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와 작가와 독자의 입장과 차이
비평가와 작가와 독자의 입장과 차이
-파스칼 키냐르 『세상의 모든 아침』의 메타포를 중심으로-
류재화 교수는 “메타포란 은유라기보다 끊임없이 범람해야 하는 ‘전이’이며 ‘변신’이며 그래야만 생기할 수 있는 사물-존재의 본성”이라고 말한다.
말이 어렵다. 그러나 차근차근 들여다보니, 메타포를 단순히 은유로 생각하던 기존의 생각을 수정•확장하게 된다.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이나 롤랑 바르트, 마르셀 프루스트,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작품은 류재화 교수가 말한 메타포를 전형으로 보여준다. 문학 비평가들이 대체적으로 하는 말은, 위의 작가들은 어떤 미사여구나 군더더기를 생략하고 단 한 줄로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한다. 프루스트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썼으며, 플로베르는 글쓰기를 대단히 힘들어했다고 한다. 글을 쓸 줄 몰라서가 아니라 가장 적절한 문장을 쓰려고 고심했다는 말이다. 프루스트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언어를 함부로 쓰지 않으려 고심했다는 것은 익히 하는 바다.
예컨대 플로베르가 쓴 작품 중 연인과 헤어진 장면을 보면 “밤새도록 울었다” 이 문장 하나가 전부이다. 모 비평가는 그 문장 하나에 주인공의 심정이 다 들어있다고 한다. 무엇을 더 붙이고 말고 할 게 없단다. 그러나 독자 입장에선 이별의 고통과 슬픔이 좀 더 구체적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비평가들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분석적으로 보니 그렇지만 독자들은 언어가 주는 즐거움도 느끼고 싶어 한다.
다른 예를 들면, 파스칼 키냐르의 『세상의 모든 아침』 앞부분에는 “그는 아내를 무척 사랑했다”라고 쓴 문장이 있다. 플로베르가 “밤새도록 울었다”처럼 아주 간단명료하다. 그런데 나는 이 문장이 무척이나 불만스럽다. 사랑하는 방식도 여럿이고, 사랑하는 과정도 다양한데 달랑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라고 쓴다면, 이것은 묘사가 아닌 설명이고, 그렇게 쓴다면 어느 누가 글을 못 쓰랴 싶다.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떠한 행동과 심리 상태인지를 보여줘야 독자로 하여금 아, 그는 아내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알 수 있다. 물론 후반부로 들어가면, 주인공 생트 콜롱보가 죽은 아내를 혼으로 만나기도 하고, 죽은 아내를 위해 ‘회한의 무덤’을 작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해서라기보다 아내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는 죄책감, 애정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기인한다.
여기서 『세상의 모든 아침』을 번역한 류재화 교수의 말을 빌면 “타자를 ‘향한’ 사랑이라기보다 타자 ‘속’으로 들어가기, 먹히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입부에 단언적으로 나온 “그는 아내를 사랑했다”라는 문장은 잘못된 것이다.
류재화 교수는 덧붙인다. “파스칼 키냐르는 글쓰기의 열정을 언어 자체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미문을 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언어는 행복의 도구가 아니며, 개인 혹은 개별적인 것의 산물이 아니다”(『은밀한 생』)라고 키냐르의 말을 인용한다. 아울러, “키냐르는 언어가 아니라 언어의 근원에 닿아야 한다고 말한다”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키냐르와는 다르다.
