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발표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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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벙커 2012. 6. 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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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낯익다. 아하, 참으로 낯익다. 이 퀴퀴한 냄새며 질척한 흐름이 속일 수 없이 보인다. 질겅질겅 껌을 씹듯 복도를 걸어간다. 이곳이 몇 번째 오는 곳이더라? 헤아릴 수 없이 많기도 하고 처음이기도 하다. 컴컴하게 고여 있는 공기며 그 속에 눅진하게 눌러 붙은 이 냄새야말로 모텔 냄새이며 곧 너의 냄새다. 태어날 때부터 너는 이런 침침한 냄새와 근친상간을 했다. 말이 너무 심했나? 심한 김에 톡 까놓고 말하자. 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이다. 서른하나 무슨 띠, 서른넷 무슨 띠, 이런 정확한 숫자가 아니라 그저 뭉뚱그려 말하는 게 네 나이다. 참 이상도 하지. 누가 올렸는지는 몰라도, 호적에 올라있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네 나이는 너를 보는 사람들이 정한다. 십대로 보든 오십대로 보든 너로선 그게 그거다. 자, 그럼 네가 그렇거나 말거나 날라리로 살겠다고 작정한 게 어떤 것인지 말해보자. 너는 오늘이 고양이 발정 난 소리로 보인다. 기대치가 상승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면 어제는? 기분이 꿀꿀했으니 자장면이다. 너는 생선과 물고기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 이 얼마나 산뜻한 일이냐. 수돗물소리를 삼각형이라 해도 되고, 야채장수 떠드는 소리를 쓴맛이라 해도 된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청각과 미각, 후각과 통각은 너의 눈이다. 그러므로 너는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프리맨이며, 한마디로 늘어지게 호강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시간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아침이 들어있는지 저녁이 들어있는지 헤아리지 않는다. 한 계절만 있는 곳처럼 너는 늘 밤이다. 밤으로 살아서 그런지 넌 욕심쟁이다. 욕심은 컴컴한 너를 닮아 끝이 없다. 끝이 없다는 게 다행이다. 끝을 보면 더 살 이유가 없어지므로 너는 끝까지 욕심을 잡고 떼를 쓴다. 심심할 때면 너는 콧구멍을 후비거나 코털을 잡아 뽑으며 욕심의 공로에 표창장을 수여한다. 오늘, 너는 그 잘생긴 욕심이 제대로 진행될지 아닐지 기대와 함께 약간은 긴장한다.

너는 밤 같은 너를 끌고 밤 같은 복도를 걸어간다. 이제 초보는 아니다. 휘청거리거나 더듬거리거나 외우지 않아도, 네 수족이 되어버린 감각은 정확한 센서로 너를 인도한다. 이마에 와 닿는 공기가 습습하다. 팔목 사이로 스쳐가는 냄새가 끈끈하다. 코끝에 내려앉은 먼지가 어제의 모텔에서보다 무겁다. 이정도면 늙은 너구리도 무색하다. 너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휴대용 머리빗을 꺼낸다. 머리빗은 보나마나 갈색이다. 빨강이든 파랑이든 네가 갈색으로 정했으면 갈색이다. 너는 객실로 들어가기 전, 갈색 빗으로 머리를 빗는다. 머리를 다 빗자 너는 오늘의 손님을 갈색9번이라고 정한다.

사실, 색만큼 너를 괴롭히는 건 없다. 볼 수 없는 자에게 색이란 무한한 열등감이자 패배감이다. 그나마 각이나 네모, 세모, 원, 뿔의 모양은 만져가면서라도 배울 수 있지만 색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냄새 또한 이런 걸 구린내라고 한다, 저런 걸 입 냄새라고 한다, 외우면 되지만 색은 그럴 수도 없다. 색에 대한 보복 심리인지 아니면 손님들이 이름을 말하지 않아서 그런지, 너는 손님에게 색을 붙이는 걸로 손님을 기억하려 한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한 날, 너는 중년의 여자를 흰색이라 불렀다. 두 번째 받은 환갑 나이의 여자는 주황색으로 칠했다. 세 번째 할아버지는 빨강이다. 일이 점점 늘자 너는 한정된 색만으로는 손님을 기억하기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 색을 세분화하자. 너는 어제 첫 손님은 보라23, 삼년 전 첫 손님은 노랑15, 엊그제 마지막 손님은 분홍11로 정했다. 과연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인다는 게 무슨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너는 너만의 방식을 고수한다. 치적이라면 과한 표현이 되겠지만, 아무튼 너는 네가 받은 손님의 수를 곡창에 쌓는 쌀가마처럼 차곡차곡 쟁여두고 싶어 한다. 너만이 인정하는 너만의 능력인 셈인데, 이제 너는 손님이 늘어도 헷갈릴 걱정 따윈 하지 않는다. 색에다 숫자만 붙이면 네 욕심만큼이나 무한하기 때문이다.

너는 갈색9번이 들어있는 룸 앞에 선다. 들어가기 전, 너는 입고 있는 옷을 한 번 훑어본다. 아이보리 색 양복에 옅은 보라색 와이셔츠, 가지색 넥타이가 썩 잘 어울린다. 아니, 어울린다고 한다. 이 옷은 오늘의 손님을 위해 특별히 백화점에까지 납시어 장만한 것이다. 너는 잘 차려입은 옷이 꽤나 만족스럽다. 거기다 요즘 새로 나온 스킨로션까지 듬뿍 발랐으니 사모님을 모시기로는 그만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봐, 이만한 성의에 넘어가지 않은 사모님은 그리 많지 않다. 반응을 봐가며 슬슬 좋은 정보도 캐내고, 잘만하면 수익도 챙길 수 있다 싶으니 순간 너의 마음은 뜨거워진다.

똑똑!

안에서, 문이 열려있다고 말한다. 문을 열자 비릿하고도 쿰쿰한 냄새가 전신을 찌른다. 이 냄새야말로 자연의 냄새이며 생존에 필요한 환경 친화적 냄새이다. 너는 너의 냄새를 들이키며 천연덕스러운 인사를 던진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날씨죠?”

갈색9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말이 필요 없는 눈으로 너를 보고 있다는 게 네 눈에 또렷이 잡힌다. 너는 거만하게 엎드려 있는 갈색9번을 탐색한다. 가진 자들에게서 드러나는 퉁퉁하고 기름진 냄새가 네 몸에 착 감긴다. 아주 좋은 기류이다. 강남 사모님만 상대하겠다고 선언한 후, 알선업체에 서슴없이 뒷돈까지 건넨 건 탁월한 선택이다. 그런 점에서 너는 너를 자부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늦은 건 아니죠?”

