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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이 물음에 통속적으로 답하자면 이렇다. 작가의 덕목은 인내심이다. 신춘문예 당선까지 지루한 나날을 견디고, 평론가와 출판사의 ‘찜’을 받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골방에서 글쓰는 건 자유지만 세상사람들에게 글이 읽히는 건 제도다.
때를 못 만나 책의 외피를 입지 못했던 글들이 눈 밝은 이들에 의해 세상의 빛을 봤다. 소명출판사가 잇따라 내놓은 세권의 소설집 <내 안의 불빛>(정혜주), <을를에 관한 소묘>(김정주), <디오니소스의 죽음>(도태우).
정혜주씨의 <내 안의 불빛>은 대학 졸업 뒤 컨베이어 벨트에 서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던 80년대와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세월을 관통하는 세편의 중편을 묶었다. 전형적인 프로문학의 계보를 잇는 ‘동지와 함께’가 80년대를 이념의 윤곽선으로 선명히 그렸다면, ‘강·섬·배’는 확신 대신 흔들림만 가득한 90년대의 이야기다. ‘부서진 조각배’ 신세인 주인공은 정치적 각성의 대상이었던 공장친구 미례를 찾아, 강을 거슬러올라가면서 ‘얼음 속에 갇힌 빨간 단풍잎’ 같은 상처를 되돌아본다. ‘영만이’는 ‘학출내기’인 진자와 중졸 노동자 영만의 엉성한 러브스토리가 작가의 펄펄 뛰는 입심을 빌려 코믹하고도 슬프게 펼쳐진다. “생콩(진자)과 씨감자(영만)가 상호침투해서 변증법적 통일을 이루메 M선생(맑스)이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식의 분위기에 휩쓸려 영만을 사귀기로 결심한 진자와 말끝마다 ‘배지기 한판! 엎어치기 한판!’을 외치는 영만이 어긋나는 것은 당연지사. 노조활동가로, 산재노동자로, 시의원 후보로 변신하는 영만이의 변신은 일그러진 시대상을 리얼하게 반영한다. 한때 우르르 쏟아졌던 ‘후일담 소설’과는 달리, 80년대를 비춰보는 거울이 90년대의 자아가 아니라 80년대 ‘그 사람들’이기에 흔들리는 깃발과도 같은 시대를 돌아보는 작가의 시선은 투명하고 정직하며 엄살이 없다.
<을를에 관한 소묘>는 “각종 신춘문예와 문학지를 통해 오똑한 등단을 꿈꾸었으나, 최종심만 오르다가 번번이 낙방하는 쓴맛의 세월을 보내온” 40대 여성작가 김정주씨의 중·단편 4편이 실렸다. 이 가운데 ‘알수없는 문’은 하버마스와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시몬 베유에 둘러싸여 사는 심한 안짱다리 지식인 여자가 ‘죽음 없는 지식’을 영원히 고형화하기 위해 온 집안의 문과 자신의 얼굴을 시멘트로 바른 채 죽어간다는 이야기다. 죽어 있는 지식에 대한 섬뜩한 우화다.
표제작 <디오니소스의 죽음>은 음악을 위해 생을 불태웠던 로커 ‘권’의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는 아내 ‘하영’의 이야기가 추리소설 형식으로 쓰여졌다. 3년 동안 참 소리를 얻기 위해 오두막에서 ‘독공’을 했던 권과 건반 위에 올려진 열 손가락의 터치가 완전히 균등한 힘으로 이뤄지는 불가능에 도전했던 하영의 에피소드가 대위법처럼 펼쳐지며 불행한 가족사, 폭발을 내장한 열정의 정체가 밝혀진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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