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지로 사용하다 죄송하여
프린트 한 종이가 거짓말 보태 산더미다. 강의를 들으며 받았음직한 페이퍼와 내가 쓴 소설을 프린트한 종이들이다.
어느 한 날을 정해, 두꺼운 높이로 쌓인 프린트 물을 반으로 잘라 메모지로 사용한다.
메모를 하다 뒷장을 보니 어떤 강의 때 받은 페이퍼다.
재발견의 놀라움이랄까.
누구의 강의였는지 반쪽짜리로는 알 수가 없다.
내용을 읽어보니 철학아카데미 수업 때 교수님한테 받은 듯하다.
누구의 강의였을까.
내용을 다시 찬찬히 읽는다.
짐작컨대, 조광제 교수님의 수업 페이퍼 같다.
전문은 잃어버렸지만 무척이나 소중한 내용이고 교수님께 죄송한 마음이 크다.
반쪽짜리에 쓰인 내용은 이렇다.
뜨겁게 달군 쇠를 두들겨 납작하게 만들고 납작하게 된 쇠판을 다시 달군 뒤 구부려 이중으로 접어 겹치게 하여 또 다시 두들겨 납작하게 만들고 그것을 다시 달군 뒤 또 다시 이중으로 접어 두들겨 납작하게 만들고 또 다시 달구어 접고 두들기고 다시 달구고 접고 두들기기를 수 백 수 천 번을 거듭한 끝에 가장 단단한 한 자루의 장검을 벼려 내었을 때, 그 칼은 쇠로 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주름으로 되어 있는 것인가? 그 칼 속에 대장장이의 끈질긴 노력이 들어 있다고 해야 한다면, 도대체 그 대장장이의 끈질긴 노력은 칼 속에 어떤 방식으로 들어 있는 것인가? 풀무질에 의한 불의 힘은 그 칼 속 어디에 어떻게 들어 있는 것인가? 또 담금질을 할 때 순간적으로 달구어진 쇠를 차갑게 하면서 단련되게 하는 물의 힘은 그 칼 속 어디에 어떻게 들어 있는 것인가? 그 칼의 단단함 속에 들어 있다고 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칼을 쓰는 무사가 적의 목을 한 호흡에 베어버릴 때, 그 베어버리는 작용 속에 들어 있다고 해야 하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칼이 칼집에 고요하게 들어앉아 있을 때에는 칼을 만든 대장장이의 노력과 불의 힘 또는 물의 힘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렇다면, 욕망의 거대한 대해(大海)를 품고서도 그 속에서 오히려 소용돌이칠 수밖에 없는 인간은?
현상과 지각, 존재에 대한 강의였던 듯한데 어떤 강의였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철학아카데미가 인사동에 있을 시절에 첫 강의를 들었으니 아마 2001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첫 강의는 조광제 교수님의 메를로-퐁티의 지각현상학이었다. 당시만 해도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았다. 수업 때마다 조광제 교수님이 번역해서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철학의 입문치곤 대단히 어려운 텍스트였다. 무슨 말인지 반의 반만 알아들었지만 철학이 재미있었고, 지금도 재미있다. 그 시절도 그립고 교수님과 강의실, 가르치고 배우던 열정도 눈에 삼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