비슷한 나이예요.”
정육점 남자는 쇼케이스 문을 닫으며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아, 그 외지 분? 꽃등심 두 근 사가지고 갔습니다. 왜요?”
성혜는 마트에서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한다.
“어디로 갔는지 보셨나요?”
정육점 남자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빈들빈들 웃는다.
“어디로 갔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이 앞에다 차를 두곤 야채 같은 걸 한 보따리 싣고 갔습니다. 저쪽으로.”
정육점 남자가 가리키는 쪽은 펜션이 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이다. 성혜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정육점을 나온다. 안도감인지 초조감인지 모를 게 속을 달군다.
햇빛이 기세등등하다. 성혜는 푸성귀며 생선, 과일을 좌판에 늘어놓고 파는 데를 지난다. 그는 이곳 어디쯤에서 상추며 깻잎, 오이를 샀을 터이다. 그런 것들을 열 번쯤 사고도 남았을 시간까지 그에게선 연락이 없다. 느닷없이 지루함인지 피곤함인지 모를 게 엄습한다.
성혜는 국밥집 앞에 선다. 남자 둘이 밖을 등지고 국밥을 먹는다. 그와 비슷한 체격의 남자들. 성혜는 안으로 들어간다.
성혜는 남자들이 앉은 뒤쪽 테이블로 가 앉는다. 남자 둘이 휴지로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 남자는 얼굴이 거무튀튀하고, 다른 한 남자의 팔뚝엔 길게 수술 자국이 나 있다. 남자 둘이 성혜를 흘깃대며 셈을 치르고 나간다.
성혜는 국밥을 시킨다. 국밥에서 더운 김과 누린내가 물큰 올라온다. 성혜는 한 숟갈을 뜨다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넣는다. 꺼멓게 죽은 선지덩이와 시래기가 공사장에서 쓰다 버린 걸레다.
성혜는 선지덩이와 시래기를 숟갈로 뒤적인다. 뜨거운 김이 척척 얼굴을 덮는다. 성혜는 국밥 그릇에서 멀찍이 얼굴을 물린다. 갑자기 스테이크와 피자와 파스타가 떠오른다. 그것을 먹던 때 그의 나이프와 포크는 건성이었다. 그의 시선이 레스토랑 건너편에 있는 국밥집에서 멈췄다. 그는 나이프와 포크를 멈추더니 말없이 레스토랑을 나갔다. 성혜는 그가 국밥집엘 들어갔다 나오는 것을 보며 천천히 고기를 씹었다.
성혜는 국밥을 한 숟갈을 떠 후후 김을 분다. 뜨겁고도 매운 감이 목구멍을 와락와락 쑤셔댄다. 성혜는 숟갈을 놓고 국밥집을 나온다.
성혜는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그는 이미 펜션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휴대폰을 꺼내 본다. 전화나 문자 온 것은 없다. 성혜는 버스가 오길 기다리며 생수를 마신다. 미지근해진 생수. 성혜는 남은 생수를 길바닥에다 질질 쏟아버린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펜션엔 기가 꺾인 햇빛이 잔디에 내려앉아 있다. 빨랫줄은 비어 있고 작은 새 한 마리가 잔디에 앉았다 날았다 한다. 고적함이 주인이 된 풍경. 성혜는 갑자기 권태로워진다. 자극 없는 저 풍경, 너무나 평화로워 하품조차 할 수 없는 저 경건함. 찢을 수만 있다면 쫘악 찢고 싶은 욕구.
성혜는 룸으로 들어간다. 벽에 걸린 모네의 복사판 풍경화, 옅은 회색 바탕의 벽지에 찍힌 작은 도트 무늬, 흑갈색 소파, 주방 유리창을 통해 가스대로 내려앉는 햇빛, 부재중인 그. 오전을 그대로 복사해 붙인 오후. 피곤함이 견딜 수 없게 몰려온다.
성혜는 소파에 누워 눈을 감는다. 관광버스, 마트, 정육점, 생고기, 푸성귀, 좌판, 은회색 차, 국밥집.... 지난 영상들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관광버스에서 춤을 추며, 처음 보는 사람의 가슴팍에 안겨 땀 냄새와 하나가 되는 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연락 없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자유인가 무책임인가. 그는 시계라고 불릴 만큼 정확한 사람이다. 하지만 시계도 배터리가 다 되면 멈춘다. 그의 시계는 멈췄다. 왜.
