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p과 start 사이
갑자기 정지 페달이다.
머릿속엔 바람도, 비도, 천둥도, 번개도, 웃음도, 울음도 들어있지 않다.
무엇인지 모를 지푸라기만 잔뜩 든 느낌이 나를 좌불안석으로 몰아간다.
글이, 쓰던 소설이 막혔다.
오늘로 한 챕터만 쓰면 마무리 될 소설이 갑자기 stop, stop이다.
상상력도 꽉 막히고 자괴감도 심하다.
왜 그럴까.
다른 작가가 쓴, 너무나 잘 쓴 소설을 읽은 탓이다.
그럴 때마다 내 글이 떠오르고, 자연히 자괴감과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소설가들은 남의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오히려 일반 독자보다 소설을 안 읽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거의 학대 수준으로 읽던 책들, 거기에도 소설보다 인문학, 철학책이
더 많았던 것은 독서 습관이라기보다 나도 모를 자구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집안을 서성인다.
할 일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통화하고 싶은 사람도 없다.
작업실로 거실로 침실로 들락거리지만 권태와는 다른,
딱히 무엇인가를 잡고 싶지도, 잡을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쓰다 만 소설이 자꾸 머릿속에서 어지럽다.
이대로 있다간 오늘 하루 나는 미치고 말 것이다.
기어이, 출발 페달을 밟기로 한다.
start, start, start.... 어디로? 무엇으로?
이 어정쩡한 나를 그대로 두지 않을 무엇이 나는 절실하다.
그런데 무작정 어딘가로 간다고 또는 다른 일을 한다고 덜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어떤 액션을 취하긴 해야 한다.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한다.
그리곤 옷을 갈아입고 밖을 내다본다.
구름은 잔뜩 끼고 더위는 그런 대로 견딜만해 보인다.
나가야 하나.... 나가고 싶지 않은데.
그렇다고 그냥 있기도 싫다.
stop과 start 사이에서 나는 헤맨다.
결심을 하고 지하주차장으로 간다.
몸은 마치 아픈 사람처럼 무겁고 표정은 근심덩어리로 빚어놓은 듯하다.
차를 몰아 백화점으로 간다.
가고 싶지도 않으면서 가야 하는 이 이상한 start에 나는 솔직히 망설인다.
그러나 어쩌랴.
이대로 있다간 숨이 막힐 듯한데.
하나의 이유를 빌미 삼는다.
얼마 전부터 바지와 티셔츠를 사야겠다는 생각.
있으면 사고 없으면 그만인 것, 그런 생각으로 백화점으로 들어간다.
무언가 계획을 세워 백화점을 올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물건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매장에 들어가 옷을 제쳐보기도 하고 매대에 있는 옷을 들춰보기도 하나
흥이 나지 않는다.
어쩌다, 민소매 원피스가 티셔츠 값으로 나와 있는 게 눈에 띈다.
사이즈를 본다. 프리사이즈.
그 아이한테 맞을까? 프리사이즈인데?
옆에 있던 담당 여직원에게 묻는다. 제일 작은 사이즈 없냐고.
그 여직원, “예전에도 프리사이즈 말고 제일 작은 사이즈 찾으셨죠? 그건 프리사이즈밖에 없어요.”
여직원의 말투가 쌀쌀맞다.
마치, 너는 왜 올 때마다 까탈을 떠니 그렇게 들린다.
순간 벌쭘해진다. 내가 그랬던가?
어쩌다 오는 백화점에서 나를 기억하고 있다니,
더구나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을 꼬집어 말한다는 게 기가 막힌다.
다른 때와는 달리 자신감이 떨어진다.
결국, 그 옷을 산다.
아니, 사게 되어버린 꼴이다.
그래도 그 아이가 입으면 얼마나 예쁠까 상상한다.
참 예쁠 것이다.
그래도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택배로 그 옷을 부친 후 내가 입으면 맞을만한 티셔츠도 한 장 산다.
백화점을 나온다.
집을 나올 때만해도 구름만 끼었던 하늘이 캄캄하다.
비가 억수로 내린다.
그냥 오는 비가 아니라 저주를 잔뜩 담은 언어를 쏟아내듯이 내린다.
옆 차선으로 벼락이 떨어진다.
신호등이 나간다.
와이퍼를 이 단으로 올리고 정릉 쪽으로 내려간다.
차들이 다들 조심조심 기어간다.
툭하면 차선 변경을 일삼던 차들을 자연이 다스리는 듯하다.
빗소리가 차안을 뚫고 들어온다.
음악을 줄인다.
인도에 있던 신호기 제어함으로 번개가 내리꽂힌다.
그림이나 영화에서 보던 번개를 두 눈으로 똑똑히,
그것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보다니 무섭기보다 신기하다.
마침 그곳을 지나는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있었다면 감전되었을 터.
북부간선도로를 타고 동부간선도로로 진입한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아니건만 차들이 도로를 메우고 있다.
이 상태로 언제 집에 갈 수 있을까.
동부간선도로 옆 중랑천을 본다.
흙탕물이 무섭게 솟구치며 흐른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 생각난다.
지금의 저 물을, 실감나게 썼는지 다시 되짚어본다.
물이 고인 곳에 비상등을 켠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저 차는 지금 stop 중.
쓰다 만 내 소설처럼 stop 중.
옆 차선으로 들어가 조심스레 물웅덩이를 지난다.
이렇게 가는 나는 start.
언젠가는 멋지게 마무리 지을 내 소설처럼 start.
사실, stop과 start는 구별해 말할 것이 못 된다.
정지인 듯하나 출발이요, 출발인 듯하나 정지인 것이 인생이다.
엄밀히 말하면 stop은 없다.
‘나’가 살아있건 말건, ‘나’가 존재하건 말건,
이 세상은 start, start가 아닌가.
그렇게 start로 있는 세상이기에 stop키를 잡을 수가 없을 뿐.
잡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뿐.
낙오될까 두려워, 소외될까 두려워 그저 달리고 달릴 뿐.
지금 쓰다 만 내 소설은 stop과 start 사이에 끼어 쩔쩔매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stop의 나와 start의 나를 좀 더 돌아보게 되는 날,
분장하지 않은 진솔한 글로 태어나지 않을까 위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