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비오는 날, 서이말등대

유리벙커 2023. 4. 18. 17:50

 

4월하고도 14일 금요일입니다.

금세라도 비가 올 듯합니다.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집을 나섭니다.

거제 면사무소에 앞에 이르자 몇 방울의 빗낱이 비칩니다.

하늘은 구름장이 두텁고 바람은 몇 낱의 빗방울처럼 간간이 불다 그치다 합니다.

 

거제 면사무소에다 주차한 후 근처를 산책하기로 합니다.

우선 거제초등학교로 갑니다.

116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학굡니다.

당시엔 다리가 놓이지 않은 섬이었을 텐데 섬의 학교치곤 규모가 꽤 큽니다.

정문에 들어서자 5공화국 때의 흔적이 오롯이 보입니다.

그때엔 목숨처럼 강조되던 국민교육헌장과 충효라는 글이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많이 아쉽습니다.

역사를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도 역사 나름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들이 하교합니다.

소중한 미래들입니다.

저 미래들은 디지털 세대입니다.

역사와 디지털 세대의 간극은 분명 있습니다.

간극 안엔 충돌도 있고 이해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성장을 돕는 비료가 아닐까 합니다.

 

학교를 나와 근처 골목과 길을 더듬습니다.

한적합니다.

이 한적함은 외로움과는 달리 풍요롭습니다.

비어 있으나 뭔가로 꽉 찬 듯한 풍요입니다.

 

서이말등대로 이동합니다.

임도 초입에서부터 등대까지는 무려 3.8km나 됩니다.

국방연구원이라는 건물 앞 주차장에 차를 둡니다.

뜸하던 빗낱이 자작자작 내립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깨소금 볶는 소리는 냅니다.

우산을 쓰고 서이말등대가 있는 곳으로 갑니다.

하얀 등대가 참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들어갈 수 없게 주위엔 길도 없습니다.

수풀 속에서 잠시 등대를 보다 몸을 돌립니다.

앞엔 넓게 닦인 시멘트 공터가 있고 바닥엔 하얀 페인트로 H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헬기 이착륙장입니다.

텅 빈 헬기 이착륙장,

비를 맞으며 뿌옇게 흐려진 바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커가는 이파리들.

그리고

그 앞에는 우산을 받치고 선 내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내가 퍽이나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