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숭고해지는 이유
얼마 전, 용미리 묘지를 찾았다.
우리 엄마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바로 그곳.
날씨는 화창했고 하늘도, 꽃도, 나무도, 바람도 모두 피어있는 때였다.
엄마 아버지는 땅에 묻힌 게 아니라 작은 항아리에 담겨있었지만 푸른 계절만큼이나 내 안에 살아계시다.
아버지는 돌아가기시 바로 전까지 통화를 하셨을 정도로 편하게 계시다 돌아가셨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다.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서럽다.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다 임종을 못했기 때문이다.
용미리를 찾기 전날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엄마와 지내던 시간들이 하나하나 낱장으로 펼쳐지는데, 나는 그 속에서 무력한 딸일 뿐이었다.
엄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는 자책은 아마 내가 엄마 곁으로 갈 때까지 이어질 듯하다.
엄마 아버지에게 꽃다발을 드리고 납골당을 나왔다.
잘 다듬어진 용미리 묘지엔 죽음이 없다.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저 묘지들을 보라.
그 안에 들어있을 사연들은 얼마나 많은가.
납골당 안에 놓여진 꽃들과 카드들에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안타까움이 들어있었던가.
"아빠, 보고 싶어요." "엄마, 사랑해" "000야, 생일 축하해." ...... 등등.
나도 카드에다 "엄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라는 걸 써서 꽃다발에 넣지 않았던가.
가까운 이의 죽음은 살아있는 자에게 고통이다.
그 이유만으로도 죽음은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 묘지의 사연을 가슴으로 읽는데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작년, 용미리에 갔을 때다.
자연장이라고, 용미리에는 따로 마련된 장소가 있다.
자연장은 맨땅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에다 분골을 넣고
봉분은 손등 높이 정도로 만든 것을 말한다.
어느 젊은 부부가 새로 막 덮은 듯한 자연장 봉분 앞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
나는 다른 곳을 둘러보다 다시 그 자연장 앞으로 갔다.
부부 중 여자가 그 봉분 앞에다 우유 팩과 과자봉지를 뜯어 놓고
쪼그려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우유 팩엔 빨대를 꽂은 채.
부부는 말이 없었다.
남자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고
여자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있기만 했다.
그러니까 그 봉분은 그 부부의 아이를 묻은 곳이었다.
아.....
자식은 땅에 묻는 게 아니라 가슴에 묻는다고 하던데
그 부부의 심정은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누가 죽음을 가볍게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은 개인의 것이기도 하지만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죽음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성역에 속한다.
모두의 것인 죽음.
책임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죽는 자도, 남아 있는 자도,
모두가 다시 한 번 돌아봐야 할 터가 죽음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