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바위는 바위
‘언제나 거제’라는 말을 쓸 수 있는 데를 말하라면, 서슴없이 신선대와 선자산을 꼽는다. 언제 어느 때 가도 좋은 곳, 편안함과 경이로움을 주는 곳.
기어이 벚꽃 계절이다. 신선대를 가는 도로엔 벚나무들이 환호성을 지르듯 피어있다. 캄캄한 밤마저 화사하게 만드는 벚꽃의 신비로움. 요즘 잘 쓰는 ‘환장’이라는 말을 써서 말하면, 어감은 별로지만 ‘환장꽃’이 아닐까 싶다.
벚꽃 길을 지나 신선대에 이른다.
신선대는 전면을 바다에 두고, 날카로운 바위들과 켜켜이 층을 이룬, 팥 시루떡 같은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선선대 바위에서 바다를 보면 항상 느끼는 게 있다. 웅장함과 두려움과 기쁨과 놀람.
신선대에 오르면 지구의 탄생을 몇 억 몇 천만 년이라고, 숫자로 환산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갈라 말하는 것 역시 그렇다. 그런 분류와는 무관하게, 용암은 끓었고 분출했으며 바다와 땅을 갈랐고 그 흔적을 남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느 한때는 화산에 지독히도 관심이 많았다. 용암은 노랑과 주황과 빨강과 하양이 형용할 수 없게 뒤섞여 분출한다. 그 뜨겁고도 뜨거운 액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산줄기로, 바위로, 바다로, 자신을 녹인 몸을 줄줄 흘린다. 무섭다. 속이 시원하다. 내가 화산을 좋아했던 까닭은 화산 자체가 아니라 어쩌면 극점으로 끓어오르는 열기와 분출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분명, 화산과 용암은 언어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다.
널따란 바위에 서서 바다를 마주한다.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옷, 다른 머리를 한 사람들도 이 자리에서 바다를 보았을 일이다. 두 발 달린 날짐승과 네 발 달린 털 짐승들도 이 자리에서 바다를 보았을 터다. 그들, 그것들은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바다는 환상을 주는 동시에 죽음의 공포도 준다. 이것 또한 극점의 지대가 아니고 무엇일까.
몸을 돌려 넓적한 바위 위를 걷는다. 바위덩이는 용암이 흘러내린 자국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점점이 파인 자국들, 물결무늬의 자국들, 혹은 무엇이라 명하기 어려운 자국들. 뜨거움을 뜨거움으로 받아들인 인내와 상처들.
바닷바람이 바위의 기록을 쓰다듬는다. 나도 용암에 덴 바위의 상처에 손도장을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