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스켑틱』SKEPTIC은 이렇게 말한다

유리벙커 2018. 4. 2. 15:46



 

어떤 경로로 스켑틱을 구입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다, 표지에 적힌 소제목들이 호기심을 자극했기에 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소설을 쓰지만 문학작품보다 인문학이나 철학, 과학에 관심이 많다.

문학이라고 해서 문학적 언술만이 다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제외한 수학이나 물리학, 천체학, 운동 경기 등에 사용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싶은 게 욕심이다. 적어도 전문 용어에 대한 기초 지식 정도는 알고 써야 하니 그에 관한 책을 읽은 건 당연하다. 문제는 전문적인 지식들과 마주하면 소화하기 힘들 때가 있다는 거다. 전문지식을 몽땅 흡수하진 못해도 작은 깨달음 정도는 얻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여긴다


    

스켑틱11, 12호에는 평소 내가 궁금해 하던 이야기들이 소제목을 달고 손짓한다. 제목들을 살펴보면, <산성 식품이 몸에 나쁘다고?> <사라진 초고대문명이 존재했다고?> <과학에 창조론의 자리는 있는가> <왜 과학자는 종교에 침묵하는가> <UFO가 출몰하는 51구역> <오리건 집단 환각 사건?> <여성 이름의 허리케인이 더 치명적이다?> <우주가 무한히 존재한다고?> <왜 인공지능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vs, 인공지능은 위협이 될 수 없다> <내부고발은 왜 작동하지 않는가> 등이 있다.

제목만 봐도 이 책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질문에 대한 답이 꽤나 궁금하다.

우선 스켑틱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면, 회의론자라는 뜻이다.

회의라니, 의심을 품는 것 아닌가? 우리가 흔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던 단어 말이다. 그래서 더더욱 끌린다. 나 역시 기존의 사고에 회의를 잘 품는 타입이라 어쩐지 동지를 만나는 기분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스켑틱은 이렇다. “회의주의는 이성을 이용하여 모든 종류의 사상을 검증하는 것이다” “회의주의는 어떤 입장이나 태도가 아니라 방법론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회의주의는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이론을 수립하고, 자연 현상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을 검증하는 과학적 회의주의” “과학의 영역에서 사실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잠정적인 것이며 시험에 열려 있다” “회의주의자는 민감한 주제에 골치 아픈 질문을 던지고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생각했던 회의주의보다 깊고 까다롭다. 그럴 듯한 레토릭으로 사람을 홀리는 게 아니라 과학적이고 분석적으로 접근한다는 얘기다. 좋다, 그래보자.

    

 

우선 한국인 저자 중 장대익(서울대 교수)이 쓴 <한국 창조론자들의 반지성에 대하여>를 보자. 장 교수는 도입부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서울시를 봉헌하고” “사탄의 무리가 판치지 못하게하고 좌파 빨갱이를 잡아들이자하고 미국인보다 더 미국을 신뢰하고” “어디를 가든 그 땅을 신의 영토가 되게 해달하고 기도부터 하고” “종합해보면 한국 개신교인의 지적 특성과 삶의 태도는 배타주의와 성장주의라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한국의 주류 개신교의 편향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고 질문을 던진다. 그는 한국의 주류 개신교는 근본주의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때 전달된 배타주의라는 밈meme이 그 이후로도 가정과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수직적, 수평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생존 자체가 목표였던 그 시절, 한국의 주류 개신교가 채택한 가치도 성장지상주의였다” “배타주의는 성장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배타적 성장주의 밈은 모든 것(과학을 포함)을 수단화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기복신앙으로 인생에서 물질적, 정신적 보상을 받은 사람들, 즉 기도로 성공을 경함한 우리부모 세대의 경우에 배타적 성장주의의 밈은 피하기 힘든 유혹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밈이 자신의 배타성을 과학적 사실들의 영역에까지 확장해왔다는 점이다

여기서 장 교수는 한국 개신교를 대하는 세 가지 입장을 말한다. 하나는 양자택일적 입장, 다른 하나는 분리주의적 입장, 또 하나는 조화론적 입장이다.

양자택일적 입장에서 보면, “이 입장은 과학과 종교가 전쟁 중이고, 따라서 상대방은 제거의 대상임을 주장하기 때문에 일종의 제거론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엔 기독교인들 중 진화론을 반대하는 입장과 받아들이는 입장이 있다는 얘기와 다윈의 이론이 나온다.

그 다음, 분리주의적 입장을 보면, “분리론은 과학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고 이 두 영역 간에는 아무런 겹침이 없다는 견해이다그에 관한 입장의 하나로 장 교수는, “과학은 사실만을 다루는 반면 종교는 인간 사고와 행위에 관한 평가만을 다룬다고 말했던 아인슈타인이나, 과학은 어떻게를 묻지만 종교는 를 묻는다 라고 믿는 현대의 많은 신학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장 교수는 언어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인용한다. “과학은 자연 현상에 대한 제한된 범위의 질문을 던지며 주로 예측과 조건을 규정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데 비해, 종교 언어의 주요 기능은 삶에 대한 가치와 태도들을 이끌어내며 특정한 도덕 원칙을 따르도록 격려하는 것이다장 교수는 진화생물학계의 거장 스티븐 제이 굴드의 분리론도 거론한다. “우주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사실)와 왜 우주가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가(이론)” 다른 한편, 적지 않은 지식인들의 말도 인용한다. “종교와 과학은 엄연히 다른데 왜 기독교는 과학이 되려고 할까?” 그런데 장 교수는 분리론의 문제점을 말하며 이런 말도 한다. “과학과 종교가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쯤 되니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마지막 관점인 조화론으로 들어가면 가닥이 잡히려나.

