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짐승>>의 뜨거운 음성
필립 로스/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이 작품은 대단히 매력적이고 래디컬하다. 웬만한 작가들이 에둘러 말하는 성적 언어를 거리낌 없이 던진다. 묘사 또한 대단하다. 디테일해야 할 부분에선 디테일해서 심리적인 공감대를 이끈다.(작가들이 나도 한 번 해보자고 덤비는 그 디테일이야말로 예민하다. 단순하게 건너뛰어야 할 부분마저 세세히 말하는 바람에 독자를 지치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섹스 장면에선 어느 포르노그래피 못지않게 적나라하다. 사실 성적 표현만큼 까다로운 게 없다. 까딱하다간 천한 느낌을 주어 독자로 하여금 거부감을 일으킨다. 필립 로스는 그 한계를 가히 뛰어넘는 탁월한 작가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나이든 남자와 어린 여자의 섹스 드라마다. 나로선 배경이야 어떠하든, 어떻게 미화를 시키던, 해석의 여지가 얼마나 있던, 이런 류의 소설에 혐오감을 가졌다. 그러나 내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진 게 이 소설이다.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섹스를 통한 시대적 정치적 담론과 늙음, 죽음에 관한 버전이 들어 있다. 도대체 섹스란 무엇인가. 섹스와 미국의 현실 정치는 또 어떻게 연결되는가. 왠지 모를 궁금증으로 시작한 소설은 장을 넘길수록 어디서부터 가닥을 잡아야할지 벽에 부딪친다.
‘나’로 나오는 주인공 데이비드 케페시는 누군가에게 지난 일을 조곤조곤 읊조린다. 그 누군가는 케페시 자신 일수도 있고, 대중일수도 있고, 그 누구도 아닐 수 있다.
케페시는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방송에도 나오는, 나름 유명하고 나이 많은 교수다. 지금 의 나이는 62세로 8년 전 얘기를 한다.
케페시는 수업을 들으러 오는 예쁜 여학생에게 마음을 뺏기는 스타일이다. “여학생들이 첫 수업에 오면 나는 그 즉시 나한테 맞는 아이가 누구인지 알지.”12쪽. “이 학생들은 명성에 무력하게 이끌리고 있는 거지.”12쪽.
케페시는 자신이 가진 권위와 유명세로, 이런저런 여학생과 섹스를 한다. 62세 때 케페시는 수업에 들어온 콘수엘라 카스티요라는 24세의 쿠바 출신 여학생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녀는 차림새로 볼 때 안정적이고 부유하며 보수적 가치를 중심으로 여기는 가정에서 잘 교육 받은 학생이다.(그에 관한 디테일 묘사는 독자를 압도한다.) “나는 즉시 이 아이가 내 여자가 될 것임을 알았어.”15쪽.
케페시는 기말시험이 끝나면 학생들을 집으로 초청해 파티를 여는데 이때 콘수엘라도 부른다. 그녀는 몸집도 크고 키며 가슴도 크다. 케페시는 다른 여학생들에게 ‘섹스의 기회’를 은근히 주었듯 콘수엘라에게도 준다. 그러나 콘수엘라는 그날 밤 자고 가지 않는다.
케페시는 계속해서 콘수엘라에게 기회를 만들어 섹스 하는 데까지 나간다. 이때 케페시는 “꼭 필요한 매혹은 섹스뿐이야. 섹스를 제하고도 남자가 여자를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생각할까?”28쪽. 라고 말한다. 여기서 섹스는 원초성에 기반을 둔 약육강식으로 볼 수 있다. ‘살아’ 있으면서 ‘산’ 것을 먹어치우는 정복의 전쟁성.
