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추측하다
글의 전염성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이런 글귀를 보았다.
"돌연한 확신. 아무도 나를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며칠 째 머릿속을 뱅뱅 돈다.
그 말은 누구나 공감하는, 그러나 알고 싶지 않은, 인식 않/못하는 진실이다.
굳이 외면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금어禁語이기도 하다.
그 말을 읽는 순간 속이 울컥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그 선생님이나 나나 사는 건 비슷하다.
큰 근심 없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산다는 그러한 조건들.
그런데도 나나 그 선생님은 결핍을 느낀다.
이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것이라고 본다.
사랑이라는, 그 허무한 불확실성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마치 동냥이라도 하듯 사랑을 붙들고 싶어한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사랑했단 말인가.
나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사랑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굳이 캐 보면 대상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애이기 때문이다.
대상에 들어있을지 모를 '나'의 어떤 욕구, 이미지, 자기복제, 그런 것을 원하고 찾으려는 걸
대상을 향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고 여긴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아무도 나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그 얘기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다.
그 얘기를 언니에게 했을 때 언니는 공감하며 덧붙인다.
"무관심도 사랑이야. 잔소리 하는 것도 사랑이야."
결혼생활을 해본 사람은 안다.
언니의 말이 사실이라는 사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결혼생활이 시시해질 무렵이면 간통이 대신 열정을 불어넣는다"고 했던가.
맞는 얘기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라기 보다 열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열정을 뺀 사랑은 생각할 수 없으니까.
잔소리도 열정이고 무관심도 열정의 하나다.
하나 더 붙인다면 우울도 열정이다.
어제 오늘 무척이나 우울하다.
그 우울을 존중한다.
어느 면에선 삶의 기둥이 되므로.
소음덩어리인 인간에게 그러한 열정마저 빠진다면 뭐가 남을까.
생각의 미라가 되지 않을까.
치매라는 게 생각의 모퉁이를 화려하게 수놓는 것이라면
그마저 없는 것은 미라이다.
생각이 함유하고 있는 갖가지 수분과 영양소가 증발하여 말라비틀어진 껍데기만 남은 생각의 미라.
생각의 미라가 되기 싫어 사람들은 사랑을 선택한다.
그 선택이 옳든 그르든, 상처를 내든 용기를 북돋아주든, 사랑은 살아있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우리는 일단 살고 있다.
그러니 살아있는 한, 살아야 하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 선택 아닌 선택 속에서 좌절도 하고 환호도 하지만
가끔은 지금을 살아내는 우리의 자화상에 눈을 돌리게 된다.
누가 누구를 사랑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