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대머리 여가수

유리벙커 2019. 9. 15. 17:01



루마니아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의 이 작품은 연극대본으로 세 편이 실려 있다.

<대머리 여가수> < 수업> <의자>.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부조리극이다. 이오네스코는 우리가 철석같이 믿는 언어를 통해, 언어는 믿을 수 있나? 라는 문제를 제시한다. 등장인물들은 열심히 말을 하지만 소통이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이 한 말을 상대가 그대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 언어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묻기도 한다.

<대머리 여가수>의 경우, 등장인물은 스미스와 스미스 부인, 마틴과 마틴 부인, 메리라는 하녀, 소방대장이 나온다.

스미스는 부인이 저녁 식사 얘기며 자잘한 얘기를 하는 동안 신문만 읽으며 혀를 찬다. 그러던 중 마틴 내외가 방문한다. 그들 역시 스미스 부부와 마찬가지다. 넷의 대화는 하나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스미스 부인이 문을 열지만 밖엔 아무도 없다. 그 일로 네 사람의 의견은 갈린다. 스미스 부인은 초인종이 울리면 밖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하고, 마틴은 초인종이 울린다고 밖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

네 번째 초인종이 울리자 스미스가 나간다. 문 앞엔 소방대장이 서 있다. 소방대장은 장난삼아 초인종을 울리고 숨었다고 말한다. 이오네스코는 소방대장을 통해 사실은 사실이기도 하고, 비사실이기도 하다는, 사실과 비사실의 경계를 제시한다. , 우리가 믿고 있는 사실이라는 영역은, 믿을 수도 있지만 믿을 수 없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것에 제일 영향을 주는 것이 언어라는 도구다. 소방대장이 나가면서 말한 그런데 대머리 여가수는?” 라는 대사야말로 사실/언어를 의심해보라는 메시지다. 왜냐하면, 소방대장의 그 말은 지금까지 나누었던 대화와는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엉뚱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수업>의 경우, 여학생과 교수와의 수업 장면을 통해 언어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여학생은 종합 박사를 받고자 교수를 찾는다. 교수는 그런 여학생에게 프랑스의 수도가 어디냐고 묻거나, 사계절을 묻는다. 여학생은 어렵사리 겨우 맞힌다. 교수는 하나 더하기 하나는 무엇이냐고 묻고, 여학생은 답한다. 교수는 빼기도 그런 식으로 묻는다. 여학생은 빼기를 묻지만 더하기로 답한다. 언어의 부조리함이다. 그렇게 수업은 진행되는데, 여학생은 자꾸 이가 아프다고 말하고, 교수는 이를 무시한 채 세계의 언어를 나열한다. 여학생이 계속 이가 아프다고 하자 교수는 하녀를 시켜 식칼을 가져오라고 한다. 교수는 식칼로 여학생을 죽이고, 여학생은 가랑이를 벌린 채 신음하며 죽는다. (여기서, 식칼은 성기를 의미하고, 신음은 오르가슴을 뜻한다) 하녀는 교수가 죽인 여학생이 벌써 39명이라며 여학생의 시신을 수습한다. 다시 초인종이 울리고 새 여학생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종합 박사라는 구체성을 결여한 소재로, 다양한 언어적 실험을 한다. 프랑스의 수도가 파리라는 걸 알면서도 어렵사리 알게 하는 걸로, 우리가 믿고 있는 사실적 언어조차 뒤집어봐야 한다는 역설이 담겨있다. 사건의 결말을 그로테스크하게 끌면서, 언어와 사실의 관계도 이처럼 그로테스크 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진다.


<의자>에는 95, 94세의 노부부가 나온다. 그 부부는 고독하게 지낸다. 둘이 나누는 대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남자가 말하면 여자가 그대로 반복하는 게 많이 나온다.

