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소설 <<인간 실격>>과 드라마 <인간 실격>

유리벙커 2021. 10. 27. 23:14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드라마 <인간 실격>

민음사에서 나온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2004년 초판으로 시작해 2021년에는 무려 89쇄를 찍는다. 소설의 무엇이 이토록 많은 독자를 끌여들였을까.

다자이는 1909에 태어나 1948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39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그는 다섯 번 자살을 시도한 끝에 비로소 죽음에 이른다. 그가 죽음에 천착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그의 소설로 유추해 볼 따름이다.

인간 실격은 자전적 요소가 짙은 소설이다. ‘서문으로 시작해 첫 번째 수기, 두 번째 수기, 세 번째 수기, ‘후기로 이어진다.

서문에서 는 사진 석 장을 보는데, 한 장은 열 살 전후의 사내아이이고, 다른 한 장은 교복 차림의 동일인물이고, 마지막 한 장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중년의 동일인물이다.

서문의 가 사진의 인물을 서술하는 장면은 독자를 끌어들이기에 충분하다. 어린 사내아이의 얼굴도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염성과는 거리가 멀다. “언뜻 보기만 해도 몹시 기분이 나쁜아이며 섬뜩하고 으스스한 기운을 가진 아이이며, 웃고 있지만 웃지 않는다고, “사람이란 주먹을 꽉 쥔 채 웃을 수는 없는 법이다라고 가차 없이 말한다. 학창 시절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여자 같은 미모를 가진 이 학생한테서 어딘지 악몽 비슷한 섬뜩함이 느껴지는” “이상한 미남이라고 말한다. 중년 시절의 사진도 역시나. “화롯불에 양손을 쪼이다가 그냥 그대로 죽어간 것 같은” “보는 사람을 섬뜩하고 역겹게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 다음엔 첫 번째 수기로, 소설의 전문이 시작된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는 도입부로 자신의 생을 고백한다. 소설 속 는 동북 지방의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난다. 당시는 전쟁이 한창이라 사람들의 입성이 매우 안 좋을 때지만, 나는 물질의 풍요 속에서 어려움 없이 도련님으로 자란다. 헌데 나는 부잣집 아들이라는 사실에 매우 죄책감을 느낀다. 사람을 제일 무서워하며, 그런 점을 들키지 않으려 익살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을 웃긴다. 그러나 나는 항상 불안하고 소심하다. 집안의 막내로 사랑받는 불안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내다 도쿄에 있는 중학교로 간다. 청소년 시절 역시 인간에 대한 공포는 여전했으나 친구를 사귀면서 점차 희석해 나간다. 친구와 함께 술집을 드나들게 되고, 여자를 만나게 되고, 대학 땐 공산주의에 심취해 열성적으로 모임에 나가기도 하고, 여자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집안에선 그런 사실을 알자 생활비를 끊는다. 공식적으론 생활비를 끊지만 넙치라 불리는 일꾼을 통해 얼마간 주는 형식을 취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는 이 여자와 동거를 하다 저 여자와 동거를 하다, 마약성 약물에 손을 대 중독이 되기도 하다, 뜻이 맞는 여자와 다시 자살을 시도한다. 일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자 집안에서는 나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다. 이렇게 나는 집안으로부터 절연을 당한다. 나는 병원 쇠창살이 끼워진 창에서 밖을 내다보며 인간 실격.”이라 자조하며,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석 달이 지나자 나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병원에 온 큰형은 이제 네 과거는 묻지 않을게. 생활 걱정도 시키지 않겠다. 넌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라고 말하며 시골에서 요양 생활을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때 나이 스물일곱.

 

소설 내용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다. 그러나 베이스가 전혀 없지도 않은 것이 소설과 작가와의 관계다. , 소설의 주인공인 요조와 작가 다자이가 중첩되어 보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특히, 소설 속 가 번번이 자살을 시도한 것과 다자이가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하다 결국 자살로 죽음을 택한 부분은 자전적 요소가 짙다. 다자이는 어째서 그토록 자살을 원했던 것일까.

<작품 해설>을 보면 자살에 관한 내용이 이해에 도움을 준다. “기독교가 지배 논리가 되기 전의 서구 사회뿐 아니라 인류사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숭고한 자살에 대한 용인 내지는 존경이라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가 있어 왔다.” “카토(기원전 95~46)의지적 죽음’, 즉 자살은 자기 목숨으로 자유의 가치를 조명해 낸 정의로운 죽음으로 평가되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책임 하에 완결 짓는 행위는 어느 면에서는 성숙한 인간의 자주적 선택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살이나 자살 방조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법정 죄로 성립된 배경에는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있었다.” 일본에서 여러 문인들이 자살을 했던 점을 거론하면서, “자살에 대한 비난은 거의 보이지 않을뿐더러, 일본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자기 논리에 따라 살다 간 존재로 간주하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고 한다.