너는 사근사근 말하며 양복저고리를 벗는다. 갈색9번이 응 인지 어 인지 모를 소리로 대꾸하며 너를 본다. 너는 가슴을 펴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룸 구석에 세워진 옷걸이로 간다. 갈색9번이 해부도를 들여다보듯 너를 본다. 너는 태연하게, 노련한 솜씨로, 옷걸이에다 양복저고리를 건다. 갈색9번이 그런 너를 채점한다. 목소리가 좋아. 군살도 없이 몸매가 탄탄하군. 천박해 뵈지도 않고 눈 뜬 사람보다 더 잘 생겼어. 갈색9번이 매긴 점수는 A+이다.

너는 갈색9번의 눈에 충분히 서비스를 해준 다음, 갈색9번이 엎드려 있는 곳으로 간다. 갈색9번에게서 구찌 향수냄새가 난다. 같은 회사제품이라도 살 냄새와 섞인 향수냄새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체취로 작용한다. 너는 갈색9번의 체취를 전신에 입력하며 갈색9번을 뜯어본다. 갈색9번은 보약과 보석을 좋아한다. 그만큼 몸을 중요시하며 과시욕도 세다. 골프와 헬스는 기본이요, 자기보다 낫다 싶은 여자는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매장시키는, 천상천하유아독존병도 대단하다. 그럴 때는 독버섯 같은 독선도 서슴지 않는데, 대신 자신을 띄워주는 사람에겐 그럴 수 없이 인자한 어머니다.

너는 갈색9번에 관한 데이터를 작성한 후 갈색9번의 머리맡으로 가 앉는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말씀해 주시면 참고하겠습니다.”

말을 하며 너는 지구본을 감싸듯 갈색9번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다.

“아니, 쉬러 왔어.”

갈색9번이 처음으로 입을 뗀다. 오냐, 잘 됐다. 어디가 쑤시네 결리네 구질구질하게 늘어놓는 것보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부티 나는 말인가. 너는 손바닥으로 머리 전체를 누르듯이 감싼 채 열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기 시작한다.

“아, 예, 잘 오셨습니다. 편히 쉴 수 있게 잘 모시겠습니다.”

갈색9번은 아무 대꾸 없이 네 손에 머리를 맡긴다. 너는 작은 지구본을 조심스레 다룬다. 축구공과 비슷하긴 하나 세상이 다 들어있으니 그래야 한다. 세상이라는 포괄적인 용어를 풀어 말하면, 돈줄과 연줄이요 몰캉몰캉한 유혹과 말랑말랑한 감성이다. 특히 유동성이 강한 이 액상의 감정들은 손끝만 잘 타도 물꼬가 터진 듯 콸콸 퀄퀄 흐르게 마련이다. 너는 그 점을 잘 꿰고 있기에 있는 실력 없는 실력을 다 해 갈색9번의 혈과 근육을 눌러주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한다. 너의 성의에도 갈색9번은 말이 없다. 이쯤해서 너는 향료 좋은 조미료를 아낌없이 친다.

“사모님은 귀골이십니다. 지금까지 여러 손님들을 대해봤지만 이렇게 귀티 나는 두상은 처음입니다. 성골의 피를 타고 나신 거 같습니다.”

성골까지 운운하다니 너는 꽤나 변죽이 좋다. 하긴 그렇다. 귀골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 가지고 싶다고 24시간 불 밝힌 편의점을 들락거린다고 사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대로 세월과 세월을 더하고 곱해야 나올까말까 한 게 바로 이 귀골과 귀티다. 그 중간에 나누기나 빼기가 들어가도 이 귀골 귀티님은 명을 부지하기 힘들다. 그런 계보에 의해 이 귀골 귀티님은 토종 중의 상 토종 자리를 고수한다. 불로초보다 귀한 이런 귀골 귀티님을 선뜻 선사하니,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갈색9번의 입이 소리 없이 나팔 모양으로 벌어진다. 이에 너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지고, 너의 손은 늠름한 기상으로 갈색9번의 어깨로 내려간다. 손바닥으로 양 어깻죽지 사이를 훑듯이 누르며 너는 으레 하던 말을 뱉는다.

“승모근이 좀 뭉쳐있습니다. 아프다 싶더라도 참으십시오.”

갈색9번이 짧게 으, 하더니 시원하다고 말한다. 너는 다시 한 번 같은 동작을 되풀이한다. 너의 동작은 성실하다. 얄팍하게 안마 시늉만 내는 게 아니라 살을 하나의 인격으로 대한다. 안마를 받는 손님은 안마사의 작은 동작 하나에도 예민하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려는 것인지 혼신을 다 하는 것인지 안마사보다 더 잘 안다. 너는 노글노글하게 퍼지는 여자의 살 냄새를 맡으며 주먹 쥔 손으로 등 한가운데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듯이 누른다.

여자의 살 냄새만큼 황홀한 것도 드물다. 그 냄새는 절대 늙지 않는다. 항상 맛있고 재미나고 물리는 법이 없다. 늘 청춘이며 행진곡이며 세상의 모든 것을 평정한 에센스다. 너는 순간 눈이 밝아진다. 네 눈은 두 개가 아니라 네 개가 된다. 아니, 여섯 개, 여덟 개, 열 개.... 많은 눈을 달고 너는 숨이 막히게 달린다. 어디로? 컴퓨터 앞으로. 너는 컴퓨터를 켠다. ‘오빠한테만 보여줄 거양~’라는 글귀가 너를 사정없이 당긴다. 클릭. 캥캥 인지 앵앵 인지 모를 소리들이 몸을 달고 네게 달려든다. 너는 떠억 벌어진 체구로 그 소리들을 끌어안는다. 이때처럼 인정이 팍팍 생기는 적도 드물다. 너는 태평양 인도양을 합친 것보다 더 넓어진 몸과 마음으로 그 묘한 소리를 안고 뒹군다. 네가 뒹구는 곳은 지중해 어느 섬의 모래사장이다. 야자수가 너른 이파리를 해풍에 휘휘 날린다. ‘오빠한테만’이 모래사장에서 일어나더니 나 잡아봐라 하고 뛴다. 너는 ‘오빠한테만’을 잡으려 가제트 형사처럼 두 팔을 쭉쭉 늘여 뻗으며 뜀박질을 한다. ‘오빠한테만’이 그 유명한 S라인을 야자수 뒤로 숨긴다. 너는 야자수로 뒤로 달려간다. ‘오빠한테만’이 메롱! 하더니 야자수를 끼고 앞 쪽으로 도망간다. 야자수를 사이에 두고 지구상에 단 둘이 된 너와 ‘오빠한테만’은 잡을똥말똥, 잡힐똥말똥, 약을 올리다 말다 한다. 그러길 한참. 조금 더 하면 오빠가 삐질지도 모르므로 ‘오빠한테만’이 까꿍! 하고 손가락을 브이자로 펴 보인다. 너는 각본대로 ‘오빠한테만’을 잡아 바닥에 쓰러뜨린다. ‘오빠한테만’이 S라인을 팔딱팔딱 뒤튼다. 너는 S라인을 몰씬몰씬 누르다 진력이 나면 내려가다 하면서, 쪽쪽거리기도 하고 짭짭거리기도 하고 별별 짓을 다 한다. 네겐 갑자기 많은 눈이 생겼으므로,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눈이 달렸으므로, ‘오빠한테만’이 뭘 어떻게 하는지, 일일이, 섬세하게, 예리하게, 몽땅 다 보인다. 그러다, 그러다.... 넌 ‘오빠한테만’의 귓불 뒤, 머리칼로 가려진 부분에서 ♡ 문신을 본다. ♡ 이게 뭐지? 귀걸이인가 귓밥인가? 에이 눈이 많으니까 성가시군. 너는 눈을 감는다. 아니, 절로 감긴다.

