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고운기 시인의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에 나온 ‘시인의 말’은 인상 깊다. 뭐랄까, 웅성거리는 속내를 고운기 시인 특유의 나직하고도 간결한 음성으로 썼다고나 할까.
1987년 1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에 쓴 ‘시인의 말’을 옮겨본다.
기쁨은 때로 두려움을 동반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나만큼이나 소심한 사람은 기쁠 때도 저편의 슬픔을 생각한다. 정작 슬픔 속에선 기쁨의 저편을 노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죄스럽다.
내 아직 어리므로 잘못은 두고두고 고쳐가리라.
2022년 10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개정판에 쓴 시인의 말도 마음에 남는다.
이생에 나는 가을을 좋아했나보다. 가장 철든 계절이 가을이다. 35년여 만에 첫 시집을 다시 내려 유심히 읽어보니 그렇다. 다시 오는 생이 있겠는가만, 오면 가을이 아닌 계절에서 살고 싶다.
이 시집의 1부엔 시인이 고향을 떠나 ‘서울살이’를 하며 보고 겪고 느낀 것들이 나온다. 통일로, 동대문, 수유리, 청량리, 경복궁, 광화문 등은 내 평생이 첩첩이 녹아있는 곳으로 당시의 나를 소환하게 한다. 지금은 아랫녘 어디쯤에 와서 살다보니 더더욱 가슴 뭉클하니 그립다.
그 중 「서울살이」는 당시의 시대상이 시인의 시선과 마주하며 아릿하게 그려진다.
집 한 칸이라도 옳게 장만해 갖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있는 집 한 칸도
세 주지 않고 담보 잡히지 않고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갖고 사는 사람이
또 몇이나 되느냐
가을이 깊어가는 저녁
윤 시월 초승달이 이쁘게 걸렸다
달엔 또 누가 전세 들지나 않았느냐
어느 큰 별나라 은행에 담보나 잡히지 않았느냐
시골로 띄우는 편지에는
가내 두루 평안하다고 적었지만
극장 골목에 내다 깐 좌판을 일찍 치워
그 극장에서 열린다는 무슨무슨 대회에 오실
높은 양반길 닦아주어야 한다고 돌아오던
점심때 만난 광주댁 식구들
매운 재채기와 바람으로 교문을 나서면
몇 권 들지 않은 책가방이 무겁고도 부끄러워
돌아가면 다정히 몸을 뉠 아랫목도
나에겐 차라리 죄
막차를 보낸 간이역 플랫폼의 주황빛 니크롬 등이
이열 종대로 켜져 있는데
모두 다 돌아간 자리의
깊은 비탄을
나는 알고 있다
손에 쥔 하루치 양식에 만족해하자고 되씹으며
온전치 못한 집이나 찾아 들어간 작은 마음 마음들이
어떻게 잠을 청하는지
기억하고 있다.
2부엔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이 1~5까지 연작으로 나온다. 각각의 장엔 예수를 보는 사람들의 입장이 부제로 달려있다. 즉,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1」 - 도성(都城) 밖 대장장이의 노래, 이렇게 되어 있다. 이 시는 도성 밖 대장장이가 예수의 죽음을 생각하며 쓴 것으로 보인다.
그대의 아비도 나만큼이나 천한 사람
일생을 목수질 하며 살아왔을 뿐
아들이 장차 자라 로마의 군인이나 제사장이나
세리가 되어 돈을 벌고
좋은 집에 살며 세상일은 잊으라고
그렇게 바란 것은 아니었을 테지
(중략)
나는 아직 도성 밖 대장간에 앉아
불에 담근 쇠를 꺼내 망치질하면서도
이 못이 장차 그대의 손을 뚫고 발을 뚫고
이 만드는 창으로 그대의 가슴을 찌르게 될지
알 수 없다네
알 수 없다네.
도성 밖 대장장이야말로 우리 자신이며, 양심이며, 아비의 마음이 아닐까 유추해본다.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3」 - 들 밖 양치기의 노래, 중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는 노예로 태어나
먼 조상은 산 채 제물로 바쳐졌고
아니면 발꿈치 잘려 뒤뚱거리기 일쑤였으니
적어도 그만큼은 안다
조상 피로 물려받은 신분이지만
우리가 누구를 기다리고
누구에게 달려가 절하는가
(중략)
적어도 그만큼은 안다
왕이라 부르라 하는 자는 왕이 아니며
주인이라 모질게 구는 자는
참주인이 아니란 것을
절을 받기 위해 옆구리를 찌르고
대궐을 짓기 위해 양털을 앗아가던
왕 밑의 군사나 제사장은
우리 친구가 아니란 것을
시인은 양치기, 다시 말해 서민/우리가 바라는 것은 적어도 불의는 아니라고 항변하는 동시에, 참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 어떠한 것인지를 암시한다.
나는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의 연작시를 읽는 동안 현재의 정치와 지도자가 떠오른다. 어디 이 시뿐이겠는가. 어디 우리나라뿐이겠는가. 그래 그런지, ‘예수’의 자리에 ‘진리’를 대입해 보게 된다.
예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를 낳기 위해 “베들레헴엔 여관이 없소?”(「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5」-길잡이 소년의 노래) 하며 숙소를 찾는다. 하지만 초라한 방 한 칸 얻지 못해 말구유에서 예수를 낳는다.
외양간 헌 구유 짚 덤불 하나 마련해주어
그대의 첫울음소리를 듣던 밤
큰 별도 뜨지 않고
어디 동방의 현명한 몇 사람 낙타 타고
오지도 않았다
착한 어미나 알았겠는가
이 아이 자라
낯설 뿐인 도시마다 반기는 자
없는 곳곳으로
가슴에 품어 전하는 말 있어 당할
한쪽에선 돌팔매질
한쪽에선 잡아들일 음모
세상이 바뀌면이나 알겠는가
싸움이 두려우면 싸운다 나서고
진실이 두려우면 진실하다 나서는 자가
그때엔 모두모두 꼭꼭 숨고
머리 편히 둘 곳 없었던 낯선 그대만이
십자가 지고 가리란 것을
진리는 잘 갖춘 여관이라는 프레임이 아닌, 말구유와도 같이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시작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예수의 고난은 어떻게 보면 영웅신화의 전형성을 띠지만 예수의 출생과 사망은 영웅신화와는 다르다. 영웅신화는 고난을 겪은 후 영웅이 되어 귀향하지만 예수는 생명을 던지는 것으로 구원/진리를 얻는다. 다 아는 얘기지만, 진리는 거대한 이념이나 두터운 책에 있지 않다. 입술이 아닌 몸뚱이로,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행해지는 그 모든 것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진리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애정과 갈망이 손에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