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마을과 라뽂기
그 때, 그 밤엔 비가 내렸다.
우리는 십시일반, 가지고 있던 음식(이랄 것도 없는)을 한 두 개 씩 들고 A 작가의 방으로 갔다.
여자 작가 셋과 남자 작가 한사람이 한자리에 앉았다.
한 달 동안 작업을 마치고 나가는 나를 위한 송별회 자리였다.
처음 보는 작가들이 몇 주일, 혹은 한 달간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고 얼굴을 익힌 그러한 정분이 제법 도타웠다.
방주인 A작가가 노트북에서 노래를 틀었다.
밤비와 잔잔한 음악이 방안에 깔렸다.
우리는 가져온 음식을 방바닥에다 펼쳐놓았다.
남자 작가 L은 천하장사 소시지를 가져왔고
다른 여자 작가 M은 과자와 라뽂기를 내놓았고
A작가는 견과류며 맥주를 꺼내놓았다.
난 솔직히 놀랐다.
천하장사 소시지는 어린애들이나 먹는 것으로 알았는데
체격 좋은 바로 그 남자 작가 L의 가장 친한 메뉴라는 것이다.
그리고 라뽂기라는 건 나로선 처음 듣고 본 것이었다.(집에 아이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우리는 마치 엠티를 온 것처럼 살짝 들떴다.
잔에 맥주를 따르고 과자를 씹으며 우리는 글에 대해, 자신의 신념에 대해, 점점 열을 내며 말하기 시작했다.
설전이 오갔고 관점이 어긋날 땐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자리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그때 M작가가 라뽂기에다 더운 물을 부었다.
하지만 젓가락도 없이 우리는 저걸 어떻게 먹을까 막막했다.
A작가가 나무젓가락 한 개를 겨우 찾아내 반으로 잘랐다.
그러나 네 명이 나무젓가락 두 개로 먹기엔 아무래도 무리였다.
최고 연장자인 내게 한 개가 돌아왔고,
남자 작가에게 한 개가 돌아갔다.
A작가와 M작가는 알아서 먹겠다고 했다.
우리는 한 개의 라뽂기를 한 입씩 돌아가며 먹었는데
나는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봤다.
라뽂기 자체가 맛이 있다기보다 아마 그런 분위기에서,
그렇게 어렵사리 먹는 것 때문에 맛이 좋았을 것이다.
내가 한 입 먹고 옆 사람에게 돌리면
그 사람은 라뽂기 뚜껑을 반으로 접어 대충 건져먹는 그런 식이었다.
그 때의 라뽂기는 정말 아까웠다.
쌀보다, 고기보다,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소중했다.
양이 적으니 옆 사람을 생각해 조금씩 맛만 보는 식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우리가 그 방에서 나올 때까지 밤비는 주룩주룩 내렸다.
난 오늘 마트에서 모처럼 라뽂기를 샀다.
라뽂기를 보는 순간, 나는 벌써 만해마을의 그 시간으로 돌아갔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정겨웠던가.
그때 우리는 또 얼마나 힘들었던가.
낯선 사람들이 익숙해지며 가까워지기까지의 그 시간들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때의 경이로움과 언쟁, 불편함 속에 깃든 따뜻함이 그립다.
아마 라뽂기를 먹을 때마다 나는 그 때 그 시간과 연애질 할 게 틀림없다.
그렇게 하고 싶어 일부러 라뽂기를 샀는지도 모른다.
오늘, 혼자 먹는 라뽂기는 맛이 없다.
그러나 먹는 내내, 나는 그 때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오붓하니 풋풋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