다시 현실이다. 네 손은 갈색9번의 엉덩이 바로 위에서 멈춘 채 그대로다. 이래서 사색이 길면 곤란하다. 갈색9번이 15% 코맹맹이의 목소리로, 힘들면 쉬엄쉬엄해도 좋다고 말한다. 너는 25% 코맹맹이를 받아주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천만에요, 제가 잠시 쉬는 건 힘들어서가 아니라 사모님을 생각해섭니다. 사모님처럼 일해본 적이 없는 분이 한꺼번에 안마를 받으시면 피곤해지십니다.”

임기응변이 제법이다. 너는 이럴 때의 네가 그 어느 때의 너보다 맘에 든다. 깜찍하지, 똑똑하지, 센스 있지, 순발력 좋지, 이만한 인물을 찾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갈색9번 역시 이런 네게 반했는지 너를 더욱더 고품격으로 격상시키는, 손님이라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한다.

“선글라스가 잘 어울려.”

이 정도 쯤이야. 국어대사전에 적혀있는 말의 분량만큼이나 들어온 터라 새삼스러울 건 없다. 그렇다고 냉큼, 그렇다 말다요, 할 너도 아니다. 다른 때 같으면 그 말을 안 해 줬다간 지옥의 사자가 수갑을 쩔렁거리며 KTX를 타고 올 것이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상대가 상대인지라 너는 눈칫밥 9단의 경력을 발휘한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는 것은 물론, 겸손까지 제사상 앞에 돗자리 펴듯 좌르륵 펼친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소경한테 선글라스라니요.”

솔직히 말하자. 같은 색안경이라도 눈이 있는 사람이 쓰면 선글라스가 되고 소경이 쓰면 색안경이 된다. 그렇다면 눈도 없는 네가 굳이 선글라스용 색안경을 쓰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멋이 있는지 없는지 볼 수도 없는 처지에, 거기다 여름이면 줄줄 흘러내리지, 겨울이면 땡땡 얼어붙지, 그런 안경이 뭐가 좋다고 쓰고 다니는가. 고민할 건 없다. 답은 이미 2000년하고도 395년 전에 나와 있으니, 나온 답대로 말하면 너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보는 사람들을 위해 선글라스용 색안경을 쓴다. 이를 숙명이라고 한다면 너는 숙명이다. 선글라스용 색안경은 이러한 너를 커버해주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오버하게도 만든다.

“배우해도 되겠어.”

배우라.... 너는 시차를 초월해 배우가 된다. 까만 안경을 쓰고 너는 척척 패를 돌린다. 네 주변엔 너와 같은 종류의 안경을 쓴 선수들이 진을 치고 패를 훑어본다. 너는 잽싸게 다른 사람들의 패를 읽는다. 화투 뒷면에 보이지 않게 마킹된 것이 너의 까만 안경에 잡힌다. 너는 의뭉스레 똥껍데기를 낸다. 뻑뻑 담배를 빨던 선수가 똥을 친다. 너의 설계대로 여지없이 설사를 한다. 오른쪽 검지가 잘린 선수가 삼광을 치고 또 설사를 한다. 너는 똥을 먹고 패를 깐다. 오우, 삼이 나온다. 너는 설사한 것들을 싹쓸이하며 상대방의 피를 한 장씩 뺏어온다. 고우! 고우! 너는 큰소리로 선수들을 제압한다. 선수들이 경탄과 질투로 넋을 잃는다. 너는 점 10만 원짜리 고스톱에서 의기양양, 타짜가 된다. 너는 신선한 웃음을 날리며 돈이 든 포대자루를 어깨에 걸머진다. 선수들이 까만 안경을 와락 벗더니 네 앞을 가로막는다. 장님새끼가 맞는지 보자. 선수들이 달려들어 네 안경을 벗기고 네 눈을 들여다본다. 질기게 감긴 눈은 네가 소경임을 증명해 보인다. 어라? 진짜 장님이네. 근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선수들이 자신의 까만 안경을 벗어 발로 콱 밟아버린다. 잘 깼다. 너는 깨진 안경을 저걱저걱 밟으며 무궁화 다섯 개가 반짝반짝 구릿빛을 반사하는 호텔로 돌아온다. 컷! 잘 했어! 감독의 외침에도 너는 배우용 웃음을 그치지 못한 채 길게, 아주 길게 끈다.

갈색9번이 옆으로 돌아눕는다. 타짜의 꿈이 아작 난다. 너는 백 번을 꿔도 또 꾸고 싶은 장밋빛 스크린을 접고 갈색9번의 허리를 잡는다.

“배우라니요. 장님이 배우 하면 그 영화사 망합니다.”

현실은 이래서 잔혹하다. 환장하게 의젓하기만 한 말로 너는 잔혹한 현실에 반쯤 포복한다. 꿈에서처럼 기분 나는 대로 깝쭉거렸다간 그길로 퇴출이요, 담요를 준비할 새도 없이 칼바람을 맞는다.

갈색9번은 인생을 달관하려는 너의 자세와는 달리 여유만만으로 말의 방향을 튼다.

“돈 잘 버나봐. 태그호이어 선글라스에 태그호이어 시계, 짝퉁 아닌 거 알아.”

