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기계 마음

유리벙커 2012. 1. 14. 16:53

 

 

종이가 아닌 컴퓨터에 글을 쓰는 작업은 기술적인 면에서 혁명적이라 할 만큼 편리하다.

그런데 종종 사고가 나기도 한다.

어제가 바로 그런 경우.

1370매를 쓴 장편을 손보고 있었다.

초고에서 두 번쯤 손본 글이라 고칠 게 많았다.

요 며칠 죽어라 그 글에 매달렸다.

그런데 손본 것을 저장하려니 ‘파일’에 커서가 안 먹혔다.

‘파일’ 색이 달라져 있었고, 왜 달라져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해서, 이것저것 눌러봤다.

그랬더니 “이 문서를 최종 상태로 돌려놓을까요.” 하고 묻는 말이 나왔다.

지금까지 해본 것으로 봐, 10초~20초 간격으로 자동저장이 되는 터라 예스를 눌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하루 종일 수정한 상태의 글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글로 저장이 됐다.

결국, 피 말리며 하루 종일 작업한 글은 저장이 안 됐다는 얘기다.

머리가 뜨끈해왔다.

다시 여기저기를 쑤시고 돌아다녔다.

최근에 작성한 문서도 꺼내봤다.

그러나 역시 수정하지 않은 상태의 바로 그 저장된 글만 나왔다.

그때가 새벽 세 시.

어디다 물어볼 수도 없었다.

컴퓨터를 계속 켜놓고 잘 수도 없었다.

미칠 듯한 심정이었다.

할 수 없이 녀석에게 장황하게 지금의 상태를 이메일로 보내고

컴퓨터는 켜놓은 상태로 잠자리로 갔다.

새벽 다섯 시.

잠이 올 리 만무였다.

 

 

 

그렇게 아침이 됐다.

잠에서 깨자마자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과 전화를 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파일’에 커서가 안 먹힌 이유는

아마 글 창에 여러 개의 문서를 꺼내놓고 쓰다 그렇게 된 것 같다고 했고,

저장이 안 된 이유는 원고와 글 버전이 달라서 가끔 충돌이 일어나는데 그런 상황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지금 쓰는 컴퓨터는 작년에 최신 걸로 새로 구입한 거였고,

손본 원고는 몇 년 전에 쓴 원고로, 예전의 컴퓨터로 작성한 것이라

버전에 충돌이 생긴 모양이라는 뜻이었다.

원인은 알았지만, 날아가 버린 원고를 복구시키지 못한 것은 여전히 미칠 노릇이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볼일이 있어 잠시 외출했을 때도 글에 마음이 바빠 신호위반까지 하며 집으로 달려왔던 일이 생각났다.

전화기도 전원을 끄고 작업했던 것도 생각났다.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마음이 산란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난다.

사람들은 마치 기계를 부리는 듯하지만 실은 기계가 사람을 부린다는 것.

우리는 작은 가전제품 하나만 새로 구입해도 설명서를 읽는다.

설명서 대로 하지 않으면 기계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기계의 마음이다.

기계의 마음에 들지 않게 하면 기계는 가차 없이 에러를 선언한다.

절대 복종을 원한다는 뜻이다.

융통성도 없고 인정도 없고 판례도 소용이 없다.

그저 복종, 절대 복종만이 기계의 마음이다.

기계의 마음에 들게 하면 기계는 또 그럴 수 없이 샤프하게 나온다.

사람은 기계의 마음이 아니다.

매번 기계의 마음에 맞출 수가 없다.

그러나 기계는 기계라는 그 어마어마한 타이틀로 절대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기세등등, 적응하는 인간과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을 골라낸다.

조금만 뒤처진다 싶으면 낙오자로 낙인을 찍는다.

그러니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기계 앞에서 절절 맨다.

멀쩡한 것도 버리고 새로 나온 걸 사서 

얼른 메뉴얼로 기계의 마음이 어떤 걸 원하는지 알아내려 한다. 

그리고 자랑한다.

새로운 기기를 정복했다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원고를 날리고 우는 일밖엔 없다.

기계의 마음.... 편리하지만 다정하지 않고, 다정하지 않지만 뿌리칠 수 없는, 딜레마의 존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