어둠이 깔린다. 까닭모를 열기가 송곳으로 찌른다. 이박삼일의 여행 중 하루만 이곳에서 보냈다. 오늘 중 그가 돌아온다 해도 남은 하루를 여기서 보낸다는 건 의미가 없다. 일박이일로 충분했다. 꼭 그만큼의 시간이 적당했다.
이박삼일의 여행을 주선한 건 딸이다. 딸은 아빠 생일이라며 펜션을 검색하고 예약해 주었다. 성혜는 그때의 기분을 뭐라 표현하기 힘들다. 그와는 골프도 치러 갔고 가끔은 하루거리로 맛집도 갔다. 골프를 치러 갔을 땐 네 명이었고, 맛집을 갈 땐 딸이나 친정 쪽 사람이 끼었다. 다른 사람이 끼지 않은 둘만의 이박삼일, 긴 시간임엔 분명하다.
성혜는 짐을 싼 후 콜택시를 부른다. 택시는 불을 켜고 불빛 속으로 들어간다. 어둠이 없다면 맥을 못 출 불빛들. 어둠이 없다면 별 효과를 주지 못할 네온의 간판들. 비극이 있어야 희극이 있고, 희극이 있어야 비극이 있는 상대적 원칙들. 그의 부재는 상대적 원칙과는 무관하다. 아직은 그렇다.
낯익은 간판들과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눈에 익고 마음에 익은 것들은 아무리 화려해도 자극을 주지 못한다. 자극 없이 예와 아니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 안전을 보장한다. 그런데 참 신선하지가 않다.
성혜는 집 앞에 도착하자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들어간다. 하루 만에 보는 거실의 것들, 익숙해서 편안한 것들. 그런데 참 별 볼 일이 없다.
성혜는 캐리어를 거실에 놓고 소파에 앉는다. 저 짐엔 그가 들어있다.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핏자국을 만드는 그. 그는 왜 연락하지 않는 것인가. 성혜는 휴대폰을 꺼내본다. 전화나 문자는 들어있지 않다. 그는 어떤 무장을 했기에 이렇게 나온단 말인가. 배터리가 다 되어 간다면 눈치라도 줬어야 하지 않나. 그는 이기적이며 계약위반자이다.
성혜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온다. 텅 빈 집엔 펜션에서의 고즈넉함과는 다른 적막함이 떠돈다. 신문을 펼친다. 유가가 오르락내리락 불안하다고 한다. 유가가 요동을 친다 해도 영향을 받은 적도 받을 무엇도 없다. 다른 제목을 훑는다. 대출이자가 오른다고 한다. 대출이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음 장으로 넘긴다. 주식시세가 자잘한 글자와 도표로 전면을 채운다. 그가 주식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모른다. 다시 몇 장을 넘긴다. 교통사고와 실종사건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나. 아니면 납치? 성혜는 신문을 한쪽에다 치우고 가만히 있는다.
밤 열두 시가 가깝다. 집 근처에서 나는 소리는 없다. 소리가 없다는 게 공연히 신경이 쓰인다. 성혜는 발딱 일어나 새로 산 스타킹의 포장을 벗긴다. 빠작빠작 비닐 포장 벗기는 소리가 이물스럽다. 성혜는 비닐 포장을 와작 구긴다. 빠작거리는 소리가 폭탄 터지는 소리다. 성혜는 비닐 포장을 계속해서 폈다 구겼다 한다. 소리가 뇌를 강타한다. 성혜는 비닐 포장에 손을 쭉 넣고 움켜쥔다. 빠작대는 소리가 심장을 들까분다. 성혜는 비닐 포장을 구겨 던진다. 가슴이 쿵쾅대고 몸의 기운이 일시에 쭉 빠진다.
성혜는 한동안 비닐 포장을 노려보다 스타킹을 신는다. 살갗을 매끄럽게 감싸는 감촉. 모두가 흠모하고 차지하고 싶어 하는 육감적 실물. 성혜는 스타킹 신은 종아리를 천천히 문댄다. 매끌매끌한 감촉이 고혹적이다. 그런데 참 식상하다.