명품은 명품을 알아보고 귀족은 귀족을 알아본다. 그래서 너는 땡빚을 얻어 명품을 구입한다. 대를 이어도 갚을까 말까한 액수지만 이럴 때의 보람은 천천만만이다. 행여, 장님이 뭘 안다고 명품이냐고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오산이다. 장님이기에 아니, 장님일수록 시설비에 투자해야 한다는 건 초등학교 교과서 첫 장에 나와야 할 지침이다. 자신을 재테크하는 것이야말로 자산 중의 자산이며 실속 중의 실속이다. 이런 이치를 일찌감치 깨달아 너는 언니야에게 일수 도장까지 찍어가며 명품을 사들인다. 너의 노력은 가상하다. 눈물 없이는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노력이기에 천지가 진동할 만큼 사모님들이 혹한다.

너는 이 기회를 계속 차고 나가기로 한다. 헌데, 이 작업은 민감성이 생명이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궁상을 다발로 떠안고 쪽박을 찰 수도 있고, 잘만 하면 일수돈 갚는 것은 심심풀이 육담이 될 수도 있다. 너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살짝 포석을 깐다.

“돈을 잘 벌다니요, 게다가 저 같은 게 뭘 알아서 이런 걸 살 수 있겠습니까. 안마 받으신 어느 사모님이 고맙다며 선물해 준 겁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엔 이런 말이 있다. 옷 잘 입은 거지가 얻어먹기도 잘 한다는 말. 지금의 너는 비록 거지는 아니지만 그 말에 빗댄 심정이다. 과연 전설인지 교훈인지 모를 그 말이 실효를 거둘 것인지 아닌지 너는 예의 주시한다. 너로선 신세를 흥하게 할 것인지 망하게 할 것인지 모를 밑밥을 던졌으나 갈색9번은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으아, 미친다. 쪽박을 깨겠다는 건지 알았으니 그 사모님보다 더 큰 걸 사주겠다는 건지, 바야흐로 너는 초조해진다. 시간은 마실이라도 갔는지 딱 멈춰버리고 네 겨드랑이와 이마, 발바닥에선 침묵의 시간의 두세 드럼쯤 되는 양의 땀이 폭폭 솟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것은 신만이 안다.

 

 

그 긴긴 동안 너의 잔머리는 어디로 진화했을까. 잔머리가 초음속으로 달리고 달려 도착한 곳엔 산천초목 대신, 오아시스 대신, 그보다 더 좋은 살이 있었다. 살의 고백이라고, 너는 일찌감치 터득한 고백 중의 백미가 떠오른다. 갈색9번의 허리는 뻣뻣했고 그 굳은 근육에서 너는 갈색9번의 비밀을 알아챈다. 골프와 헬스로 다져지긴 했지만 쾌락으로 다져진 허리는 아니다. 너는 이 슬픈 허리에 순간 동정심이 인다. 그렇다고 덥석덥석 아는 척을 했다간 명품 선물 사건에서처럼 침묵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거기다 재수 없으면 자존심 박살죄, 사모님 모욕죄로 고소당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특히 살의 고백은 더욱 더 때를 타야하는 법. 사모님 쪽에서 다리 긁는 소리라도 내야 눈 껌뻑이는 시늉이라도 낼 수 있는 것이다.

너는 손바닥으로 갈색9번의 허리를 야물게 주무른다. 네 손은 하나의 끈처럼 갈색9번의 살과 연결된다. 이럴 때 이성은 어떨지 몰라도 감성만큼은 동지가 된다. 너 따로 나 따로 각개전투를 벌이는 게 아니라 너와 내가 합동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나가 돼서 좋은 건 많다. 첫째는 싸울 일이 없다. 둘째는 이것일까 저것일까 갈등하지 않아도 된다. 셋째는 싸움도 갈등도 없으니 하는 것마다 신속하다. 안 싸워서 좋아, 시간 절약해서 좋아, 좋은 것투성이다. 그래서 모두가 다 통일, 통일, 외치는가보다. 비록 개성은 살릴 수 없을지언정 이만한 프리패스도 없다. 그러나 갈색9번은 네 손길을 제대로 타지 않았는지 살의 고백은커녕 뚱딴지같은 말만 한다.

“눈은 언제 그렇게 됐어?”

너를 보는 이들이 공통으로 궁금해 하는 점이자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말이다. 이는 교양 때문이다. 이럴 때의 교양은 네겐 별 쓸모가 없다. 너는 눈이 멀었다고 좌절하거나 비통해한 적이 없다.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닫혀있었으니,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네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 없는 것과 백날 씨름을 해 봐야 그거야말로 시간 낭비다. 너는 애초 빛이 없으므로 없는 것으로 자연스레 산다. 그래 그런지 너는 깨달은 게 많다. 세상 사람들은 쓸 데 없는 것이라도 소유하길 원한다. 고로 너는 세상과 합류하기 위해 하나라도 가지고 있는 쪽을, 없으면 있는 척이라도 하는 쪽을 택한다. 하여, 너는 늘 준비한 대본을 화끈하고도 깔끔하게 읊는다.

“대학 2학년 때 화학실험을 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덕분에 군 면제도 받고 좀 좋습니까? 허허.”

대답이 걸작이다.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이력에 들은풍월을 써먹다니, 게다가 군 면제라 좋다구나 허풍까지 떨다니, 듣는 사람 듣는 부담까지 팍 줄여준다. 너의 화려하고도 유려한 답에 갈색9번이 피식 소리 나지 않게 웃는다.

“유머가 좋군. 한창 나이에 눈을 잃었으니 충격이 컸겠어.”

갈색9번이 옆으로 누웠던 자세를 바꿔 똑바로 눕는다. 너는 살의 고백을 듣기 위해 슬슬 장딴지로 간다. 여긴 조심스런 곳이다. 그저 장딴지가 아니라 배와 연결된 허벅지로, 포르노라 찍힐 수도 있는 미묘한 곳이다. 너는 될 수 있으면 건조하게, 사무적인 손길로 갈색9번의 장딴지를 주무른다. 살의 화음을 듣기 위한 테크닉으로는 빵점이나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아무리 무미건조하게 주무른다 해도 장딴지에 포진하고 있는 몽실몽실한 욕구는 그 누구도 거역하기 힘들다. 오히려 냉담한 듯이 주무를수록 감질나게 마련이다. 감질을 감질로 느끼다보면 사인을 하게 되고, 그 순간을 잡아채면 어느 순간부턴 흐흥흐흥 콧바람이 봄바람으로 살랑거리게 된다. 너는 그 때를 노리며, 다른 한편으론 그 쏠쏠한 재미를 넘겨 짚어가며, 젠틀한 프로로 나간다.