그들에게 방문객이 찾아온다. 방문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방문객의 수는 점차 늘고, 의자는 방문객의 수만큼 늘어난다. 그러나 방문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역설적이게도 부부의 고독을 보여준다. 그러던 중 황제가 방문객으로 등장한다. 이 역시 눈에 보이지 않는다. 부부는 황제의 출현에 감동하고, 남자 노인은 황제에게 자신이 억울하게 살아왔던 얘기를 늘어놓는다. 얘기 중에 변사가 올 것이라는 말도 한다. 조금 후에 변사가 등장한다. 노부부는 변사가 정말 사람이에요라며 실제 인물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은 그동안 나왔던 방문객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변사는 무표정하며 엄숙한 자세를 취한다. 노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객을 향해 변사에게 사인을 받으라고 한다. 노부부는 변사의 출현에 감사를 표하며 자살한다.

이 작품에서 변사는 노부부의 감성과 일생을 축약하여 보여주는 해설사이자 죽음의 사신이다. 이오네스코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문객들을 만들고, 눈에 보이는 노부부를 만들어, 픽션과 논픽션을 뒤섞는다. 죽음 또한 픽션이자 논픽션이라는 것을, 변사라는 죽음의 장치로 말한다. 노부부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방문객이 찾아온 것은 픽션이고, “정말 사람이에요라고 말한 죽음은 픽션에 속한다. , 죽음이 다가오지 않을 때는 픽션이요, 죽음이 다가왔을 땐 논픽션이 된다.

이처럼 인간은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존재이며, 사는 것 자체가 혼돈이다. 그 혼돈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오네스코는 말하자고 한다.

 

 

번역자(오세곤)가 말하는 부조리극은 무엇인지 해설 일부를 발췌 정리해본다.

 

현대 연극의 주요 경향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부조리극의 탄생은 1950년 이오네스크의 대머리 여가수. 사르트르와 카뮈의 철학 용어였던 부조리가 정식으로 연극 용어가 되는 순간이다. 부조리극의 특성은 인간들의 막연하고 근거 없는 집단적 믿음(조리) 앞에 그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 적나라한 현실(부조리)을 제시하는 것이다.

서구권에서는 가시적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몽환과 상상, 무의식의 세계로까지 현실의 영역을 확장해가며, 근본적으로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절대적이고 안정된 질서가 아니라 혼돈과 부조리임을 지적하는 연극이 출현했던 반면, 동구권에서는 가시적 차원의 사회 현실을 강력히 고발하는 연극이 나타났다. 둘 다 사회 구성원들이 여간해서는 믿지 않으려 하는 현실의 모습 내지 삶의 조건을 집요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연극이 사실임 직한 비사실을 추구하는 데 반해, 부조리극은 비사실 직하지만 엄연한 사실의 제시를 목적으로 한다.

부조리극은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이나 모습을 제시할 뿐이지 그것에 대해 특정한 반응을 유도하지도 않고, 어떤 대책을 암시하거나 충고하지도 않는다.

부조리극에는 눈을 돌리는 사람 앞에 집요하게 거울을 들이대어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을 직시하도록 함으로써 어떻게든 해결책 내지는 행동 방침을 마련하도록 만들겠다.’는 강한 의도가 담겨 있다.

이오네스코가 집착했던 문제는 인간 언어의 부조리함이다. 즉 인간은 자신들의 언어를 지극히 합리적이라 믿으며 문화의 축적과 의사소통의 도구로 삼지만, 실제로 그것은 대단히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해서 인간의 언어생활은 원초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한 오해의 연속일 뿐이며, 거기서 비롯된 언어의 횡포가 인간들을 핍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오네스코가 언어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부조리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죽음이의 문제다.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정말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죽음을 삶의 끝이라할 때 바로 이 끝이라는 것 역시 의문스럽다. 극락이니 천국이니 저승이니 하는 사후에 대한 공간적 표현이나 영생이니 윤회니 하는 시간적 표현 역시 모두 을 인정할 수 없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