다자이가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은 1929, 히로사키 고교 3년 재학 중의 일이다. 평론가 오쿠노 다케오는 이를 어릴 적부터 부잣집 아이라는 사실에 본능적인 죄의식을 지니고 있던 다자이가 고교 진학 후 당시 시대적 사조였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면서 자신의 출신 성분에 절망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자이는 가네기 은행 소유주이자 귀족원 의원인 대지주 쓰시마 겐에몬의 11남매 중 열 번째 자식이자 6남으로 태어났고 혜택 받은 자로서 못 가진 자에 대한 죄의식 내지는 부채의식을 평생 업고처럼 짊어졌. “천성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고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 공포를 느꼈. “다자이가 자살을 기도한 가장 큰 요인이 생가와의 관계 단절에 있었. “유일하게 올바른 사상이라고 믿었던 공산주의를 버리고 동지를 배반한 것은 다자이에게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

해설자이자 번역자 김춘미는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의 일부를 인용한다. “전쟁에 졌기 때문에 추락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고, 살아 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다.... 인간은 추락할 수 있는 데까지 추락해야 하다. 그리고 일본도 인간과 함께 떨어져야 한다. 떨어질 때까지 떨어져서 자기 자신을 찾아내고 구원해야 한다. 정치에 의한 구원 따위는 피상적인 웃기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위의 인용문들을 통해 다자이가 왜 그토록 자살하기를 멈추지 않았는지, 어느 정도 해소가 된다.

김춘미 해설자의 말로 이 작품을 마무리 한다. “타산과 체면으로 영위되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 세상과 확고하게 틀 잡힌 듯한 사회 질서의 허위성, 잔혹성을 인간 실격만큼 명확하게 드러낸 작품도 드물 것이다. 어떻게든 사회에 융화하고자 애쓰고 순수한 것, 더렵혀지지 않은 것에 꿈을 의탁하고 인간에 대한 구애를 시도하던 주인공이 결국 모든 것에 배반당하고 인간 실격자가 되어 가는 패배의 기록인 이 작품은 그런 뜻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예리한 고발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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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방영이 끝난 드라마 <인간 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같은 제목이라 호기심이 동했다. 류준열과 전도연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나로선 소설과 드라마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부정(전도연)이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는 캐릭터임에도,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되었을 때 저항하는 모습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미온적이다. 여배우 정아란(박지영)과 그의 남편이 폭력을 행함으로써 유산과 실직을 당했음에도, 겨우 악성 댓글을 달거나 자살 사이트에서 같이 죽을 사람과 현장 답사를 하는 정도다.

또한 강재(류준열)가 보이는 슬픔과 고뇌는 표피적이다. 호스트바에서 손님을 맞다 역할대행업체로 일을 바꿔 살지만, 이부정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돈으로 성공하고자 했던 캐릭터다. 그런데 이부정을 만나면서부터 차츰차츰 죽음의 영역을 생각해 본다. 그렇다 해도, “우리 다시 만나면 같이 죽을래요?”하는 대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부정과 심리적 합류를 했다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빠르다. 전반부보다 후반부에나 나오면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류준열의 내면 연기는 탁월하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했지만, 내용 면에서는 죽음과 연계할 만큼의 설득력은 없어 보인다.

소설 인간 실격이 한 인간의 파멸을 통해 인간의 존재를 질문하는 것이라면, 드라마 <인간 실격>은 두루두루 잘 살자는 모럴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해피엔딩으로 끝났기 때문일 터다. 드라마의 한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드라마 <인간 실격>은 보기 드물게 서정성이 풍부하고 품위 있는 작품이다. 세상에서 상처를 입지만 상대를 배려해주는 모습은 가슴 찡하게 남는다. 이부정의 경우, ‘아부지는 치매기로 집 비번을 잊어 문 앞에 쪼그려 있다. 이를 본 이부정은 툴툴대기는커녕 조용히 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아버지가 비번이 생각날 때까지 기다려준다. 또한 이부정 남편의 경우, 이부정이 조용하지만 깊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섬 같이 있지만 그저 바라보며 지켜준다. 한편 답답해 보이기도 하나, 아내이자 사람으로 존중해주는 모습은 교훈적이라기보다 아릿하게 마음에 남는다.

드라마 <인간 실격>을 보는 내내 왜 이 제목을 썼을까 의문이 들었다. 소설 인간 실격을 패러디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내용에 깔린 주제나 분위기를 모티프로 삼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제목에 대한 미진함은 아직도 여전하다. 작가가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청자 입장에선 인간의 실격보다는 상처와 아픔이 더 크게 와 닿는다. 인간이 인간의 자격을 상실하려면, 이 드라마보다 잔인해야 한다. 악이든 슬픔이든 고통이든, 정점을 찍을 정도가 되어야 인간 실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드라마 <인간 실격>, 소설 인간 실격이라는 멋진 제목을 놓치고 싶지 않아 그 제목을 달았던 게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