“첨엔 그랬는데 나중엔 잘 됐다 싶더군요. 어차피 질리게 본 세상, 더 볼 게 뭐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도를 한 번 반쯤 깨친 자의 말인가 염세주의자의 말인가. 아니면 신비주의자의 말? 갈색9번이 이번엔 피식이 아니라 뱀의 미소를 휘릭 던진다.

“그래서?”

허걱, 졸지에 너는 뒤통수가 뜨끈해진다. 갈색9번은 아줌마가 아니라 사모님이시다. 그것도 강남 사모님이시다. 강남 사모님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돈만 있다고 강남 사모님이 되는 게 아니다. 너는 이 야유 섞인 기습에 어휘법을 바꿀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그러니까 제 말은 소경이 된 저 자신을 빨리 인정하고 한시바삐 눈 먼 것에 적응하고 싶었다는 얘깁니다.“

꼴깍, 마른침이 넘어가다 걸린다. 건실성, 진실성, 침착성이 시험대 위에서 결과를 기다린다. 에라 모르겠다. 너는 급한 마음에 손맛을 이용하기로 한다. 이 손맛이라는 것은 살과 살이 맞닿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금단현상까지 갈 수 있는, 길들여지면 벗어나기 힘든 마력의 것이다. 너는 손맛을 주는 요리사로 갈색9번의 허벅지 안쪽을 파고든다. 미열과도 같은 열이 가운 밖으로 스며 나온다. 네 손은 뜨거워지고 네 마음은 결과를 향해 짝사랑으로 달뜬다. 짝사랑은 그래서 짝사랑이라고 차갑게 일러준다.

“잘난 친구군.”

아아아〜 아, 아, 아.

그동안 기출문제로 백점만점을 받았던 시기는 먼 옛날 얘기다. 이렇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걸로 봐 너의 시대는 한물갔다는 신호다. 너는 입을 다문다. 섣부른 말은 해충이 되어 너를 갉아먹을지도 모르고, 카멜레온의 혓바닥이 되어 날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인생의 미식가이며 탐미주의자가 사모님께 욕을 당한다. 전문인의 명예가 추락당하고 발언의 자유가 바닥나게 밑진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지. 너는 길게, 마음에 욕창이 생길 정도로 길게 엎어졌던 네게 편자를 꽝꽝 박는다.

“주제넘은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모님은 매력이 철철 넘치십니다. 몸도 그렇지만 말씀하시는 게 아주 매력적이십니다.”

말 한 마디에 천 냥이나 되는 빚을 갚았다는 말은 사실인가 아닌가? 확인할 길은 바로 지금. 너는 건방지다, 시건방지다, 꼴깝을 떤다, 이런 따위의 부정을 싹 갈아엎을, 싱싱하고도 통통한 말의 씨를 뿌렸다. 자, 기다려보자. 씨앗은 좋은 토양을 만나면 속성으로 자랄 것이고 열매 또한 탐스럽게 주렁주렁 맺을 것이다. 그런 열매를 따 로또를 사면 대박일 것이요, 그 대박으로 해외 부동산에 투자를 하면 그 또한 대박일 것이요, 그 대박으로 작은 나라를 사면 역시나 대박일 것이다. 너는 작은 나라의 왕이 되어 신하와 시녀가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왕궁에서 명령을 내린다. 저 같잖은 사모님을 시베리아로 보내 정신이 번쩍 들게 석탄을 캐게 하라! 예이〜 보내기 전에 저 돼먹지 못한 사모님의 혀를 싹 뽑아버려라! 예이〜 커, 좋다. 왕은 이래서 좋은 것이로구나.

“그래애? 그렇다는 얘기 자주 들어.”

크하, 역사적인 너의 꿈은 알알이, 산산이, 부서진다. 너는 하릴없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를 부를 일만 남는다. 대체 이 사모님은 왜 이런가. 무엇이 문제인가. 너는 모처럼 번민에 빠진다. 이 번민이라는 건 도무지 달갑지가 않다. 일단은 이것이라는 답도 주지 않으면서 이것일까 저것일까 혼란만 가중시킨다. 차라리 게다짝를 딸깍딸깍 끌고 달리기 주자로 나서는 편이 훨씬 낫다. 너는 번민하기를 때려치운다. 비생산적인 생각에 골몰할 시간이 있으면 사모님 후릴 방법을 모색하는 게 발전적이다. 너는 이렇게 결정했음에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다. 말을 찾지 못하자 네 손은 저절로 무릎 뒤쪽으로 간다. 오금 한 가운데, 옴폭한 곳이 손에 잡힌다. 여긴 급소다. 급소만큼 멋들어진 곳도 드물다. 인생의 참맛은 바로 이런 급소에 있다. 마른하늘에도 날벼락이며 여우비가 숨어있듯, 멀쩡한 몸에도 급소라는 게 숨어있다. 성질나는 대로 하면 당장이라도 혈을 잡아버리고 싶지만 너는 슬쩍 지나치는 걸로 너를 다스린다.

“꿈이 뭐지?”

인색을 인색으로 떨던 갈색9번이 어째 꿈 얘길 다 한다. 밉살스럽기로 치면 시베리아도 아깝고 혀를 뽑는 것도 과분한데, 요상하게도 황송해진다. 아무튼 반갑다. 너는 까칠한 분위기를 일소시킬 이 한마디에 감격한다. 이것만 봐도 너는 너만 모르는, 아주 어수룩한 아마추어다.

“꿈이라니요 희망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너는 종종 꿈을 꾼다. 네 꿈은 검게 덩어리진 물체가 여기를 툭 치다 저기를 툭 치는 게 전부다. 형체를 본 적이 없으니 꿈에서조차 형체가 없는 건 당연하다. 너는 꿈속에서 꿈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네 꿈엔 창이 없다. 창이 없으니 창 밖도 없다. 너는 창이 없는 욕망에 갇혀 깨어나지 못한다. 깨지 못하니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오지도 못한다. 아하, 너는 욕망의 덩어리를 안고 끙끙댈 따름이구나.

