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아우라의 혈통

유리벙커 2012. 3. 24. 02:26

『아우라』카를로스 푸엔테스/송상기 옮김, 민음사.

 

 

‘너’라는 이인칭으로 시작한 이 소설은 대화체로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온다.

‘너’ 즉, 펠리페는 젊은 사학자를 구한다는 신문 광고를 읽는다.

4000페소라는 조건에 ‘너’ 펠리페는 광고주를 찾아간다.

광고주가 사는 동네는 시내 복판에 새로 지은 건물들 속에 들어 있는 오래 된 저택이다.

펠리페는 그 집으로 들어가며 음산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낀다.

그 집에는 노파(콘수엘로)와 아우라라는 소녀가 산다.

펠리페는 아우라를 보자마나 파도가 출렁이는 듯한 녹색 눈동자에 반한다.

펠리페는 콘수엘로가 누워있는 침실로 가 광고를 낸 이유를 듣는다.

콘수엘로는 60년 전에 죽은 남편(요렌테 장군)이 쓴 노트를 정리해 책으로 내길 원하는데 그 작업을 해달라고 한다. 조건은 4000페소를 주고 이 저택에서 작업하는 걸 내건다. 펠리페는 별로 달갑지 않지만 그렇게 하기로 한다.

식사 시간이 되자 펠리페는 아우라가 콘수엘로가 하는 그대로를 따라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옷도 콘수엘로가 입은 비단 녹색 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음을 본다.

펠리페는 아우라가 콘수엘로에게 묶여 지내는 건 아닐까 의심한다.

그러나 아우라는 오히려 “그녀가 나를 위해 희생하고 있어요.” 하고 말한다.

그러던 중, 펠리페는 고양이 무리를 불에 태우는 걸 본다.

그리고 아우라가 부엌에서 어린 양의 목을 자르고, 그 껍질을 벗기는 걸 본다.

그런 후 콘수엘로의 방으로 간 펠리페는 콘수엘로 역시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마치 양을 잡고 그 껍질을 벗기는 듯한 동작을 본다.

펠리페는 혼란 속에 방으로 들어와 잠이 든다.

잠결에 펠리페는 아우라와 동침을 한다.

동침을 끝내자 펠리페는 방구석에서 콘수엘로가 지켜보고 있었음을 안다.

그런데 아우라는 곧장 콘수엘로에게로 가 그녀를 끌어안는다.

그러면서 두 여인은 펠리페에게 고맙다고 동시에 말한다.

그 후 어느 날 펠리페는 콘수엘로가 외출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 틈을 이용해 펠리페는 요렌테 장군이 쓴 세 번째 노트를 찾는다.

노트 속엔 사진이 들어 있는데, 그 중 요렌테 장군의 사진이 나온다.

그 사진을 보며 펠리페는 요렌테 장군이 바로 ‘너’인 펠리페라는 걸 깨닫는다.

노트를 보고 난 후, 즉 콘수엘로가 외출 한 사이, 펠리페는 아우라와 세 번째 동침을 한다.

그러나 아우라로 알았던 펠리페는 아우라가 아닌 콘수엘로임을 알아챈다.

콘수엘로는 동침 끝에 이런 말을 한다. “돌아올 거예요, 펠리페. 우리 함께 그녀를 데려와요. 내가 기운을 차리게 놔두세요. 그러면 그녀를 다시 돌아오게 할 거예요.”

여기서 ‘그녀’는 아우라다. 즉, 아우라는 콘수엘로가 만든 욕망의 분신이다.

남편 요렌테 장군에게서 사랑을 받던 젊은 시절의 콘수엘로다.

그리고 ‘너’는 요렌테 장군의 분신이다.

 

 

아우라의 혈통을 정리하면 이렇다.(작품해설을 인용)

 

아우라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가벼운 바람’, 즉 콘수엘로가 만든 환영이자 제식을 행하는 대리인이다. (중략) 아우라는 콘수엘로의 젊음과 재생의 욕망이 빚어낸 인물이다. 아우라와 콘수엘로는 부분과 전체라는 환유적 관계이다.(중략) 펠리페 역시 콘수엘로의 욕망에 투영된 요렌테 장군의 환영이다. 콘수엘로가 젊은 요렌테 장군의 분신인 펠리페와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스스로에게 불가능한 젊음을 현재하가기 위한 것이다. 이 소설은 실은 찰나적 환영으로 죽음을 넘은 사랑과 잃어버린 청춘을 염원하는 상처 입은 자들의 엘레지인 것이다.(중략) 아우라는 단순히 콘수엘로의 욕망을 위한 매개체나 주술이 빚어낸 환영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펠리페에게나 콘수엘로에게나 접근 불가능하고 일회적이며 다가갈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다. 물론 콘수엘로는 과거의 사랑을 현재에서 실현하기 위해 아우라를 탄생시켰다. (중략) 아우라는 점차 자신의 생명력을 획득해 나간다. (중략) ‘위안’이라는 뜻의 ‘콘수엘로’에게 있어 가장 큰 위로와 즐거움은, 바로 일회적이지만 너무도 눈부신 아우라의 재현인 것이다.

 

 

이 작품은 현실과 이미지 사이를 절묘하게 서술하면서, 그로테스크한 장면과 빠른 전개로 독자에게 흡입력을 유감없이 전한다. 중편 분량의 소설이지만 웬만한 장편소설 못지않게 많은 걸 시사한다.

여기서 나는 ‘아우라’가 곧 ‘너’인 우리 자신이며, ‘아우라의 혈통’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