케페시는 콘수엘라의 ‘몸’, 성으로 가득 찬 몸뚱이를 찬양한다. 그렇게 빠져들수록 콘수엘라가 사귄 과거의 남자들에게까지 질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콘수엘라는 탐폰을 빼고 피가 흐르는 다리로 욕실에 서 있다. 그 모습을 보자 케페시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피를 핥는다. 그 일을 케페시는 조지라는 후배에게 말하는데, 그때 후배는 이런 말을 한다. “나를 섬겨라. 아이는 말하죠. 피를 흘리는 여신의 신비를 섬겨라. 선배는 그걸 핥지요. 그걸 먹지요. 그걸 소화하지요. 그 아이가 선배를 뚫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 다음엔 뭡니까. 데이비드? 그 아이 오줌 한 잔? 아이에게 똥을 달라고 간청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요? 그게 비위생적라서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역겹기 때문에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게 사랑에 빠지는 거라서 반대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이 원하는 유일한 강박. 그게 ‘사랑’이에요.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완전해진다고 생각하지요? 영혼의 플라톤적 결합? 내 생각은 달라요. 나는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완전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랑이 사람을 부숴버린다고. 완전했다가 금이 깨지는 거지요. 그 아이는 선배의 완전성 안으로 들어온 이물질이에요.”122쪽-123쪽. 그러면서 후배는 콘수엘라와의 사랑을 “인생이 우리에게 주는 전부라고요. 맛보기. 그 이상은 없어요.”라고 일갈한다.
그렇게 말했던 조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 후 식물인간이 돼 죽음 직전까지 가는데 그때 감각이 남아 있는 한쪽 팔로 케페시와 가족과 아내를 끌어당겨 키스를 한다. 이때 조지는 자기 아내가 입은 블라우스에 달린 단추를 풀고 가슴의 단추를 풀려고 애를 쓴다. 그러자 아내가 대신 가슴의 단추를 푼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돌아서며 이런 말을 한다. “조지가 날 누구로 생각했을지 궁금하네요.”149쪽. 말하자면 조지는 불륜을 부인하고 지탄했지만 사실은 자신 역시 불륜에 빠져있었다는 뜻이다. 미국의 자기 모순적 모럴의 고발이다.
이 소설의 시간적 공간은 대단히 중요하다.
케페시는 1960년대를 거친 60대의 남자이고, 콘수엘라는 그 시대를 거친 가족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시대를 건너 뛴 20대 여자다. 1960년대 미국은 현실과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과 도전이 팽배하던 시기이다. 서구 자본주의에 대항한 로큰롤이 있고 팝아트가 나온다.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는 지금까지 세대 간 갈등으로 남아 있다.
갈등 구조를 보면, 60대 케페시는 “정상적으로 질서가 잡힌 우리의 삶을 무질서하게 흔들어놓은 것이 섹스야.” 47쪽. 라고 말하면서 자유로운 섹스를 추구한다. 구세대를 탈피하여, 즉 늙음을 벗어나 신세대, 즉 젊은 세대로 진입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다.
케페시는 자신의 신분(교수이자 방송인)으로 여러 여학생을 섹스 파트너로 삼을 때 이런 말을 한다. “이런 젊은 여자는 젊은 남자와 성적인 수작을 할 때는 얻을 수 없는 권위를 갖게 돼. 굴복의 쾌락과 더불어 정복의 쾌락을 누리는 거지.” 47쪽. “완전한 관심을 얻고, 다른 어떤 영역에서도 접근할 수 없는 남자에게 절실한 열정의 대상이 되고, 다른 방식으로는 자신에게 열리지 않을 숭배하는 삶에 진입한다면-그것은 권력이야.” 47쪽.
이렇게 말한 케페시지만 콘수엘라에게는 다른 여학생에게서 보았던 것과는 다른 것을 느낀다.
콘수엘라는 쿠바에서 망명한 보수적 가족 구성원에 속해있지만 케페시와 섹스를 한다. 그러나 정신은 구세대에 머물러 있는 모순을 보여준다.
콘수엘라가 떠나고 몇 해가 지난 후, 때는 밀레니엄이 시작한다. 그때 콘수엘라는 유방암 판정을 받고 케페시에게 오는데 섹스는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티브이를 볼 때 마침 2000년이 막 시작되려 하고, 쿠바에서 밀레니엄 축제가 나온다. 축제는, 그것도 카스트로가 지배하던 쿠바에서의 축제는 미국 못지않게 화려하고 정신 사납다. 그 장면을 보자 콘수엘라는 구토를 하며 타락한 쿠바에 배신감을 느낀다. 쿠바까지 먹어치운 밀레니엄이라는 뜻이 다분하다.