“글쎄요. 일감이나 떨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너는 결코 유창하다 할 수 없는 말을 상식적으로 한다. 이제 일감 따위에 연연해하는 너는 아니다. 안마라는 본업으로 상승을 꿈꾸었던 때도 까마득하다. 지금의 너는 일수를 찍어가며 뒷돈을 대고 시설비에 투자할 만큼 안마가 아닌 다른 일을 꿈꾼다. 프리미엄이 붙은 너를, 너 자체가 프리미엄인 너를 원한다. 너는 소박한 네가 끔찍하게 싫어졌으며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네게 있어 수단과 방법이란, 가려가며 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리지 말고 하라는 잠언이다. 갈색9번은 이런 네 속을 훤히 보고 있다는 듯, 관록이 만만찮은 어투로 말한다.

“일감? 내 앞에서 지금 일감 타령하는 거야?”

뜨끔, 너는 너보다 잘난 인간 앞에서 쩔쩔맨다. 세상은 그렇다. 나만 보고 있으면 나만 보이고, 너만 보고 있으면 너만 보인다. 너는 죽어라 너만 보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너로 보여 지는 너를 위해, 너는 지팡이도 버렸다. 톡톡, 보도블록을 두드리며 길을 찾는 그 지팡이 소리야말로 인생이 미숙하다는 광고이자 인격마저 구기는 소리다. 너는 절대 지팡이로 다니지 않으며, 색안경 역시 맹인용 색안경이 아닌 선글라스용을 쓴다. 헌데 갈색9번은 너보다 한참이나 위인 듯 선배의 선배인 듯, 군더더기를 생략한다. 이런 대선배 앞에선 그저 마음을 조아리고 앞섶을 여미는 게 제대로 된 자세다.

“아, 예, 일감 빼면.... 운전하는 겁니다. 결혼도 하고 운전도 하고 근사하게 살아보는 겁니다.”

안 보이는 자가 못할 건 없다. 너는 핸들을 잡고 씽씽 쌩쌩 고속도로를 달린다. 옆 차선을 달리던 아가씨가 네 운전 솜씨에 침을 흘린다. 너는 휴게소에 차를 세운다. 옆 차선의 아가씨가 네 차 옆에 주차하려는데 몹시도 버벅거린다. 너는 차에서 내려 도도한 걸음걸이로 휴게소로 간다. 아가씨가 너를 불러 주차 좀 도와달라고 말한다. 너는 사내다움을 과시하며 단번에 아가씨의 차를 주차해준다. 아가씨가 홀딱 반한 낯빛으로 네 뒤를 쫑쫑쫑 쫓아온다. 너는 아가씨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휴게소로 들어가 메뉴를 훑어본다. 아가씨는 주차해 줘 고맙다며 네게 밥을 산다. 너는 아가씨와 마주앉아 밥을 먹는다. 아가씨가 이것도 인연이라며 명함을 건넨다. 모 방송사 사회부 기자 김 아무개. 머시 기자라고라? 아가씨가 너의 놀란 가슴에 다시 한 번 부채질한다. 미담사례를 취재하러 가던 중인데 잘 됐네요. 댁을 쌩초보 운전자의 차에 치일 뻔한 장애인을 구한 사람이라고 기사를 쓰고 싶은데 안 될까요? 안 될 것도 없지. 너는 사회면 톱기사로 장식되고 더불어 여기저기 강연에도 나가고 광고모델도 된다. 그런 인연이 덕이 되어 너는 아가씨와 결혼을 하고 보건복지부 장관이 된다. 장관이 된 너는 겨울이면 멋과 분위기의 총체 야간 스키를 타러가고, 여름이면 스킨스쿠버를 하러 간다. 설원은 너를 눈의 신으로 받들고, 물은 물의 신으로 너를 추앙한다. 너는 그 속을 날아다니며 소설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연주도 한다. 너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전 세계로 번역되고, 너의 그림은 박수근이나 이중섭보다 더 많은 위작을 만들어 내게 하고, 너의 연주는 오이스트라흐보다 뛰어나 모든 신들이 기립 박수를 친다. 너는 장하고 또 장한 인물이 되어 브리태니커 사전에 오른다. 오르려는 바로 그 찰나, 와장창 판 깨는 소리가 난다.

“꿈도 좋지만 운전? 맹인전용도로도 없고 맹인용 자동차도 없는데 너무 추상적이지 않아? 좀더 구체적인 거 없어?”

화다닥, 너는 말의 물벼락을 맞고 정신을 차린다. 꿈은 희망의 문패지만 현실성 없는 꿈은 꿈이 아니란다. 너는 노골적으로 나가기 전, 워밍업 차원에서 한편의 서정시를 읊은 것뿐인데 갈색9번은 너무하다. 아마도 갈색9번의 컬러는 서정시가 아닌 생활시였던 모양이다. 아니, 시가 아니라 기계였던가 보다. 치수에 맞게 자르고 찍어내고 납품하는 기계. 그제야 너는 안심하고 너를 출고하기로 한다.

“구체적인 게 왜 없겠습니까. 부동산으로 한몫 잡는 것이지요.”

월급쟁이가 무슨 수로 집 한 채 마련하냐, 평생 저축해봐야 전세금 조달하기도 벅차다, 재개발 아파트를 잡으려 해도 얼마간의 종자돈이라도 있어 한다.... 이런 말은 결국 부익부빈익빈을 압축한 말이다. 수많은 경제원칙을 제치고 항상 일위를 고수하는 생활의 경제 언어는 바로 이 부익부빈익빈이다. 그 요원한 성은 가시덤불에 덮여있지도 않고 철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정복하기는커녕 쉽게 넘볼 수조차 없다. 이것이 미스터리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미스터리다. 너는 그 미스터리를, 피라미드와도 같은 그 미스터리를 깨는 첫 번째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럼 구체적인 방법도 가지고 있겠군?”

네 답은 사모님을 확실하게 동요시킨 듯이 보인다. 지금으로선 그렇다. 그러나 너는 지금 너무 들뜬 나머지 다른 면을 간과한다. 즉, ‘그럼 구체적인 방법도 가지고 있겠군?’에서의 ‘군?’은 그저 마침표로 끝나는 ‘군.’과는 다르다. 어디 들어보자는 듯이, 네 따위가 뭘 알아서 사모님도 난공불락으로 여기는 부동산에 얼쩡거리나 내심 뒤틀린 표현이다. 헌데 너는 아직 그 행간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다만, 무슨 말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야 할 것인지 똥마려운 강아지 꼴이 된다. 사모님을 꼬셔서 놀리는 땅 한 뙈기라도 얻어 볼까 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고, 그저 친구의 얘기로 떠넘긴다.