성혜는 문득 휴대폰을 열어 최근에 통화한 번호를 누른다.
늘 살갑게 대하던 목소리와는 달리 목이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아랫동서는 한밤중 전화에 놀란 눈치다.
성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톤으로 대꾸한다.
“으응, 그냥. 별 일 없지?”
아랫동서는 성혜의 대꾸를 믿으며 믿지 않는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하시다니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했어요. 잉꼬부부 형님한테 무슨 일이야 없겠지만 조카가 미국에 있으니.... 암튼 아무 일 아니라니 다행이에요. 그런데 어쩐 일로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셨어요?”
성혜는 언뜻 떠오르는 대로 말한다.
“지난 번 어머님 제사 때 고생 많았어. 그 말을 한다는 걸 깜빡했지 뭐야. 참, 동서, 된장 없다고 했지? 다음에 만나면 조금 나눠줄게. 간장도 있어. 이번에 담근 된장하고 간장이 아주 잘 됐거든. 도우미 아줌마가 요리사 출신이라 손맛이 좋아. 그전부터 준다 준다 해놓고 내가 이래요.”
성혜는 전화를 끊고 소파에 몸을 옹크린다. 적막감이 살인적이다. 위태로우며 조바심 나며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완벽한 단절의 무음.
성혜는 전화번호를 뒤진다. 남편과 성혜를 잘 아는 친구 임주.
성혜는 임주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별 일 없어서 별 일 없나 전화했어.”
늦은 시간이건만 임주는 예의 그 살이 통통하게 오른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별 일 없어서 전화했다는 말이 별 일 있어서 전화했다고 들려 이것아. 이 시간에 전화한 것부터가 별 일 아니니? 뱉어 봐. 들어줄게.”
무슨 말을 뱉어야 하나. 그와 여행 중인데 그는 자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가 연기처럼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임주는 성혜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말을 잇는다.
“자랑질이 하고 싶어 전화했어도 들어줄 수 있어. 너야 샘낼 수도 없게 완벽하잖아. 남편 연봉 올랐니? 아님 미국 유학생이 왕자라도 만났니?”
성혜는 스타킹 신은 종아리를 연신 문지르며 둘 다 아니라고 대답한다.
임주는 장난기가 들어있던 음성을 확 낮춘다.
“그럼 진짜 별 일 없는 거네. 근데 니 목소리엔 별 일이 잔뜩 들어있어. 뭐야?”
성혜는 양 손톱을 세워 스타킹을 잡아 늘이다 톡 놓다 해가며 대꾸한다.
“너가 잘 자고 있나 납치당한 건 아닌가, 갑자기 걱정이 돼서 전화했다 이것아.”
키득거리는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가볍게 건너온다.
“잘났어요, 그럼 그만 끊으세요. 잘 자게요. 혹시 너 시간 남니? 그러면 내가 자는 동안 멋진 놈한테 납치당하길 기도해주라. 내 소원이 그거거든.”
성혜는 전화를 끊고 임주가 한 말을 곱씹는다. 그도 멋진 놈에게 납치당하는, 그런 류의 소원을 품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성혜는 갑자기 머리 어디쯤이 뜨끈해온다. 한여름이 맨드라미 빛으로 타오르던 어느 날. 성혜와 남편과 지희는 야외 카페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었다. 파라솔 옆엔 어린 맨드라미가 핏빛을 토해냈고, 샌들을 신은 지희의 발톱엔 맨드라미 빛 페디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남편의 눈길이 지희의 발톱에 머물렀다. 성혜는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발톱에 끼를 부렸네.
남편이 지희에게 프러포즈를 한 건 발톱에 칠한 핏빛 때문이다. 지희가 남편의 프러포즈를 거절한 건 선배의 남자여서이다. 남편이 내게 프러포즈를 한 건 지희에게 거절을 당해서이다.
성혜는 지희의 번호를 누른다.
잠이 잔뜩 든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나온다.
“언니,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무슨 일 있어요?”
성혜는 짐짓 목소리를 누그리며 말한다.
“이 시간에 전화해서 놀랐나보네. 자다 받은 거야?”
지희는 그렇다고, 그렇지만 괜찮다고 말한다.
