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에서』
시가 무엇이라는 정의는 많다. 내게 시는, 사건과 내면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추상화에 속한다.
다행히, 고운기 시인의 『고비에서』는 조금이나마 사건으로 내면을 유추할 수 있고, 내면으로 사건을 짐작할 수 있는 시들의 집이다. 2023년 6월에 나왔으며 등단 40년 기념 시집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우선 고비 사막이 떠올랐고, 그 다음엔 인생의 굽이진 고비가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중의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시들은 고비라는 장소에서 인생의 고비로 넘어가고, 다시 인생의 고비에서 고비 사막이라는 장소로 이동하길 거듭한다.
그러니까 고비 사막은 일종의 내면의 장소인 셈이다. 사막이 척박하긴 해도 생명이 깃들어 있듯, 시인은 암 수술과 치료, 퇴원이라는 사막을 거치면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중년 시절과 지금을 오간다. 마음은 간절했으나 행할 수 없어 부채로 남았던 기억과 그에 더해 사랑과 존경에 대한 시적 발화가 애틋하게 자리한다.
시인의 시니피앙은 요란하지 않다. 보폭이 크지도 않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처럼,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으면서 그 자체로 존재를 보여준다.
표제작 「고비에서」는 6편의 연작시다.
첫 번째 「고비에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북두칠성이 지평선 가까이 내려와 앉았다
새벽이다
말을 깨워라
초원은 양팔 벌려 휘돌아도 눈이 안 닿는 삼백육십 도
(나머지 부분 생략)
첫 번째 「고비에서」는 다분히 신화적이다. “시는 신화의 무의식이다”라고 말했던 송상일 작가(『국가와 황홀』 20쪽)의 말이 떠오른다.
첫 번째 신화적 발화는 두 번째 「고비에서」로 가면 병원이 나오고, 세 번째 「고비에서」로 가면 아파트 정원이 나오고, 네 번째 「고비에서」로 가면 주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계기판에 경고등이 들어와야 주유하는 습관은 가난한
시절의 유산
눈금이 줄 때마다 가슴 졸이고
기름을 채우면 지갑이 비던
그래도 궁핍 앞에 꺾이지 않고 노래한 날은 다시 부르
지 말자
어언, 벗들은 가난을 싫어하고
가난한 노래를 싫어하고
그들의 낯선 혼잣말을 듣는 내가 있다
봄이 오면 옛 마을의 전당포에 옷 잡혀
나는 매콤한 풀 뜯고 자란 양고기 소주 한 잔으로
슴슴할 것이다
위의 시들을 읽으면 신화와 현실이 유연하게 엮이는 걸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마음이 가는 시들이 있다.
「길 위의 길」, 「사리포」, 「어떤 비선」, 「모성의 1루수」 는 마음에 남는다.
투병 중이지만 주저앉을 수 없다는 고백도 조곤조곤 시어로 나온다.
책을 덮으며 다시 송상일 작가의 『국가와 황홀』에 나온 구절이 떠오른다.
“마비를 푸는 것, 문학이 하는 일”
고운기 시인도 시를 통해 마비를 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비에서』의 활자가 낡아 안 보일 때까지 힘을 내시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