“제 친구가, 그러니까 맹인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군 안마를 해주면서 어느 사모님을 알게 됐습니다. 그 사모님은 그 친구에게 노는 땅 100평을 줄 테니 그걸 밑천 삼아 빌딩을 사보라고 했더랍니다. 그 친군 그 땅을 조각조각 쪼개 팔아 웃돈을 얹어 팔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돈으로 경매 난 부동산을 사들여 톡톡히 재미도 보았습니다. 그 사모님이 실험삼아 던진 말에 그 친군 진짜 빌딩 갑부가 된 겁니다. 지금 그 친군 돈을 세느라 지문이 닳아 돈 세는 기계를 사들였답니다. 그 친구, 수완도 좋았지만 그런 사모님을 만난 게 운이 좋았던 겁니다.”

너는 사뭇 진지하다. 그러나 갈색9번은 너의 장황한 공상소설에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속이 시원하다 못해 시릴 정도의 결재를 썩썩 해치운다.

“흐흠, 그 얘긴 친구 얘기가 아니라 군의 얘기 아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어떻든 좋은 생각이군. 군이 원한다면 100평이 아니라 1000평도 줄 수 있어. 내가 누군지 알아? 안마나 잘 해.”

오오, 달링! 달링! 결국 최종 목적은 살이었다. 그 단순한 사실을 어쩌자고 이제야 알아챘는지, 어쩌자고 그 많은 사람 중에, 그 많은 꿈 중에, 갈색9번과 네가 이렇게 맞아떨어지는지, 인생은 불가사의하다.

너는 사력을 다해 갈색9번의 엉덩이로 돌진한다. 갈색9번의 엉덩이를 주무르면 주무를수록 너는 그 예쁜 엉덩이에 숨이 넘어간다. 숨이 넘어가지 않음 어쩔 것인가. 부동산이 들어있고 글래머 아가씨와 보건복지부장관과 왕의 왕이 들어있는데, 호 불면 날아갈세라 후 불면 깨질세라 어여쁘게 어루만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알아 모시는 건데 공연히 매너 차린답시고 뜸만 들인 게 아깝다. 생각해 보면 딱히 아깝기만 한 건 아니다. 모름지기 모든 일엔 순서가 있고 기초공사가 있다. 터전을 닦아놓지도 않은 채 천방지축 날뛰기만 한다면 그거야말로 날림공사다. 적어도 너는 날림공사를 강행하는 강심장은 아니다. 성실과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아주 진중하고 과묵한 사람이다. 너는 새삼 네게 뿌듯해진다. 이 사모님을 양어머니로 삼아 말아? 애인으로 삼아 말아? 양어머니도 좋고 애인도 좋다. 수륙양용에 전천후에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듯, 무엇이든 많을수록 좋다. 그제야 너는 세상 사람들을 가슴 깊이 이해한다. 더불어 고소하고 넉넉해진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악까지도 포용하기로 한다. 오, 세상은 아름다워라.

크하, 크하, 너는 신바람 나는 손길로 갈색9번의 몸 구석구석을 주무른다. 드디어 배다. 갈색9번의 배는 출렁출렁 넓기도 넓다. 타이타닉과 퀸엘리자베스와 엔터프라이즈가 종횡무진 들락거려도 끄떡없을 정도다. 너는 두 손으로 넓고 넓은 갈색9번의 배를 훑는다. 공손히, 아주 공손히. 공손히 배만 훑다보니 심심해진 탓일까. 느닷없이 갈색9번의 뱃속엔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해진다. 삼계탕? 뱀탕? 비아그라 먹은 웅담? 그 웅담을 먹은 초나라의 우 여인이 투실투실해진 얼굴로 영특해진 온달에게 아양을 떤다. 온달이 다국적기업을 거느리겠다고 기염을 토하자, 양귀비가 아편을 빡빡 피며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를 리메이크로 부른다. 이에 우 여인이 운동장만큼이나 넓은 배로 양귀비를 납작 깔아뭉갠다. 온달은 박수를 치며 버버리 코트 주머니에서 태그호이어 선글라스를 꺼내 쓴다. 우 여인이 씩씩거리며 일어나 신권을 빡빡하게 넣은 MCM블랙 비세토스 지갑을 온달에게 쥐어준다. 그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지라, 우 여인은 하녀들에게 손짓하며 지시한다. 얘들아, 이 양반에게 얼음 동동 띄운 식혜 한 사발 갖다 드리고 저 화초장에 있는 땅문서 좀 꺼내 와라.

“핸드백 가져와봐. 조기 옷걸이에 걸어 논 거.”

이크, 겁나라. 갈색9번은 잠망경과 현미경과 천체망원경을 동원한 것일까. 어쩌면 접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기쁘다.

“옙!”

너는 씩씩하게 일어나 날개 걸음으로 옷걸이로 간다. 네 손에 잡힌 악어핸드백의 감촉, 질감 한번 끝내준다. 너는 악어핸드백을 갈색9번에게 건넨다. 공손히, 아주 공손히. 갈색9번이 딸깍, 핸드백을 연다. 이렇게 고혹적인 소리는 듣다듣다 첨이다. 살이 내는 소리도 좋긴 하나 이 딸깍 소리에 비하면 소음이다. 너는 귀를 쫑긋, 오감을 동원한다.

“이게 요즘 한창 뜨는 서해안 땅이 들어있는 문서야.”

“예에〜”

너는 침이 질질 흐르는 목소리로 납죽 긴다. 그토록 갖고 싶던 땅이 저 종이쪽지에 들어있단다. 갈색9번은 벌써 이분의 일쯤 너의 은인이 된 셈이니 나머지 이분의 일마저 은인이 되어 준다면 땅, 땅, 땅, 땅은 너의 것이 될 것이며, 땅땅거리며 떵떵거리며 사는 건 시간문제다. 헌데 어쩐 일인지 부스럭부스럭 종이 접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딸깍, 핸드백 닫는 소리가 난다. 너는 두 번째 나는 딸깍, 소리에 그만 졸도하고 싶어진다. 이걸로 끝이란 말인가. 도장을 찍으라는 소리는 나지 않고 충고인지 조언인지 모를 소리만 난다.

“잘 해봐. 다 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있잖아?”

아, 이럴 수가. 그제야 너는 너를 깨닫는다. 너는 너무 공손했다. 갈색9번이 살을 고백할 수 없을 정도로, 살을 고백하면 고백하는 자신이 부끄럼을 탈 정도로, 너는 너무 예의가 발랐다. 시설비를 투자한 것도 까맣게 잊고 그저 몽상 만화나 그리고 있었으니, 너는 손톱이라도 물어뜯어가며 십 박 십일일쯤 반성해야 한다.