성혜는 뜬금없이 든 생각을 그대로 뱉는다.
“요즘도 그 빨강 페디큐어 발라? 그 색 예쁘던데 어디 제품 몇 호야?”
지희는 한동안 말이 없다 입을 뗀다.
“언니, 그러니까 지금 페디큐어 색이 궁금해서 건 거예요? 그건 아닌 듯하고 무슨 일이에요? 이 밤중에 전화한 걸 보면 급한 일 같은데.”
성혜는 스타킹을 쓱쓱 문대다 잡아 뜯다 해가며 말한다.
“어, 그런가? 미안. 갑자기 페디큐어를 칠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서... 너가 바른 그 색 정말 예뻤거든.”
지희는 말이 없다. 전화선에서의 삼십 초는 삼십 년이다.
이윽고 지희의 음성이 차분하면서도 싸늘하게 깔린다.
“지금 한 말, 언니답지 않아요. 전화 건 용건이 뭐예요?”
성혜는 스타킹을 손바닥으로 도르르 말아 밀며 말한다.
“으응 그렇구나. 그럼 뭣 좀 물어봐도 돼? 우리 그이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야?”
지희는 페디큐어 색을 물었을 때처럼 말이 없다. 말없이 사라진 그나 의문부호로 있기만 하는 지희. 침묵의 소리가 참을 수 없게 무겁다.
지희가 침묵을 깬다.
“언니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전화했는지 모르지만 듣기가 참 그러네요.”
성혜는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서성댄다.
“아니, 기분 나쁘라고 한 소리는 아니고,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
지희의 음성이 단호하다.
“언니, 나, 애들하고 남편하고 잘 지내요. 이런 전화라면 다시 안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성혜는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 언제까지고 있다. 생고기와 무공해 야채, 생수와 커피를 샀으면서도 돌아오지 않는 그. 관심을 받고 싶었다면 신문에 난 것처럼 납치라도 당해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었다면 후배와 연애질이라도 해라.
성혜는 스타킹을 벗어 홱 던진다. 저 허물은 두 다리를 감싸던 또 하나의 피부이다. 남편의 실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단순한 물질.
성혜는 소파에 벌렁 눕는다. 둘이 살기엔 지나치게 넓은 집. 둘이 누워도 넉넉한 소파. 둘이 보기엔 커다란 티브이. 둘이 누리기엔 남아도는 시간과 돈. 그런데 참 허접하다.
성혜는 휴대폰 전원을 끈다. 사라져 연락이 없는 그도 전원이 꺼진 휴대폰이다. 경치 좋은 호수처럼 살아온 부부에게는 갑자기 들이닥친 날벼락이다. 어쩌면 그는 언젠가부터 날벼락을 꿈꾸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는 근거도 없이, 근거 모를 불안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성혜는 거실에서 침실로, 침실에서 거실로 왔다 갔다 한다. 그는 돌아올 때가 되면 돌아오리라. 마블이 좋은 싱싱한 고기와 유기농으로 재배한 채소를 들고 펜션으로 돌아오듯 그렇게 오리라.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다. 남편은 집을 놔두고 어딘가를 쏘다니는 타입이 아니다. 남편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날벼락이라니, 익숙한 것에 길들여진 생물은 익숙한 것을 거역하지 못한다.
성혜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 길거리엔 잠 못 이루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저 어정쩡한 유령들. 저들을 받아들이기엔 이 시간 이 거리는 너무 늙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밖으로, 그저 밖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비틀비틀 배회한다. 먹은 술을 토하는 여자, 그 여자의 등을 두르려주는 남자, 횡설수설 대며 욕을 퍼더버리는 남자, 그 남자의 겨드랑이를 끼고 높은 굽의 힐로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여자. 밤거리의 사람들은 낮을 게워내느라 부산하다. 그에게선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렵다면 어려운 광경이 들치근하게 즐비하다.
술집에서 한 떼의 남녀가 우르르 나온다. 그들은 기분 좋게 맨홀에 빨려 들어가듯 노래방으로 들어간다. 거리는 순간 조용해진다. 그것도 잠시, 또 한 떼의 사람이 무엇엔가 홀린 듯 노래방으로 들어간다.
