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금포마을 빈터에는

유리벙커 2023. 3. 1. 18:42

산책.

이 말이 참 좋다. 고요하고 진지하나 자신을 놔버릴 수 있어서인 모양이다. 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좋다.

경등산화를 조인 후 집을 나선다. 오늘의 산책 코스는 금포마을. 금포마을에는 바다가 있고 산등성 어디쯤엔 빈터가 있다. 빈터에는 오래 된 나무와도 같은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사등성에서 출발해 마을로 들어선다. 사등성을 품고 있는 마을은 망치산 자락에 위치한 대리마을로, 자금자금한 시골집과 꽤 정성들여 지은 전원주택이 군데군데 있다. 마을 입구엔 반듯하게 구획 정리된 논과 밭이 있고, 꽃모종을 기르는 비닐하우스와 묘목을 심은 곳이 더러 자리하고 있다.

2월 하순. 햇볕은 따스하나 바람은 차다. 등산복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잘 닦인 시멘트 길을 걷는다. 길 양 옆 논엔 올해 농사를 준비하느라 트랙터로 갈아엎은 흙이 속살을 드러낸다.

논둑길을 지나 주택가로 들어선다. 마을 골목을 이리저리 돌다 보면 유자나무가 있는 돌담집들이 나온다. 동백꽃이 새빨간 루즈 색으로 피어 있는 집도 보인다. 시골집을 낀 밭에는 빳빳하게 가시를 세운 엄나무도 있고, 매화꽃이 화창한 날씨처럼 피어있는 매실 밭도 있다.

대리마을 길을 골목골목 따라 가다 보면 자연스레 금포마을이 나온다. 금포마을은 바다를 앞에 두고 언덕에 자리 잡은 어촌마을이다. 언덕배기에서 내려다보면 새파란 바다와 작은 교회, 시골집들이 아른아른 모여 있는 게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어쩌다 바로 그 자리,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야 말았다.

마음을 빼앗긴 것 말고, 마음이 쓰이는 건 따로 있다. 처음 그 언덕배기에서 무연히 하늘과 바다를 보다 눈을 돌리는데, 내가 선 자리의 반대편 아래에서 검은 물체 같은 것이 어른댔다. 시선을 고정하고 뭘까, 뭐지? 그러고 있는데 물체로 보이는 것은 움직이는 듯 아닌 듯 종잡을 수 없었다.

몇 발짝 아래로 내려가 보았다. 검은 물체로 보이는 것은 노숙자나 다름없는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판판하게 고른 빈터에 앉아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할아버지의 미소가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가공이란 단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그저 몸에서 나오는 대로 웃는 웃음이었다.

나는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할아버지의 신발은 빈터 입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할아버지는 빈터 한중간에 책상다리를 한 채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빈터를 방으로 생각하고, 방 앞에다 신발을 얌전히 벗어 놓은 듯했다.

 

그날, 늦여름의 산책은 그렇게 끝이 나고 늦가을 왔다.

자꾸만 금포마을의 언덕배기가 눈에 삼삼했다.

다시 같은 코스로 대리마을 길을 거쳐 금포마을 언덕으로 갔다. 바람과 바다와 하늘은 여전히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언덕배기에 있는 돌 턱에 걸터앉았다. 배낭에서 파프리카를 꺼내 바다를 보며 씹었다. 포도를 꺼내려 몸을 트는데 건너편 아래 빈터에서 작은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늦여름에 본 할아버지였다.

파프리카와 포도와 과자를 들고 할아버지한테 갔다. 할아버지는 지난번에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빈터 입구에 얌전히 벗어 놓은 신발. 코를 들 수 없게 나는 악취. 땟물에 쩐 옷과 언제 씻었는지 모를 얼굴.

할아버지는 과일과 과자가 조금은 미안한 듯, 손사래 비슷하게 치다 겸연쩍은 얼굴로 받았다.

빈터를 나오며 할아버지를 돌아봤다. 할아버진 치매인가?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나? 갈 때마다 빈터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보면 가족 누가 아침에 데려다 놓고 저녁에 데려가나? 벌써 기온이 써늘해지는데 밤에도 저런 상태로 지내나? 119에 도움을 청할 걸 그랬나?

 

 

겨울이 되자 문득 문득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진 이 추운 날씨에도 빈터에 있을까? 빈터에서 밤을 지새우는 건 아닐까? 마음이 자꾸만 불안하고 불편해졌다.

한겨울이 지나고 겨울이 남아 있는 2월 하순에야 금포마을을 찾았다.

이번에도 할아버지는 바다를 향한 채 빈터에 앉아 있었다. 가져간 과자와 과일, 김밥을 들고 할아버지에게 갔다.

빈터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스무 평 남짓 되는 공간에는 예전보다 쓰레기가 늘어나 있었다. 다 쓴 비료포대 봉지며 빨대가 꽂힌 빈 주스 팩이며, 어디다 사용하고 버렸는지 모를 스티로폼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할아버지 옆엔 노랑과 주황색의 어린이용 우산 두 개가,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 등 뒤에는 나뭇가지 서너 개를 꺾어 얼기설기 만든 구조물 아닌 구조물이 금세라도 무너질 듯 있었다. 그 위엔 바람을 막으려는 듯 낡은 담요가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었다.

중요한 변화도 보였다. 할아버지는 털이 달린 후드 티에 겹바지 차림으로, 털신을 신고 있었다.

보살피는 사람이 있나.... 나는 작정을 하고 물었다.

할아버지, 집이 어디에요?”

할아버진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응인지 음인지 모를, 응과 음의 중간 음 같은 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 혼자 사세요?”

할아버진 이번에도 응과 음 사이로밖엔 짐작할 수 없는 음으로 대답했다.

.... 할아버진 치매인가 보다.

다시 물었다.

여기 계시면 춥지 않으세요?”

응과 음 사이의 음.

보호시설에 연락해 모셔갈 수 있게 해드릴까요?”

응과 음 사이의 음.

빈터를 나왔다. 할아버지를 돕자면 할아버지의 신상에 대해 아는 게 순서였다. 이곳 주민이라면 할아버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을까.

언덕배기 빈터 앞을 서성이며 주민이 지나길 기다렸다. 패딩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 한 분이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빈터에 계신 할아버지에 대해 물었다. 패딩 점퍼의 할아버지는 빈터의 할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저 할아버지의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저 할아버지는 어려서 공장을 다니다 다쳐 지능에 장애가 왔다고 했어요. 나이는 팔십 정도 됐을 거예요.”

나는 보호시설에 연락할 생각을 했다니까, 패딩 점퍼의 할아버지는 펄쩍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저기 저 하얀 지붕의 집이 우리 집인데, 그 옆집이 저 할아버지 집이에요. 동생들이 돌보고 있는데 집에 있으면 난리를.... 사람은 좋고 아픈 데도 없어요. 혼자 저러고 있다 시간 되면 걸어서 집 찾아가요.”

아하, 치매는 아니구나. 가족에게 버림을 받은 건 아니구나.

나는 언덕배기를 내려가 금포마을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길 여기저기를 걷다 보니 다시 빈터가 있는 언덕배기 아래에 와 있었다. 해가 기웃했다. 언덕배기에서 조심조심 내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빈터의 할아버지였다.

 

다시 사등성으로 걸음을 뗀다.

빈터의 할아버지는 바다를 향해 앉아있었지만 바다를 보는 것 같진 않았다.

무엇을 보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할아버지의 시간과 생각은 숭숭 뚫린 망으로 빠져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다행이다. 몸이 기록하고 있는 고단했을 인생은 그 무엇도 보지 않는 것으로,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산책시키고 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