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의를 캐스팅하다.-<지연된 정의>를 읽고-

유리벙커 2017. 1. 23. 00:25

 




2016년 어느 날 스마트폰으로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라는 스토리펀딩을 읽었다. 파산된 변호사 박준영이, 무고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파산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유명한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지적 장애인이라 한글을 쓰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미성년자도 있었으며, 돈도 없었고, 변변히 자신을 변호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형사가 써준 자술서를 그리라는 대로 그려 제출한다. 그들은 실형을 받고 옥살이를 한다. 그러던 중 우여곡절 끝에 진범 3인이 나타나 우리가 진범이라고 자백한다. 그러나 법원에선 진범을 풀어주고(그것도 3번이나) 지적 장애가 있는, 옥살이를 하고 있는 3인을 진범으로 밀고 간다. 왜 그랬을까. 박 변호사는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재심을 신청하기로 한다. 이미 대법원에서 판결이 난 사건이다. ‘가짜 범인 3이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고, 재심을 해도 무죄를 받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러나 박 변호사는 사재를 털어가며 이들을 돕는다. 왜 그랬을까.

그 사연을 읽은 후 스토리펀딩에다 기부금을 보냈다. 이메일로 연락이 왔다. 기부금을 낸 사람에게 책을 두 권 보내주겠단다. 그 중 하나가 지연된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박 변호사와 같이 뛴 기자가 쓴 똥만이라는 동화책이다.



똥만이의 저자 박상규는 기자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법한 스펙이 없다. 그는 청계산 보신탕집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겨우 한글을 뗀다. 똥만이는 박 기자의 자전적인 동화다. 그렇다고 늦게 깨우쳐 이러구저러구 성공한 성공담이 아니다. 똥만이의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목욕탕 때밀이로 열심히 살아간다. 똥만이는 그런 엄마와 아버지 사이를 오가며 지낸다. 아버지가 밤 깊어 오토바이를 타고 화투를 치러 가는 날이면 똥만이는 청계산 깊은 골에 있는 오작교라는 보신탕집에 덜렁 남아 무서움에 떤다. 그렇게 자란 똥만이, 즉 박상규 기자는 속칭 지잡대를 평점 2.55로 졸업한 후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 우연히 <오마이뉴스>기자가 된다.

전라도 섬의 고졸 출신 박 변호사와 지잡대출신 박 기자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그들의 만남은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식인이지만 변방에 속하고, 살림살이가 팍팍하고, 무엇보다 약자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들 역시 사회적 에 속한다.

 

 

지연된 정의에는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과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도 들어있다. 매스컴을 통해 익히 아는 사건들이다. 두 사건의 피의자 역시 사회적 약자이기에 죄를 뒤집어써야 했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의 피의자는 미성년자로, 그 사건의 용의자를 보았다고 말하는 바람에 피의자로 둔갑한다. 무기수 김신혜 또한 고졸 출신의 23세 여자로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로 복역 중이다.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과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김신혜의 친족 살인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피의자들은 배움이 적고, 지적 장애가 있거나 가정불화로 편모나 편부 슬하에 산다. 거기다 가난하고 연줄이 없어 변변히 변호사를 쓰지 못한다. 국선 변호사가 있긴 하나, 국선 변호사는 그들을 변호하기보다 자백을 해야 형량을 줄일 수 있다고, 억지 자백을 유도한다. 경찰은 구타와 협박으로 자신들이 만든 시나리오를 들이밀며 피의자를 만든다. 판사는 피의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피의자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면 괘씸죄로 형량을 늘인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사회적 약자는 꼼짝없이 배운자들의 시나리오에 맞춰 피의자가 되고 옥살이를 한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깊은 상처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한다.

박준영 변호사는 스스로를 국선 재벌이라고 할 만큼 국선 변호를 많이 맡아했다. 박 변호사는 죄인 아닌 죄인을 만들어내는 법조인들의 구조적 병폐에 칼을 들이댄다. 그 역시 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백도 없고 돈도 없다. 월세방에 살면서 지적 장애가 있는 피의자들에게 기차표를 사주고 밥을 사주며 돈 몇 푼을 주머니에 찔러준다. 무기수 김신혜를 면회하면서는 텀블러에 아메리카노를 담아 간다. 평생 바깥을 보지 못할 사람이니 커피 향이라도 맡게 해주고 싶어서다. 당연하게도 교도관에게 제지당한다. “언제 밖으로 나갈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 향은 더 큰 형벌일 수 있어요. 계속 커피 향이 그립고 마시고 싶을 게 아녜요이 말을 듣고 박 변호사는 김신혜의 고향 완도에 핀 매화를 꺾어 꽃 배달을 한다.

이렇듯 박 변호사는 약자에게 따뜻하며 적극적이다. 그가 박 기자를 처음 만나 한 말은 이렇다. “일을 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돈을 많이 벌면서 공익 활동을 한다? 그게 거의 불가능해요. 약자를 위하는 일은,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에요. 그들의 삶을 모르면서 어떻게 그들을 도와요?”

그는 왜 이렇게 약자에게 관심이 많을까. 변호사로 개업해 근사하게 살지는 못할망정, 월세방을 면하는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일찌감치, 인간의 존엄성을 알았던 듯하다.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해선 존중 받아야 한다는 걸, 그는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박상규 기자가 쓴 대목을 옮기면 이렇다. “국가가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삼례 3인조를, 고졸의 가난한 박 변호사가 사람으로 대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 박 변호사의 변론은 거기서 출발하고, 다시 거기로 향했다. 박 변호사는 그걸로 싸웠고, 그걸로 이겼다.”

말이 그렇지, 저 말대로 할 사람이 어디 그리 있을까. 말이란 참 희한해서, 행동이 따라주지 않으면 진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

저 사건의 피의자들을 피의자로 만든 경찰, 검찰의 담당자들은 지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정의를 외치며 법과 질서, 국민을 앞세운다. 그러나 그들은 피의자들의 말을 구타로 묵살했고, 서류를 조작했으며, 법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서를 통과시켰다.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음에도, 그들의 입엔 정의가 붙어 다닌다. 그들이 말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법조문에 있는 것을 달달 외운, 혹은 교과서에서 배운 낱말에 불과한 것을 진짜 정의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나는 정의란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다. 정의란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걸 전제로 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 양심이 곧 정의다.

박 변호사와 박 기자는 양심을 따랐던 것이다.

몇 개월 째 계속되는 박근혜 탄핵의 촛불시위도 알고 보면 정의를 외치는 것이다. 정의가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닐진대, 어느 기관이나 사람에게 가면 수단으로 전락한다. 참으로 더디고 복잡하게 왜곡되는 정의. 정의가 누구 집 개 이름인가.


책이 끝나는 지점에 가면 이런 말이 나온다. “수사기관, 법원만 사회적 약자에게 냉정했던 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냉정하게 그들을 차별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나를 향하는 듯한 저 목소리는 그 어떤 웅변보다 울림이 크다. 나는 지인에게 들은 어느 무기수에게 이 책과 사식을 넣어주려 한다. 그 무기수는 살인 공범죄로 무기형을 받았다고 들었다. 나이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지만, 복사된 정의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나로선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란다. 혼자 있지 않다는 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