저들은 관광버스의 사람들이다. 흔들리고 싶고, 토하고 싶고, 타인의 체취에 자신의 체취를 문대고 싶어 하는 욕망의 덩어리들. 그는 저 안에 있는가 없는가. 그가 관광버스를 닮은 술집과 노래방, 그 틈 있다면 돌아올 것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성혜는 그가 다니는 직장 건물이 있는 곳으로 간다. 건물 일층 쇼윈도에는 수영복을 입은 마네킹이 서 있다. 성혜는 마네킹의 위아래를 찬찬히 훑는다. 살도 없으면서 살을 가진 양, 피도 없으면서 피가 도는 양, 제법 진지하다. 그런데 너 참 웃긴다. 죽을 때까지 늙지도 않을 것이 누구를 닮았다. 성혜는 입가를 틀며 픽, 김빠지는 소리로 웃는다.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열흘 째, 그는 연락 두절, 깜깜절벽으로 여전히 묵비권이다. 뜨뜻미지근한 열기가 몸 안을 휘돌며 떠다닌다. 그가 납치를 당했다는 뉴스는 나오지 않는다. 피살 소식도 없다. 지인 중 누가 봤다는 말도 없다. 회사에서도 출근하지 않았다는 연락이 없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인가. 혹시 강가 어느 그늘막 아래서 마블이 좋은 생고기와 생수, 커피를 먹고 있나. 왜? 무엇 때문에? 다툼 한 번 없이 살아왔는데 뭐가 부족해서? 성혜는 속이 따끔따끔해온다.
거실엔 열흘 전에 놓았던 캐리어가 그대로다. 성혜는 캐리어 앞에 우뚝 선다. 저 압축된 케이스에는 뭐라 칭할 수 없는 것들이 들어있다. 열흘 전의 그와 그의 아내가 작은 관속에 틀어박혀 신음한다. 아니, 그는 실종이라는 이름으로 관을 탈출했다. 실종이라면 자의적인가 타의적인가. 내밀한 욕망인가 억지 연출 쇼인가. 만에 하나 자작극이라면 산들바람이 아니라 토네이도가 돼라.
전화가 온다. 모르는 번호. 성혜는 받을까 말까 하다 받는다.
처음 듣는 목소리가 머리를 꽝꽝 친다.
“배 선배님 댁이죠? 저는 선배님 대학 후배입니다. 전화 받으신 분은 형수님이시죠? 형수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선배님을 취재하고 싶어 전화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 그의 실종과 취재와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것인가.
성혜의 목소리에 잔뜩 경계심이 묻어나온다.
“취재라니요? 어느 신문사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에겐 아무 일도 없습니다. 취재할 뭐가 없다는 말입니다.”
후배는 아차 싶었는지 말을 고친다.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이라기보다 선배님 댁을 취재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신문사는 아니고 여성 잡지삽니다.”
후배 기자의 말은 그가 아닌 그가 사는 가정을 취재하겠다는 얘기다.
성혜는 후끈 열이 오른다.
“우리 집을 취재하겠다니요.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요.”
후배의 어투가 조심스러워진다.
“선배님이 말씀 안 하시던가요? 벌써 석 달 전에 말씀드렸는데요. 선배님도 좋다고 하셨고요. 선배님이 바쁘셔서 잊으셨나 봅니다.”
석 달 전이라면 열흘 전과 같다. 일이 이렇게 꼬이지만 않았다면 십 년 전이나 열흘 전이나 다르지 않다. 석 달 전, 그는 오늘의 실종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열흘 전, 읍내로 나가 생고기와 야채를 살 때도 오늘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의 실종은 충동적인 것인가 타의적인 것인가.
성혜는 곤혹스러움을 추스르며 말한다.
“글쎄요.... 취재 요점이 뭔지는 몰라도 남편은 장기 해외출장 중이라 곤란하겠는데요. 몇 달 뒤로 물리시든가 없던 걸로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후배는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아, 그래서 선배님과 전화 연결이 안 되었던 거군요. 뭐 그래도 좋습니다. 석 달 전에 선배님과 통화 할 때 형수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형수님만 오케이 하신다면 오늘 당장에라도 찾아뵙겠습니다. 취재에 응해주시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평소대로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여드리면 됩니다. 편집은 저희가 알아서 할 거니까 큰 부담 갖지 마시고요.”
