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스토리 오브 스토리

유리벙커 2021. 1. 9. 19:54

 

책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은 얼마나 될까. 거기다 유익한 정보까지 담겨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은 책이겠는가.

간단히 말하면, 스토리 오브 스토리는 문학작품을 안내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책 내용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박상준이 강조하는 것은 문학작품의 시선이다. 책에 서술된 작가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는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 작가와 작품을 같이 보아야 하는지 아닌지, 그에 따른 시각과 솔직한 심정이 균형 있게 전개된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국적이 없으며,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며, “세련되게 잘 만들어진 문화상품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백 배 만 배 공감한다. 내가 하루키를 읽으며 의문이 들었던 점은,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왜 그토록 억대의 선인세를 지불하며 하루키를 잡으려 했나 했던 의문이 풀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4쪽에 보면, “요컨대 그의 소설은 문장을 다듬듯이 정신 또한 다듬은 성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문학이 정신을 다듬는 자리란 고유의 역사 전통과 문화적 특성을 갖춘 구체적인 현실과의 상관관계 속에서인데, 바로 이러한 현실이 그의 소설에서는 휘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로, “다만, 하루키의 소설을 두고 노벨문학상을 운운하며 문학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오도하는 상업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한마디 하는것이라고 한다.

나야말로 하루키에 대해 노벨문학상 어쩌구 할 때마다 어이없어 했는데, 저자의 이 말은 내 체증을 싹 가시게 한다. ^^

또 하나.

9쪽에 보면, “문학의 탐구는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찾아내어 밝히는 식으로 전개 된다. 문학작품은 일상의 감각에서는 봐도 보지 못한 채 간과하게 되는 것, 문제임에도 문제라 여기지 않게 되는 것 들에 주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밝혀진 문제들보다는 문제를 그렇게 밝혀내는 문학의 시선이다.”

이 대목은 일반적인 문학 이론에 속하지만, 내게는 큰 위안을 준다. 내 소설을 어렵다고(실은 어렵지 않다)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자가 대신 항변해주는 듯해서 그렇다. 일반 독자들은 이게 뭘까, 작가는 어떤 뜻으로 이렇게 썼나, 답을 생각하기보다 속 시원히 이건 이래서 이래, 하는 답을 원한다. 그것은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고, 나는 그 생각대로 소설을 쓴다.

이어 9쪽엔 이런 말도 있다.

사소해 보이는 것에 깃든 의미, 아무 것도 아닌 듯 버려지는 것들의 소중함, 자명해 보이는 것의 허구성, 견고해 보이는 것의 허망함 등을 밝히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사태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찬찬히 바라보는 너그러운 마음을 얻게 된다.” “문학의 탐구가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자유이다.”

이 대목은 참으로 고맙다. 날카롭게 섰던 마음을 녹인다. 잠시 잊었던 마음의 각오랄까, 그런 것도 일깨운다.

 

 

이 책은 국내외 문학작품을 거론하면서, 문학 전반에 대한 실제적 현상도 말한다. 문학상에 따른 잡음, 지역 문학상의 존재 가치, 친일 문학상에 따른 찬반 의견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나온다. 특히 친일 문학상에 대한 나 혹은 문학인들의 생각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었나 짚어보게 한다.

저자는, 간단히 말해, 이광수나 서정주가 친일 문학을 했지만, 처음부터 친일을 한 건 아니고, 친일을 하게 된 시기와 동기를 밝히면서, 친일 이전의 작품은 작품대로 가치가 있으므로,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광수가 연단에 올라 한 이야기의 발췌(곽형덕 역, 대동아문학자대회 회의록, 소명출판, 2019, 40)를 보면 놀라움을 넘어 소름이 끼친다. 이광수가 친일을 했다는 말을 듣긴 했으나, 이렇게 구체적인 연설을 보니, 이광수가 일제의 힘을 이기지 못해 저지른 일이라 해도 말이 안 된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의 이론으로도 감당하기 어렵다. “천황제와 파시즘을 주장하는 논리”(242)라는 저자의 말은, 이광수가 한 친일에 비하면 고상하기까지 하다.

 

 

친일에 근거한 정치 세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엔 전직 대통령(이명박, 박근혜)에 대한 사면 이야기로 나라가 시끄럽다. 그 일을 연상케 하는 대목(260)이 있어 옮겨본다.

굴곡진 역사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지혜로운 태도가 용서하되 기억한다라 할 때, 이 말은 역사의 횡포에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를 위해 생의 한 국면을 바친 사람들의 입에서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용서를 구해야 할 행위를 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면 말의 질서가 흐려진다.” “거짓된 말이 새된 목소리로 행해지면서 목소리의 톤으로 진실을 가장하게 된다. 여기서 유체이탈 화법이 생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내세우며 국정을 농단했던 지난 정부나, 그렇게 초래된 비정상의 일상화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좌파 독재운운하며 매도하는 일부 정치 세력이 여전히 말의 질서를 흐리고 있다.”

 

 

이 외에도 영양을 듬뿍 주는 말이 많지만 생략할 수밖에 없고, 스토리 오브 스토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그 세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어떻게 그릇되어 가는지,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서 조곤조곤 알려준다.

다시,

새삼,

세상에 책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