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아침의 피아노』를 기억하며

유리벙커 2018. 11. 21. 15:46

철학자 김진영.

그는 20188월에 소천 했다. 책과 강의에 열중하던 중 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일 년 남짓 암을 이기려 혹은 친해지려 애썼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을 떴다.

그가 남긴 것은 빛나는 어록과 책 한 권.

나는 그의 강의를 잊지 못한다.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강의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세상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나의 정체성을 심문했다.

그가 떠나기 전 딱 두 번을 만났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한 자리였다. 그는 파리해져 있었으나 우리에게 강연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 우리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의 목소리와 강연을 소중하게 받았다. 그 다음 만남에서 그는 강연조차 하지 못했고 헤어질 때 우리는 그를 안았다. 너무도 가벼운 몸체, 마지막이 된 이별.

 

 

그가 남긴 아침의 피아노를 연다.

그의 아들이 하는 말에 의하면, 아침이면 아들은 피아노를 치고 아빠는 창가에 서서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이렇게 태어난 게 아침의 피아노.

아침의 피아노에는 못다 한 사랑이 절절하게 나온다. 사랑을 받기만 했지 줄줄 몰랐다는 자책과 함께, 앞으로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맘껏 사랑을 주고 싶다는 열망이 주를 이룬다.


 

사랑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건 내부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외부로의 표현이다. 사랑의 마음, 그건 사랑의 행동과 동의어다. 223.

 

 

죽음은 많은 것을 가르친다. 그의 죽음은 사랑을 가르친다. 행동과 동행하지 않은 사랑. 그가 행동의 사랑과 동행했더라도 그는 사랑에 미련을 남겼을 터다. 사랑이란 주어도 모자라고 받아도 모자란 결핍의 인자를 가진 탓이다.

 

 

그는 고상한 사람이다. 소리 내어 웃는 법이 없고, 과도한 언성과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산책하기를 즐겨하며, 소리는 없으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들에 애정이 깊다. 집 근처 공원을 걷고 차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무연한 눈으로 바라본다. 세우와 구름과 바람, 잠시 스쳐가는 이미지들, 롤랑 바르트와 벤야민과 프루스트를 좋아한다. 아침의 피아노는 그가 자주 언급했던 바르트의 애도 일기와 꼭 닮아 있다.

 

 

애도 일기는 슬픔의 셀러브레이션이다. 이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하다. 그건 무력한 상실감과 우울의 고통이 아니다. 그건 사랑을 잃고 비로소 나는 귀중한 주체가 되었다는 사랑과 존재의 역설이다. 186

  

  

아침의 피아노에는 상실감과 우울보다는 사랑을 짚어보는/찾아내려는 그의 자아로 충만하다. 니체도 벤야민도 프루스트도 종착지는 사랑이다. , 혹은 그들의 사랑은 각각의 옷을 입고 각각의 언술로 사랑을 말한다. 슬픔의 원천도 사랑이요, 비판의 원천도 알고 보면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무한 변신의 옷들.

솔직히 나는 그의 강의에서 사랑을 읽지 못했다. 그가 남긴 책을 읽고서야 그의 멜랑콜리가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의 강의는 열정으로 가득했으나 그가 가진 열정은 알지 못했다. 그도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책으로 건네받는다.

 

생은 불 꺼진 적 없는 아궁이. 나는 그 위에 걸린 무쇠솥이다. 그 솥 안에서는 무엇이 그토록 끓고 있었을까. 또 지금은 무엇이 끓고 있을까. 196

  

  

그 사람을 안다라는 말은 어쩌면 오버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자신조차 내가 누구인지, 어떤 것을 열망하는지 모를 때가 허다하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른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상황들. 그때 의 자아는 무엇인지 모를 것들이 끓고 있는 무쇠솥이다. 나는 그것들을 소설로 엮고, 그는 그것들을 책과 강의에서 말했을 터다. 그렇다고 그게 전부인 ’가 아니라는 것 또한 그도 나도 알고 있다.

그가 그립다

그의 미소와 열정이 지금도 내 기억엔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에게서 배운 슬픔들을, 나는 소설로 써 이번에 출간한다. 그는 없지만 내 소설로 나올 것이다. 그가 있었더라면 기뻐했을 소설.

이렇게라도 나는 그에게 나의 안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