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할 땐 노래를 들어요
헬스를 할 때마다 노래를 듣는다.
줄이 달린 이어폰을 사용하다 무선 이어폰으로 바꿨다.
내 딴엔 조금 값이 나간다는 무선 이어폰이다.
그 이어폰이 갑자기 고장이 났다.
한 쪽만 들리는가 싶더니 페어링 자체가 안 된다.
당장 운동하러 가야하는데 노래 없이 운동을 한다는 생각만으로 금단 현상이 생긴다.
집안을 뒤져 줄이 달린 이어폰을 찾는다.
요즘엔 노래 듣는 재미로 운동을 한다고 말 할 정도다.
한가하게 집에서 음을 즐길 여유가 없기도 하거니와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헬스를 한다는 건 사실 지루하고 힘들다.
그럴 때 동무가 되어 주는 게 음악이다.
요즘 운동을 하며 노래 듣는 재미에 푹 빠진 이유가 있다.
보통 때는 느끼지 못했던 뮤지션들의 연주와 음성/음색이
아주 세밀하게, 낱낱이, 귀에 박힌다.
어느 쪽 마이크를 이용해 음을 내보내며,
어떤 방식으로 연주를 하는지, 그런 것을 느낄 때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들의 공통점은 보여주고 들려주려 하는 게 아니라, 즐기며 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나’를 떠나보내는 행위.
그럴 때 ‘나’는 없고 즐기는 ‘나’가 또 다른 세계를 만든다.
예술의 공통점이다.
다른 하나는, 음에 빠지다 보면 홋홋해진다는 점이다.
일상의 잡다한 근심이나 갈등은 까맣게 잊고,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르게 호흡한다.
내가 쓴 소설에서 미흡한 점도 생각나고 고칠 부분도 떠오른다.
요즘 내가 듣는 노래 중 몇은 회상의 자리를 내어준다.
디퍼플이 그렇고, 산타나가 그렇다.
그 음과 연주는 내 젊은 시절을 소환한다.
슬프고 안타깝고 분노하던 나는, 어째보지 못하던 나는, 그 음들과 함께 했다.
짙은 담배연기와 생맥주, 고막을 찢을 듯이 쏟아져 나오던 음들, 그 음들을 가득 채웠던 술집.
그때의 음과 장소는 나뿐 아니라 당시의 젊은이들에겐 도피처이자 안식처이기도 했다.
새롭게 마음을 사로잡은 노래도 있다.
Eva Cassidy의 Fields of Gold.
유니지의 when we were young
마마무의 리메이크 곡 바모처럼 살았군요
이소라의 Love of My Life와 Rainy days and mondays
그리고 퀸의 노래들.
이 노래들은 과거의 나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해준다.
이런 음과 방식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내게 노래를 듣는다는 건
다른 세계를 느끼고 상상하는 내러티브이다.
그 세계를 열어준 뮤지션들에게 고마움, 또 고마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