조화론은 제거론도 분리론도 아닌 제3의 입장이며 두 가지 입장에 근거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과학과 종교가 동일한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내 입장에서 보는 조화론은 이현령비현령이 될 공산이 크다.

나는 분리론을 지지한다. 누가 어떤 이론을 제시하던 종교는 과학이 될 수 없고, 과학 역시 종교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낭만적인 생각인지 몰라도, 지친 과학을 어루만지는 게 종교이고, 종교의 일방통행을 쌍방통행으로 이끌어주는 게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는 종교대로, 과학은 과학대로,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 균형 있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이와는 살짝 관계가 있을까 말까한 이야기 중에 <왜 과학자는 종교에 침묵하는가>;(마시오 피글리오치) 가 있다. 내가 항상 묻고 싶었던 말이다. 그 챕터에는 이런 말들이 나온다.

과학이 신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결정하려면 우리가 이라는 용어를 어떤 의미로 쓰는지부터 명확히 해 둘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적 신은 물리적 세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은 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인간의 개념” “그런 신을 이해할 방법이 없다” “인간의 어떤 가치도 반영하지 않는 신을 갖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런 신은 심리적으로 쓸모가 없다” “인간이 신을 믿는 주된 이유는 세상의 의미에 대해 위안을 얻기 위해서” “형이상학적 신은 그런 위안을 전혀 줄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아무 기능을 하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불완전한 신을 상정하는 이유는 형이상학적 신을 내세우는 것과 심리적으로 같은 이유다. 명백히 최상의 세계가 아닌 세상의, 악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신에 대한 믿음에는 신앙이 요구된다” “신은 대체 어디서 왔는가?” “기독교 신학자들은 우리가 한결같은 도덕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신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결론을 말하면, “과학자들이 종교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현상은돈 때문이라고 한다. “까놓고 말해 과학은 늘 부유한 권력자들에게 휘둘리는 사치스런 활동이었다. 갈릴레오는 연구를 후원해준 메디치 가문에 감사를 표시하고 새로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그들의 이름을 붙여야 했다. 우리 또한 국립과학재단, 국립보건원, 에너지국의 후원에 깊은 감사를 보내곤 한다.”

우리나라라고 다를까. 대기업 후원자가 특정 종교를 가졌다면, 그 앞에서 신이나 종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말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자신의 종교관과는 다른 교회나 사찰을 열심히 찾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터다.

이에 저자 마시오 피글리오치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챕터에서, “비합리적이고 초자연적인 믿음은 대부분 무지(그리고 근절하기 훨씬 어려운 인간의 몇 가지 생래적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교육을 주장한다.

글쎄다. 어떤 교육을 어떻게 해야 종교를, 생래적 두려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을지.

    

 

이 외에도 스켑틱에는 내가 그렇게도 궁금해 하던 UFO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저자 도널드 프로세로는 현실적 근거를 충분히 제시하지만 나로선 그래도 글쎄..... 워낙 UFO에 관한 일화가 많았고, 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확고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네바다 주에 있는 51구역으로 들어가 보자. 51구역은 알다시피 민간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근처에만 가도 길 밑에 설치된 센서가 작동하고, 고성능 쌍안경으로 감시하는 보안요원들이 있다고 한다.

미국은, UFO는 할리우드가 만든 판타지이며 미군의 비밀 첩보기일 뿐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기지의 고위 보안관계자들 중 일부는 바깥 세상에 추측과 판타지가 퍼져나가는 것을 은근히 반기기도 했다. 어쨌든 외계인과 UFO 스토리는 비밀의 스텔스기 및 첩보기의 진실과 냉전시대의 국가안보 이슈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는 효과적인 속임수였다

저자는 어째서 이러한 현상이 되었는지 근거를 제시한다.

“1950~1970년대에는 40,000피트(12킬로미터)보다 높은 고도로비행할 수 있는 민간 항공기는 없었으며(지금도 그렇다)” “U-12기의 시험비행이 시작되자마자 민간조종사들이 UFO를 목격했다는 보고가 대폭 늘어났다” “이들 항공기는 일급비밀이었을 뿐만 아니라, 80,000~90,000피트(24~27킬로미터) 고도에서 시속 2,000마일(3,200킬로미터)의 속도(그 어떤 민간기보다 높고 빠르게)로 날아다녔다” “옥스카트 항공기는 연료를 많이 싣기 위해 넓은 원반 형태로 제조되었는데, 이러한 형태의 비행기는 전에 볼 수 없었던 형상이었다. 석양 무렵 네바다 상공을 비행하던 민간조종사들은 시속 2,000마일이 넘는 속도로 휘잉 하고 날아가는 옥스카트의 밑바닥을 올려다보곤 했다. 총알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비행체의 티타늄 동체가 햇빛에 반사된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누구나 UFO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항공기에 대한 착각만으로는 UFO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기엔 미흡하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이런 말도 한다. “51구역에 있다는 UFO나 외계인의 시신에 대한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최근에 비밀에서 해제된 엄청난 분량의 CIA문서에서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51구역에서 근무하다가 은퇴하고 비밀엄수 서약에서 해제된 사람들의 증언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UFO의 존재를 궁금해 한다. 저자가 말한 사실외에도 각국에서 발견된 미확인 비행 물체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믿고 안 믿는 것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로선 미진함을 떨치기 어렵다.

    

 

이처럼 스켑틱은 어떤 답을 주기보다 근거를 제시하며 끊임없이 회의하게 한다. 간혹 답을 주는 이야기도 있긴 하나, 그것도 의심을 깨끗이 종식시키기엔 미흡하다.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또 다른 배움의 자세를 제공하는 게 스켑틱의 목적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