후배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통상 여느 집의 흐름과 비슷하다. 집안일은 아내들이 알아서 한다는 것. 그러나 지금의 실종을 토대로 듣는다면, 그는 석 달 전부터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의 부재가 더없이 신물로 올라온다.
후배의 말이 이어진다.
“선배님이 계시면 좋겠지만 안 계셔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포커스는 형수님께 있으니까요.”
행복한 가정은 아직도 여자들 몫이다. 전근대적인 사고네 뭐네 해도 가정의 행복은 여자들에게 달려있다고 말한다. 행복도 단수가 아닌 복수이며, 얼기설기 얽힌 거미줄과도 같은데, 여자들이 행복의 책임자란다. 잡지사는 멈춘 시대를 취재할 작정인가.
성혜는 후배 기자에게 잘라 말한다.
“그런 것이라면 우리 집 말고 다른 집이 낫겠는 걸요. 좀 부담스럽습니다.”
후배는 성혜의 거절을 의례적인 사양으로 돌린다.
“형수님도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학교 선후배 사이에선 선배님 가정만큼만 되라는 말이 전설로 나 있습니다. 선배님은 성공한 인생의 롤 모델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사진 한 장만 준비해 주십시오. 최근에 찍은 가족사진이면 더 좋겠습니다.”
성혜는 다시 한 번 같은 말로 거절의 뜻을 비친다.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지금은 남편도 안 계시고 나중에 하는 게 어떨까요? 없었던 걸로 해주시면 더욱 좋고요.”
후배의 목소리에 애원이 묻어나온다.
“형수님, 그러지 마시고 꼭 부탁드립니다. 저, 이번 취재 못 따면 회사에서 잘립니다.”
성혜가 첫 직장을 다니던 때 과장은 성혜를 불러 말했다.
“내가 말이야, 오늘 당직인데 사정이 좀 생겼어. 해서 말인데 오늘 내 대신 당직 좀 서 주지 그래.”
성혜는 말문이 막혔다.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
과장의 낯빛이 차가워졌다.
“어, 그래?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성혜는 자발적 당직을 해야 할 만큼 일에 치였다. 올린 기안은 퇴짜, 새로 짜서 올린 기안도 퇴짜.
성혜를 보던 회사 선배가 말했다.
“너, 괘씸죄 걸린 거 아직도 모르겠니? 괘씸죄, 그거 은근히 크다. 과장이 당직 얘기를 꺼냈을 때 넌 무조건 예, 했어야 해. 여기 있는 직원들, 처음 들어오면서 다 치렀던 코스야. 노를 한 건 니가 첨이고. 앞으로 너의 직장생활이 비디오로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혜는 결국 사표를 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선 이럴 때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교육은 현실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게 아니라 읽어내지 않았다. 대학도 마찬가지였지만 학생들은 나름 처세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번역본으로 동아리 세미나를 하던 때였다. 성혜는 원본과 번역본을 비교를 하며, 이 대목의 단어는 전체 글로 볼 때 다른 단어를 쓰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성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동의하는 학생은 없었다. 성혜는 자신이 한 말이 왠지 모르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걸 느꼈다.
세미나가 끝나자 번역이 원본의 글을 잘 살렸다고 말한 선배가 다가왔다.
“너, 졸업하려면 몇 년 남았니? 텍스트 번역자가 누구라는 거 몰랐니? 니 지적은 번역자를, 다시 말해 우리 지도교수를 엿 먹이는 짓이었어. 누군 몰라서 그렇게 말한 줄 아니? 순탄하게 학점 따고 싶음 그냥 예, 예, 그러면 돼. 잘난 척 쫑알거려봐야 인생 쪽 난다. 명심해라 이 초짜야.”
그의 후배라는 기자는 일찌감치 예, 예, 의 위력을 알았던 듯하다. 무책임하게 실종이나 터뜨리는 그보다 낫다면 낫다. 그는 행복한 가정의 롤 모델로 있길 바랐나. 예, 예, 하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갔나. 그 자리가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딱딱한 재질이지만 살갗이 있는 양, 피가 도는 양, 그런 줄 알고 있었나. 그렇다 해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문자가 온다.
형수님, 취재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레 오전에 뵙겠습니다.
