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어깨로 운다>>
이재무 시인의 시는 단단하며 부드럽다. 서정성을 흠뻑 뿌리는가 하면,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단호하게 대한다.
그가 말/언어에 대해 쓴 시 두 편은, 말의 소비가 얼마나 허무한지, 때론 주변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지, 혹은 글로 말을 하는 사람들(자신을 포함)이 얼마나 말을 골라서 해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지퍼에 대하여>
지퍼가 열렸다 해서 몸의 속이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지퍼는 열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닫혀 있을 때 더 지퍼답다. 지퍼가 자주 열리는 사람은 몸이 성치 않거나 외로운 사람이다. 입은 몸의 지퍼다.
<입>
입은 말의 항문이다. 배설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괄약근을 조여라.
====
위의 시 두 편이 래디컬했다면, 다음의 시는 우회적이다.
<귀>
귀는 주장하지 않는다 귀는 우리 몸의 가장 겸손한 기관 귀는 거절을 모른다 차별이 없다 분별이 없다 눈과 코와 입이 저마다 신체의 욕망과 감정을 경쟁하듯 내색하고 드러낼 때 귀는 몸 외곽 외따로 다소곳하게 서서 바깥의 소리만을 경청하며 운반하느라 여념이 없다 입구가 출구이고 출구가 입구인 눈코 입과는 달리 입구의 운명만이 허용된 귀 오늘도 어제처럼 고저장단의 소리를 소리 없이 실어 나르고 있다
====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도 인간이 지닌 슬픔의 일종이다.
흔히, 슬픔을 연약한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인데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깊은 시원과 맞닿아 있다.
책 제목에 빗댄 「너무 큰 슬픔」 이라는 시는 슬픔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무엇인지를 기록한다.
<너무 큰 슬픔>
눈물은 때로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슬픔은 누구도 속일 수 없다. 너무 큰 슬픔은 울지 않는다. 눈물은 눈과 입으로 울지만 슬픔은 어깨로 운다. 어깨는 슬픔의 제방. 슬픔으로 어깨가 무너지던 사람을 본 적이 있다.
====
이와 맥을 같이 하는 시가 있다.
<내 안의 적들>이라는 시는, 우화를 통해 모든 불합리의 근원을 찾는다.
<내 안의 적들>
고양이의 폭정에 시달려온 쥐들이 모여
숙의를 거듭한 끝에
다른 고양이를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하였다
다음 날부터 쥐들은 다시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보통의 인간은 엇비슷하던 이웃이
자신보다 잘나갈 때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노예들은 주인을 경원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그들을 참기 힘들게 하는 것은
천출 벗은 자가 무리 앞에 우뚝 서 있을 때다
이때 이들은 모욕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열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만 마리 누 떼가
한 마리 사자를 당해낼 수 없듯이
수백수천만 노예가 주인 몇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역사는 기록에 대한 수사를 발전시켜왔을 뿐이다
진보 유전자를 지니고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멍에이며 스스로 불행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민중론자들 중에는 자신들보다 열등한 자들을
은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하려는
못된 버릇과 심리를 지닌 이들도 있다
내 안의 부당한 적들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책 속에서나
반짝일 뿐 끝내 맨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
위의 시를 읽으며 나는 소수의 나치스들과 다수의 유대인이 떠오른다. 오늘 날 우리의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다툼을 본다. 뿐인가? 조국이 겪은 그 무지막지한 폭압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가? 라는 질문이 내내 나를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