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무릎을 꿇는 것의 의미

유리벙커 2018. 10. 31. 14:19

어제 오늘 IT업계 양진호 회장의 폭행 문제가 시끄럽다.

폭행 영상을 보면서 가슴이 벌렁거린다.

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대에나 있었던 상전과 종의 관계가 지금도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준다.

왜 이러나.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의미다.

단순히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격과 내 전부를 상대에게 넘긴다는 뜻이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에 무릎을 꿇은 일은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아픔이자 치욕이다. 조선을, 조선의 백성을, 청에게 넘긴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에게 말한다.

어떤 잘못을 했어도 무릎을 꿇는 짓은 하면 안 된다고.

무릎을 꿇을 대상은 세상 천지에 부모나 장인 장모 외엔 없다고.

사회적 관계에서 무릎을 꿇는 것과 부모에게 무릎을 꿇는 의미는 다르다.

부모에게 잘못을 했으면 무릎을 꿇고 용서와 이해를 구하는 게 당연하다.

부모에 대한 존중의 최대치 행위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에서 무릎을 꿇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스스로 자신을 말살하는 행위다.

혹자는 말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보다 더한 일도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무릎을 꿇는 짓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몸으로만 하는 행위가 아니다.

어떤 이는 직장생활을 연장하려고 오너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개인의 일로 미루기에도, 해결하기에도 버거운 일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직장생활을 관둬야 하나.

나는 아들에게 말한다.

저항해야 한다고. 잘못이 있으면 사과를 하고, 부당하다고 여기면 시민단체에 도움을 청하고 법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뺨을 때리고 맞는 행위 역시 인격말살이다.

다른 폭행과 비교하면 뺨 한 대 정도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뺨을 때리는 일은 단순히 화가 나서 하는 짓이 아니라 상대를 비하하는, 너라는 인간은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내가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았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누군 정의를 몰라서 그러나, 저항할 줄 몰라서 당하나, 그렇게 말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정의나 저항은 혁명가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촛불혁명이라 부른다.

전직 개발자가 폭행을 당하는 그 현장에서 모니터만 보는, 한때는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나눠 마신 사이의 사람들 중에도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회사 내에선 졸지에 방관자로 전락한다. 방관자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야말로 또 다른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 중 어느 한 사람이 나서서 말리기라도 했다면, 용기를 내주었더라면, 또 다른 사람이 같이 나서서 말릴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광화문에서 시작한 촛불이 전국으로 번졌던 일이 있지 않은가.

저항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폭력의 힘은 커진다.

저항이 거대한 것은 아니다. 말 한 마디, 작은 행동 하나도 저항이다. 촛불을 들었던 것처럼.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미 자본에 잠식된 시스템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인격을 가진,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그 권리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면 무릎을 꿇을 게 아니라 저항을 택해야 한다.

양 회장인지 양아치인지 모른 인간에게 소중한 나를 무릎 꿇을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극명한 치부를 본 오늘,

나는 마음이 많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