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산책자>>의 산책

유리벙커 2017. 6. 13. 00:13




로베르트 발저/배수아 옮김, 한겨레출판

 

이 작품도 죽어가는 짐승과 마찬가지로 최근에 번역되었다.

철학아카데미 김진영 교수의 말에 의하면, “번역할 때는 역사성과 문화성을 생각해야 한다. 번역자의 취향에 따라 번역될 수도 있다.”고 한다.

배수아의 번역은 찬탄할 만하다. 로베르트 발저의 언어가 탁월하기도 했겠지만, 그 보석을 보석으로 세공할 수 있었던 것은 번역/번역자의 힘이다.

김진영 교수는 이어 말한다. “그러면 이 작품이 왜 지금 번역되었는가. 이 작품은 낭만주의가 좌절하던 시절, 현대로 옮겨오면서 꿈이 좌절당하고 그러한 것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다. 작가는 슈베르트 적 느낌을 준다. 슈베르트 적이라는 게 무엇인가. 슈베르트의 음악은 몰락으로 가까이 갔다 동경으로 돌아간다. , 몰락 판타지다. 낭만의 아이러니는 한바탕 꿈을 꾸고, 그것을 깬 후에는 꿈이었나, 라고 스스로 그 꿈을 허문다.” 

 

산책자는 여러 산문을 모은 작품집이다. 그 중에 제일 긴 산책이라는 산문은, 발저의 짧은 산문들을 종합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연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다. 묘사는 절묘하고 정교하게 잘 서술되어 있지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찬미로 가득 차 있다. 왜 그럴까. 자연을 신격화 수준으로 끌고 간 이유는 뭔가. 그것은 현실이 안주할만한 데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만큼 현실은 고단하고 피폐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 글 곳곳엔 궁핍한 생활이 나오고, 작가로서 인정받지 못한 애달픔과 분노가 서려있다. “책을 도서시장에 투척하게 되는데, 그 일은 무척 도전적인 사건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강력하고 치명적인 반격을 당할 수도 있다. (중략) 그 서평이란 것이 너무 독한 나머지 책이 그대로 말라 죽어버리고 저자가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307. (번역자의 말에 의하면, 당시 발저는 몰랐지만 같은 시기의 헤르만 헤세와 카프카는 발저의 글을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헤세는 지면을 통해 발저의 글을 읽기를 권했으며, 발저가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발저는 현실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연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면서 세상과 조우하고자 한다. 김진영 교수 말대로 낭만주의적 사고다.

낭만주의에 대해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작가인 평일에 산책을 나간다. 여기서 산책이란 무엇인가. 지금으로 말하면 도시의 산책자는 백수다. 오디세이아처럼 소설의 형식을 띄는 표류기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24시간 동안의 떠돎이고, 구보 씨의 하루도 해방기 한국인의 표류이며, 보들레르도 파리를 떠돌았다. 이들은 근대로 막 들어와 전통시대의 꿈, 다시 말해 낭만시대가 남아있던 시기의 이중적 소외 관계에 있던 인물형들이다.

이들의 시선은 작은 것을 관찰하는 것에 있다. 작은 것(소외)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큰 것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우회적 욕망이다. 주류로부터 소외되었기에 작은 것이 되었고, 그래서 큰 것을 까대고, 작은 것은 칭찬하며 미화시켜 판타지의 공간을 열고, 거기서 자기 주체성을 만든다. 일종의 비틀거림이다. 한 발은 저쪽으로, 다른 한 발은 이쪽으로 걷는 갈지자걸음이다.