그 일로 콘수엘라는 그토록 벗기를 두려워하던 모자(유방암 치료 때문에 머리칼이 빠져 썼던 모자)를 벗어던지며 케페시에게 안긴다. 이것은 후배 조지가 말한 ‘이물질’이 아닌 케페시와의 ‘동물질화 되기’로 볼 수 있다. 이념이니 모럴 같은 것은 한갓 부질없는 인간의 장난이라는 냉소가 흐른다.
시간적 공간에 대한 갈등 하나를 더 보자. 케페시는 이혼을 하면서 8세의 아들을 아내에게 두고 나온다. 이 상처로 아들은 ‘진정한 아버지’로 있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린다.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도 ‘온전한 아버지’의 모습을 지키고자 이미 균열된 가정을 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들은 현재를 살고 있지만 60년대 구세대의 전유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케페시는 아들의 그러한 점에 동요하거나 동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를 찾아 가정 밖으로 나오라고 말한다. 이에 아들은 더욱더 갈등한다. 때문에 아들은 다른 여자와 섹스를 하고 그 일로 아내와 다투고 난 후면 케페시를 찾는다. 케페시의 집 벨을 누르며 “문을 열어주세요. 올라가게 해주세요.”한다. ‘문을 열고’ ‘올라가’고자 하는 이 욕망이야말로 진정한 ‘아버지 되기’에 대한 진통이다. 케페시는 아들의 불륜 행위와 기존 모럴 사이의 치열한 투쟁을 보며 이런 말을 한다. “자유를 어떻게 체제로 바꿀 것인가?”83쪽.
케페시는 8년 전의 콘수엘라를 회상하며, 이미 70세가 되어 있다. 70세 노인의 입장에서 케페시는 말한다. “죽어가는 것과 죽음은 구별해야 해” 50쪽. “아직 늙지 않은 사람들에게 늙는다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다는 뜻이야.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서, 늙는다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해.”50쪽. 이 말은 노년이라고 주눅 들어야 하냐는 질문인 동시에 무엇이, 어떤 제도가 노년을 주눅 들게 했는가에 대한 반문이자 질책이기도 하다. 그에 관한 답으로 여겨지는 대목을 보면, “오직 섹스를 할 때만 인생에서 싫어하는 모든 것과 인생에서 패배했던 모든 것에 순간적으로나마 순수하게 복수할 수 있기 때문이야. 오직 그때에만 가장 깨끗하게 살아 있고 가장 깨끗하게 자기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야. 부패한 건 섹스가 아니야- 섹스 아닌 나머지가 부패한 거야. 섹스는 단순히 마찰과 얕은 재미가 아니야. 섹스는 죽음에 대한 복수이기도 해.”88쪽.
필립 로스가 보는 섹스는 그저 그런 섹스가 아니다. 도덕적 리얼리즘으로 치장한 가짜 섹스에 대한 변증법적 고발이다. 불륜이라는, 금지된 섹스 앞에선 여전히 살아있는 섹스 본능을 통해, 삶과 죽음이 어떤 것이라고 웅변하는 저항이다.
마침내 케페시는 콘수엘라와의 마지막을 회상한다. 새벽 두 시, 전화가 온다. 케페시는 그 전화가 콘수엘라라고 직감한다. 케페시는 병실에 혼자 있을 콘수엘라를 생각하며 뛰쳐나가려 한다. 그때 또 하나의 음성이 가지 말아야 한다고, 가면 망하는 거라고 말한다. 과연 망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셈이다.
제목 ‘죽어가는 짐승’은 W.B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 가는 배에 올라」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나로선 그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정확히 말 할 능력이 없다. 다만, 소설의 내용으로 볼 때 ‘죽어가는 짐승’은 미국이라는 대륙을 의미하고,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모든 것(늙음이든 젊음이든)은 죽어가게끔 되어버린 현 세대를 뜻한다고 본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논의해야 할 많은 것이 있다. 책 한 권이 지닌 무게가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