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벙커 2011. 10. 7. 01:45

 

 

‘인생’에 대한 댓글만큼 많은 것도 드믈 것이다.

인생은 고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자신의 체험을 담은 많은 말들이 ‘인생’의 옷을 입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인생의 댓글은 무엇일까.

굳이 말한다면, 죽음, 그리고 삶의 반죽이 수없이 반복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련다.

추상적인 그 말이 뼈와 살, 그리고 호흡을 달고 몸으로 나타날 때, 나는 솔직히 버겁다.

‘인생’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 밖의 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나를 달군다.

뜨겁게, 혹은 차갑게 달구며 달려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다.

그래서,

호소하고 위안을 받고 싶기도 하고, 때론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뭉개버리고 싶기도 하다.

내 젊은 날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음악다방을 찾고, 명동을 쏘다니고,

추위에 빨갛게 달구어진 볼따구니로 강가를 찾던 나는 지금도 그대로인데 그대로가 아니다.

기웃이 넘어가는 해처럼 뜨겁지만 스러짐을 향해 있고, 지나간 시간을 조금 기억하는 것으로 그만이다.

 

 

오늘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으로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는, 삶의 가장 걸작은 죽음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깊은 성찰 없이는, 허무와 싸워보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그 말에 나는 일찌감치 한 표를 던졌더랬다.

죽음만큼 베일에 싸인 게 없다.

그래서 신비롭고, 그래서 두렵다.

그렇다한들, 비껴갈 수 없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오직 혼자, 혼자가 되는 바로 그때가 죽음이다.

그때는 자유, 절대적 자유를 실은 수레를 타고 훨훨 날아간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니다.

이렇게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이 살아있다는 걸 여실히 증명한다.

살아있으니, 살아있는 것에, 살아있음으로, 나를 던져놓는다.

소설을 쓰기도 하고

전화로 수다를 떨기도 하고

번개 요청이 오면 나가기도 한다.

 

 

번개를 친 친구와 용산가족공원엘 갔다.

날씨는 청춘과 노년 사이를 오락가락하듯, 쨍하게 뜨거웠는가 하면 수굿해지기도 했다.

도시 한복판에 나무가 있고 물이 있고 산책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싸간 포도를 먹기도 하고

잘 닦인 오솔길을 걷기도 하며

‘인생’, 바로 그 절대적인 현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고해'와 '사랑'이 오갔다.

죽음과 삶의 반죽이 이스트 없이 부풀다 푸르르 내려앉기도 했다.

사진기를 들고 친구에게 “너부터 마루타 돼 봐” 하며 찍기를 권하기도 했다.

까르르 웃는 소리, “쌩쑈 좀 해 봐?” 하는 소리,

“이 나이에 이런 짓거리하는 거 보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소리,

그러면서 별별 포즈를 다 취해보기도 하는 몸짓, 부족함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웃고 난 후, 나는 왜 그렇게 허전했을까.

바로 이 소녀와 입을 맞추는, 그런 순간이 영영 지속되길 바랐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