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레이제와 세나에서 델마와 루이스로

유리벙커 2020. 2. 27. 19:17

 

한참 전이다. 그러니까 십대 때 얘기다.

지금도 편식을 하는 편이지만 그때도 그랬다. 음식만이 아니라 사람 사귀는 것도 편식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첨으로 그 친구를 알게 됐다. 공부도 그저 그런, 지적 사고도 그저 그런, 자그마한 친구. 그 친구와 짝이 되었을 때 솔직히 재수 없다고 여겼다.

시험 시간이었다. 나는 그 친구가 행여 내 답을 커닝할까 책상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그 친구는 그런 나를 재수 없는 년쯤으로 보며, 가방을 치우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무시하며 시험 내내 가방을 치우지 않았다.

그 친구와의 첫 만남은 이렇듯 또렷한데 친해지게 된 계기나 시점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게 그 친구와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다시 같은 반 같은 짝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키가 작아 맨 앞줄이나 그 다음 줄에 앉기 일쑤였다. 수업 내내 우리는 선생님의 침 튀김 세례를 전신에 맞아가며 공부해야 했다. 공부뿐인가. 물리 시간엔 그 지겹디 지겨운 수업 내용에 집중하지 못해 쪽지질을 해댔다. “, 저 하악돌출 슬리퍼 좀 봐. 꼬질꼬질, 토 나온다.” “나두 그래. 아침에 먹은 밥이 넘어오려고 해.” “세수는 하고 왔을까? 얼굴색도 슬리퍼 색이다.” “인기가 있어야 슬리퍼를 바꾸지. 인기 있는 선생님들 봐라. 뻑 간 애들이 슬리퍼 사다 책상 밑에 놓는다. 새 슬리퍼가 넘쳐 골라 신을 판이란다.”

나와 그 친구는 그런 쪽지질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쪽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쪽지질만 했나. 편지질도 꽤나 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었으면서도 하교 길도 같이 했다. 무슨 얘깃거리가 그리 많은지 우리는 가는 내내 이야기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각각 집에 가서는 또 편지를 써댔다. 그리곤 우체통에 넣거나 다음 날 교실에 와서 슬그머니 주기도 했다. 완전 열애 수준이었다

 

어느 날 친구 권유로 동창 카페에 들어갔다. 동창들은 내가 들어왔다며 반갑다고, 기억난다고, 누구누구 아느냐고 사진을 올리는데 나로선 처음 보는 아줌마일 뿐이었다. 참으로 민망했다. 학교 때나 지금이나 편식의 대가였으니 당연했다. 내가 잘 모르겠다고,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하자, 겨우 기억의 한편에 있던 동창이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쉬는 시간이면 S를 보려고 옆 반으로 달려갔잖니. S하고만 놀았어.” 내가 그랬나?

그 친구와 나는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그 안에 몇 번인가는 말다툼을 했고, 연락을 끊은 적도 있다. 물론 한 달이나 두세 달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기간을 양으로 치면 불안과 울분의 몇 십 년이었다.

 

굽이굽이 고비를 넘기고 한참이나 나이를 먹은 지금, 그 친구와 나는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산다. 그 친구는 이런저런 일로 바쁘고, 나는 글을 쓰느라 바쁘다. 그 와중에 잠시 틈새 시간이 나면 우리는 번개로 만난다. 만나기 전날 밤이나 혹은 당일 한두 시간 전에 연락을 한다. 번개라기보다 초초번개에 해당되는데, 나는 그 초초번개가 참 재미있다. 뭔가 드라마틱하고, 뭔가 실험적이며, 뭔가 초현실적이며, 뭔가 집중적이며, 뭔가 스릴 같아서 좋다.

얼마 전 그 친구와 제주도엘 갔다. 렌트카로 제주를 돌 때 그 친구는 말한다. “, 중딩 때 말이야, 닉네임을 레이제라고 했잖니. 난 세나로 했고.” 그 대목에서 우리는 깔깔 웃는다. 말만 들어도 유치라고 낯 뜨겁고 오글거린다. 그 친구는 덧붙인다. “지금 고백할게. 그때 난 니가 레이제라고 지은 게 쌤통 났댔어. 내가 레이스를 좋아하잖니. 레이제가 어쩐지 블링블링 레이스와 통하는 것 같았거든.” 나는 말한다. “그랬었니? 우리, 그때 소녀였댔구나. 진짜 소녀.” 그 친구는 또 말한다. “그 레이제와 세나가 지금은 델마와 루이스가 되어 있어.” 나는 와하 소리 지른다. “~ 멋져부러. 우리 델마와 루이스로 제주를 평정하자.” 차안엔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가난했지만 웃음이 많았던 시절. 진정, 소녀였던 소녀들. 현모양처가 여자의 최고 덕목으로 교육받던 시절. 시집살이를 꾹꾹 견뎌내며 살아내던 시절. 지금은 구태의연한 가치관을 벗어던지고 델마와 루이스로 살아가려 애를 쓰고 있는 시기. 나와 그 친구는 델마와 루이스로로 산다고 살지만, 그 시절의 소녀는 여전히 살아있다. 돌이켜보면 어설프고 비틀거리고 아프고 괴로웠지만, 그런 효모가 있었기에 지금을 이겨내고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