언어는 인간이 만든 것이며, 그래서 언어의 한계는 분명 존재하지만(우리가 언어로 표하지 못하는 숱한 감정의 경우) 행복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개인 혹은 개별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언어 때문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위안을 받기도 하며, 그에 따른 견해와 감정을 표하는 것만 봐도 언어는 도구이다. 물론 키냐르의 지향점은 언어를 넘어선 언어를 추구하는 것이나, 과연 그런 게 있는지,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키냐르는 『세상의 모든 아침』에서 언어가 아닌 음악을 소재로 하고, 음의 근저를 자연의 소리에 둔 것이나, 내가 보기에 언어의 근원을 찾았다기보다 찾는 과정을 쓴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언어의 근원은 언어를 통해야만 닿을 수 있다. 언어 너머의 언어를 찾고자 음이나 색을 동원해도, 언어는 언어만이 가진 고유한 기능과 세계가 있다. 음이나 색 역시 마찬가지다. 말이 쉬워 언어의 근원을 찾는 것이지, 단언컨대, 언어 너머의 언어, 언어의 근원은 찾을 수 없다. 인간에게 한계가 있듯, 인간이 만든 언어나 음, 색, 그런 것에도 한계는 분명 있다. 그래서 키냐르는 자연의 풍경과 소리, 색을 끌어와 언어를 넘어선 언어, 음을 넘어선 음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언어를 우회적으로 표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언어의 고유 기능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언어 너머의 언어를 찾는 일은 인간이 시간을 해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결 불가능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문장의 간결성에 대해 보자. 비평가들은 앞에서 제시한 작가들의 경우, 단 하나의 문장으로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나라가 가진 언어의 특색에 있다고 본다. 프랑스어를 잘 모르긴 하나, 우리나라 언어의 경우 형용사와 의성어가 발달되어 있다. 우리나라 문학작품을 보면 형용사와 의성어가 사투리와 겹쳐 맛을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문과는 다르지만, 언어의 활용도를 높인 경우이다. 독자들은 그러한 글에 작가와 공감하며 감성과 지성을 나눈다. 언어가 어찌 행복의 도구가 아니며 개별적인 것이 아닐 수 있나,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모든 문학작품을 비평가의 눈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 평가가 다 맞는다고 할 수도 없다. 비평가가 가치를 둔 작품이지만 독자에게는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작가 또한 비평가나 독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에 맞게 쓸 일도 아니다.
다만, 고전으로 일컫는 작품들이 어째서 고전인지, 거기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 작가와 독자는 탐색해야 한다.
파스칼 키냐르가 “그 모든 장르가 뒤섞인 혹은 그 어떤 장르도 아닌 그저 ‘문학’을 추구”한 일은 대단한 시도이다. 어찌 보면 매우 추상적이고 애매하고 불안한 일이기도 하다. 키냐르가 자신의 글을 ‘메타포화’하는 것으로 장르를 뛰어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글, 그 모든 것을 뒤섞은 듯한 글을 썼지만 문학성을 인정받은 것은 내공이 그만큼 튼튼했다는 반증이다. 번역자가 작가 연보에 쓴 글을 인용해보면 “몇몇 아카데미 공쿠르 위원들은 소설 장르가 아닌 이 작품(『떠도는 그림자들』을 말함)에 공쿠르 상을 수여하는 것에 흥분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바로 똑같은 이유로 흥분하며 찬성했다. 키냐르식의 탈(脫) 장르적 혹은 범(凡) 장르적 글쓰기는 예술은 ‘장르’라는 구축된 시스템에 무임승차하는 것이 아닌, 시스템을 내부에서 교란하고 궤멸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확산시켰다. 엄청난 독서의 흔적이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키냐르의 글은 독자와 저자라는 구분법을 없애려는 열망을 드러내며...”로 나온다.
나는 작가 입장에서, 비평가들이 위에 열거한 작가들의 작품을 두고 “글은 이렇게 써야한다”는 식으로 말할 때면 주눅이 든다. 동시에 반발심도 난다. 작가들이, 비평가들이 말한 대로 쓴다면 이 세상의 문학작품은 한결같을 것이며 다양한 재미를 얻기 어렵다. 작가들은 나름의 글쓰기 방식이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썼을 때 개성 있는 글이 나온다. 미문이나 군더더기를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밤새도록 울었다”처럼 한 문장으로 주인공의 심리를 압축하는 것만이 미덕은 아니라고 여긴다.
독자들 역시 내러티브로 재미를 얻기도 하나, 언어가 던지는 특유의 재미를 원하기도 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비평가는 마음껏 비평하라.
작가는 마음껏 쓰라.
독자는 마음껏 읽고 느끼라.
정리라고는 했지만 뻔한 말이고, 비평가나 작가도 책을 잡을 때는 독자가 된다. 키냐르가 “독자와 저자라는 구분법을 없애려는 열망”은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