사진을 찾아놓으라는 뜻이다. 할 말을 준비해 두고 행복한 가정의 안주인 모양새를 갖춰달라는 말이다.
성혜는 서재로 가 책꽂이에서 사진첩을 꺼낸다. 몇 장을 들추도록 딸과 성혜 사진뿐이다. 성혜는 몇 장인가를 넘긴다. 셋이서 찍은 사진이 딱 한 장 나온다. 성혜와 딸은 치~즈로 웃고, 그의 시선은 렌즈가 아닌 렌즈 너머에 고정되어 있다. 성혜는 다시 몇 장을 넘긴다. 부부 사진이 한 장이 나온다. 이번에도 그의 시선은 렌즈 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다. 표정 없는 얼굴에 우울한 것 같기도 하고 쓸쓸한 것 같기도 한 분위기가 깔려 있다.
성혜는 사진첩을 덮는다. 그는 가족인가 아닌가. 가장이라는 틀을 부수고 싶었나 행복에 지쳐 스스로를 제거하고 싶었나. 성혜는 그가 펜션에서 혼잣말처럼 했던 말이 떠오른다.
“경주마를 풀어주면 어디로 갈까. 우선은 마주가 없는 데로, 마방이 없는 데로...”
성혜는 갑자기 욕지기가 난다. 흔들리고 싶고, 토하고 싶고, 타인의 체취에 자신의 체취를 문대고 싶어 하는 욕망 덩어리는 누구도 아닌 그다. 예, 예, 로부터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예와 아니오의 단답형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행복한 가정을 골탕 먹인다. 이런 빌어먹을!
질투심 같은 것이 맹렬히 타오른다. 세미나 때 선배가 한 말처럼, 누군 몰라서 이렇게 사는 줄 아나.
신혼 시절, 시어머니는 성혜에게 말했다.
“좋은 집안의 외동딸이라는 거 안다. 그렇다고 시어른이 하는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냐?”
성혜는 전을 뒤집다 멈췄다.
“어머니, 말대꾸가 아니라 제 의견을 말씀드린 거예요. 명절엔 어느 집이나 똑같은 음식을 해먹으니 다른 메뉴로...”
시어머니는 부침개 뒤집개로 프라이팬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또! 또! 또! 그렇게 말을 해도 못 알아듣니? 넌 밥 먹었니? 그러면 예, 어디 나갔다 왔니? 그러면 아니요, 그러면 돼. 거기다 무슨 토를 달고 잔소리를 해. 니 남편을 보고도 모르겠니? 쟨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말대꾸라는 걸 모른다. 내 말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어. 너보다 못나서 그랬겠니?”
그는 예와 아니오를 부침개 뒤집개로 뒤집듯 집을 나갔다. 이래도 되나. 나쁜 자식!
성혜는 거실에 둔 캐리어 앞으로 간다. 그는 저 가방에 갇힌 게 아니라 보란 듯이 자신만의 방을 찾아 나갔다. 잉꼬부부가 없고, 행복의 롤 모델이 없는 섬으로, 그것들에 맞추려 불침번을 서야했던 노역으로부터, 남편은 점점 멀어진다. 둘이 살기엔 황량한 이 집으로부터, 다툼 한 번 없던 그 고인 물로부터, 마블이 좋은 생고기와 무공해 야채를 준비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간다. 부단히 원했지만 참아야 했던 바로 그것을, 그는 선수를 쳐 장악한 것이다. 질투심이 이글거린다.
성혜는 휴대폰을 집어 한참을 들여다본다. 압축번호 일 번엔 그가 들어있다. 성혜는 압축번호 일 번을, 천천히 누른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가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은 확실해졌다. 성혜는 와락 휴대폰을 움켜쥔다. 어째서 그동안 그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던 걸까. 엉뚱한 사람이나 붙잡고 시답잖게 전화질이나 한 까닭은 무엇일까. 알 듯 모를 듯 했던 불안감과, 미열과도 같이 끈질기게 달라붙던 초조감은 무엇이었을까. 이 복잡한 마음의 틀은 무엇이며 부러움의 정체는 또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그는 자신의 생일날, 자신에게 생일 선물을 한 셈이다. 실종이라는 그 아름다운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원하던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런데 참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