당시 발저는 평일에 빈둥빈둥 산책이나 하는 것으로 눈총을 받는다. 발저가 살던 19C에서 20C,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때는 늘 뭔가를 두드리고 망치질하는 지독한 노동에 닳고 닳아 앙상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는”295. 사회다. 근대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이때 근대란 무엇인가. 노동만이 최대 가치가 되고, 노동을 배제한 인간은 잉여로 소외되는 시대다. 다른 하나, 노동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만해서 산책이나 하는 사람은 부유한 그룹에 속한다. 그런데 글을 쓰는 산책자인 는 부자로 오인 받아 과다한 세금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발저는 자신의 산책을 정밀한 과학의 가장자리에 견고하게 가 닿기도 합니다.”343. 라고, 합리적인 이성으로 하는 게 산책이라고 항변한다. 이 말은 라는 인간은 살 자격이 있다고 세상에 웅변해야 살 수 있음을 뜻한다. 흔히, 우리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목에 카드를 걸고 다니는 것을 목격한다. 이것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음을, 왕따 되어 있지 않음을 알리는 표식이다. 나를 어떤 수로든 증명하려는, 어느 면에선 두려움의 이면이다. 왕따는 배척이자 추방이며, 난민이 된다는 뜻이자 보호받지 못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산책을 읽다 보면, 이런 대사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 문장이 나온다. 장문의 대사는 구어체라고 보기엔 어렵고, 그렇다고 서술이라고 못 박을 수도 없다. 굳이 말하면 구어체와 지문이 뒤섞인 문장이라고나 할까. 독자들은 이런 류의 대화체를 접해보지 못해 갸우뚱해진다. 그래서 발저는 일종의 상상을 묘사하는이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산책에는 현실과 상상이 복합적으로 들어있다. 어느 게 현실이고 어느 게 상상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이런 글쓰기는, 현실은 현실이자 상상이라고 말하고 싶은 발저의 의도일 수도 있다. 낭만주의의 글쓰기 형태이자 갈지자걸음의 내면이다.

재봉사 삽화에서도 발저는 근대성을 비판하고 낭만주의를 선호한다. 재봉사는 내 양복을 조각조각잘 맞췄다고 자부하는데 발저는 그렇게 만든 양복에 화를 낸다. 여기서 조각조각은 정확하게 표준화시켜 그 표준 체격에 맞게 만들었다는 뜻이며, 근대성을 의미한다. 양복점이 사라지고 대량 생산된 기성복이 나온 것도, 사람에 옷을 맞추기보다 옷에 사람을 맞춘 것이다. 발저가 원하는 옷은 유기적인 옷이다. 발저는 19C에서 20C로 넘어가는 시기의 사람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계급 아닌 계급의 캐릭터다. 그러므로 발저로서는 이러한 글쓰기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발저는 나는 하나의 내면이 되었으며, 그렇게 내면을 산책했다.”349. 라고 자신을 고백한다. 리얼리티 세계(현실)로 들어갈 능력은 없어 내면의 세계로 갔다는 뜻이다. 이것만 봐도 발저는 시대적 현상이자 시대가 만든 인물이다.

발저의 산책은 오전에 시작해서 시간의 흐름대로 이어진다. 이곳저곳을 들리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장에는 지금까지 지나온 곳과 사람을 알려준다. “진득하게 걷기만 하는 이런 가벼운 산책길에서 내가 거인을 마주치고, 교수님을 뵙는 영광을 누리고, 도중에 책방점원과 은행원과 용무를 해결하고,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젊은 여가수와 전직 배우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재기 넘치는 부인의 집에서 점심식사를 즐기고, 숲을 통과하고, 위험한 편지를 부치며, 음험하고 빈정거리기 좋아하는 재단사와 한판 결전을 치른다고 한다면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산책자는 항상 생각할 여지가 많은 기이한 상상의 산물을 동반하니까요.”344. 발저의 산책은 발저가 원하는 세계로 들어갔음을 말한다. 소외 없는 조응의 세계, 해후의 세계.

 

김진영 교수는 질문한다.

우리는 이 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아나? 꿈꾸다 몰락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리얼리티가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고발 문학에 속한다.”

이어 이런 말도 한다. “프루스트의 무의식은 발저의 무의적 판타지와 같다. 그 무엇도 소외되지 않는 세계, 그것이 무의적 판타지다.”

근대는 무의적 판타지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사랑을 이별시키는 것이 근대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저 엉켜 사는 것이 메트로폴리스다. 말하자면 거대한 이별이다. 그 세계를 다시 복원하고자 하는 게(고대 원시로 가자는 게 아니라) 그 당시의 산책자들이다. 프루스트의 글쓰기가 그렇고, 니체의 세계(그리스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가 그렇다. 그런 면에서 산책은 치열한 투쟁이다. 운명적으로 패배가 예정되어 있으나 끊임없이 산책하는 것. 꿈꾸는 자는 몰락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몸을 던지는 것.

독서를 마치고, 강의를 들으며, 왜 하필 이 시기에 산책자를 읽게 됐는지 수긍이 간다.

 

마지막으로 로베르트 발저의 말을 옮긴다.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 이 감상문은 김진영 교수의 강의와 내 감상을 정리해서 쓴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