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고비에서』

유리벙커 2023. 8. 12. 17:40

시가 무엇이라는 정의는 많다. 내게 시는, 사건과 내면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추상화에 속한다.

다행히, 고운기 시인의 고비에서는 조금이나마 사건으로 내면을 유추할 수 있고, 내면으로 사건을 짐작할 수 있는 시들의 집이다. 20236월에 나왔으며 등단 40년 기념 시집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우선 고비 사막이 떠올랐고, 그 다음엔 인생의 굽이진 고비가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중의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시들은 고비라는 장소에서 인생의 고비로 넘어가고, 다시 인생의 고비에서 고비 사막이라는 장소로 이동하길 거듭한다.

그러니까 고비 사막은 일종의 내면의 장소인 셈이다. 사막이 척박하긴 해도 생명이 깃들어 있듯, 시인은 암 수술과 치료, 퇴원이라는 사막을 거치면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중년 시절과 지금을 오간다. 마음은 간절했으나 행할 수 없어 부채로 남았던 기억과 그에 더해 사랑과 존경에 대한 시적 발화가 애틋하게 자리한다.

시인의 시니피앙은 요란하지 않다. 보폭이 크지도 않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처럼,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으면서 그 자체로 존재를 보여준다.

 

표제작 고비에서6편의 연작시다.

첫 번째 고비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북두칠성이 지평선 가까이 내려와 앉았다

새벽이다

말을 깨워라

 

초원은 양팔 벌려 휘돌아도 눈이 안 닿는 삼백육십 도

 

(나머지 부분 생략)

 

첫 번째 고비에서는 다분히 신화적이다. “시는 신화의 무의식이다라고 말했던 송상일 작가(국가와 황홀20)의 말이 떠오른다.

첫 번째 신화적 발화는 두 번째 고비에서로 가면 병원이 나오고, 세 번째 고비에서로 가면 아파트 정원이 나오고, 네 번째 고비에서로 가면 주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계기판에 경고등이 들어와야 주유하는 습관은 가난한

시절의 유산

 

 

눈금이 줄 때마다 가슴 졸이고

기름을 채우면 지갑이 비던

 

그래도 궁핍 앞에 꺾이지 않고 노래한 날은 다시 부르

지 말자

 

어언, 벗들은 가난을 싫어하고

가난한 노래를 싫어하고

 

그들의 낯선 혼잣말을 듣는 내가 있다

 

봄이 오면 옛 마을의 전당포에 옷 잡혀

 

나는 매콤한 풀 뜯고 자란 양고기 소주 한 잔으로

슴슴할 것이다

 

 

위의 시들을 읽으면 신화와 현실이 유연하게 엮이는 걸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마음이 가는 시들이 있다.

길 위의 길, 사리포, 어떤 비선, 모성의 1루수는 마음에 남는다.

투병 중이지만 주저앉을 수 없다는 고백도 조곤조곤 시어로 나온다.

 

책을 덮으며 다시 송상일 작가의 국가와 황홀에 나온 구절이 떠오른다.

마비를 푸는 것, 문학이 하는 일

고운기 시인도 시를 통해 마비를 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비에서의 활자가 낡아 안 보일 때까지 힘을 내시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