영차, 영차, 너는 있는 재주 없는 재주를 동원해 갈색9번의 성으로 진격한다. 이번엔 가슴이다. 뭉실 솟은 가슴은 엉덩이를 축소시킨 것과 진배없다. 너는 한때는 뜨거웠을 갈색9번의 가슴에 몰입한다. 드디어 살의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갈색9번이 원했던 건 바로 이 소리다. 몸의 모든 관을 타고 마치 트림처럼 나오는 소리에 갈색9번은 도취한다. 마침내 갈색9번이 살갗을 쓰다듬는 듯한 목소리로 옷걸이 쪽을 가리킨다.

“핸....드.....백.... 핸....드....백....”

아, 핸드백! 그 기름진 땅이, 높고 높은 빌딩이, 저 쬐끄만한 핸드백에 들어있다는구나. 너는 종이보다 가볍게 일어나 비행기보다 빠르게 핸드백을 가져온다. 딸깍, 핸드백 여는 소리가 짤랑짤랑 네 귀를 꼬집는다. 세상엔 이렇게 사랑스런 소리도 있다. 이런 소리를 몰라보는 사람이야말로 장님이며 귀머거리다. 너는 땅과 빌딩이 나 여기 있어요, 어서 날 좀 차지해줘요, 애걸복걸하는 소리를 들으며 갈색9번의 말씀을 경청한다.

“이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이 땅은 군의 땅이 되는 거야. 오케이?”

부르르 떨리는 몸. 서운했던 마음은 언제 그랬냐싶게 네게 등을 돌린다. 너는 부르릉 부르릉 시동이 걸린 차로 진정, 진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너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이며 갈색9번의 허벅지 깊은 곳, 치골과 미골근으로 들어간다. 갈색9번은 거칠어진 너를 내치지도 제지하지도 않는다. 너는 이미 걸린 시동을 기점으로 빠르게 출발한다. 좌회전과 우회전, 유턴과 후진을 반복하지만 정차나 주차는 하지 않는다. 그저 땀에 땀을 흘리며 주행에만 전념한다. 갈색9번이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와 같은 소리를 내뱉는다.

“으-음- 조오아, 딱이야. 난 그깟 태그호이어 따위로 장난치진 않아.”

움찔, 너는 많이 놀란다. 거칠다는 것과 터프하다는 것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음에 놀라고, 태그호이어 따위로 장난치지 않겠다는, 헌법에 버금가는 소리에 놀란다. 세상이 이렇게 긍정적이기만 하다면 밥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 애정의 삼각관계니 불륜이니 떠들어대지 않아도 된다. 주행의 목적은 이렇듯 달리고 달리는 가운데 목적지와의 거리를 좁힌다. 목적지에 닿기만 해봐라. 너는 열심히 주행에 너를 바친다.

“으-으-으음 핸....드....백....”

이번에야말로 진짜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주행을 했으니 보상을 바란다고 죄가 되진 않을 것이다. 너는 토끼 귀보다 더 길어진 귀를 얼른 접고 물 찬 제비로 핸드백을 가져온다. 딸깍, 그리고 부스럭부스럭.

“이 땅 말인데, 눈독 들이는 자들이 어찌나 많은지. 구매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스물다섯 배나 뛰었어. 앞으로 이백오십 배 뛰는 건 식은죽 먹기야. 군이 끝까지 나를 감동시킨다면 이까짓 거야 껌 값이지. 내가 누군지 안다면.”

그걸로 끝. 갈색9번은 다시 딸깍, 땅문서를 핸드백에다 넣는다. 보아하니 뜸을 들이다 못해 두껍게 누룽지가 앉을 때까지 갈 참인 듯하나 그렇다고 실망할 너도 아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있을 것이고 그때 가서 빡빡 긁어먹어도 늦지는 않다. 더욱이 주행을 마치지도 않았으니 감동시킬 과제가 남아있는데다, 주행 끝에 느긋하게 긁어먹는 것 또한 별미 중의 산 별미가 될 것이다.

너는 다시 살을 리드하러 간다. 갈색9번의 턱을 거쳐 뒷목에 이르자 너는 미리부터 후끈 달아오른다. 뒷머리에서 뒷목으로 넘어가는 바로 그 경계는 급소이자 황홀경에 이르는 부분이다. 그 부분을 짧고 세게 누르면 정신은 잃고 몸은 가볍게 뜬다. 오르가즘과는 다르나 오르가즘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전신이 강하고 몽롱하게 취하게 된다. 너는 잠시 망설인다. 몸을 감동시키는 부분이야 얼마든지 알지만 이 부분은 아무래도 생략하는 게 좋다. 정석대로, 너는 꾸준하게 고속도로를 달려 막다른 골목에 주차한다. 갈색9번이 괴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더니 씩씩 쌕쌕 숨을 몰아쉰다. 너의 주행은 성공이다. 이제 너는 너의 희망, 곧 딸깍에 숨이 딸깍 넘어갈 차례다. 서서히 갈색9번의 숨이 잦아든다. 숨이 잦아들어 숨소리도 나지 않을 즈음까지 기다려보지만 핸드백 가져오라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할 수 없다. 너는 인류가 갖고 있는 모든 참을성을 소집해 립 서비스로 마무리를 한다.

“사모님은 신체 나이가 소녀이십니다. 제가 부족한 점이 많아 사모님을 잘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갈색9번은 응 인지 어 인지 모를 대답을 하며 부스스 일어난다. 너는 언제쯤 핸드백 가져오라는 분부가 내릴까 목이 늘어진다. 야속하게도 핸드백 분부는 없고 옷 입는 소리만이 천둥소리로 난다. 이렇게 절망적인 소리도 있을까. 너는 마음을 갈퀴는 소리에 진저리를 치며 갈색9번 앞에 무릎을 탁 꿇는다.

“싸모니임.... ”

너의 콧소리는 가볍지 않다. 듣기에 따라선 처량 맞기도 한데 마지막 연출이니 그럴 만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맞추는 것은 요리의 간을 맞추는 것보다 까다로워, 나노 초를 사이에 두고 애정이 짜증과 분노 혹은 지겨움과 권태로 바뀌는 수가 있다. 마음의 다리란 다족류와도 같이 수없이 많아, 그 많은 다리들이 제 각각 경련을 일으킬 때면 준비할 새도 없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된다. 헌데 부실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허족일지라도 일단 작동하는 그 순간만큼은 실세로 위세를 떨치기도 하니, 가볍게 나와야 할 콧소리마저 무겁게 나온다.

갈색9번이 딸깍, 핸드백을 연다. 덜덜덜. 혼이 떠는 소리가 파동에 파동을 일으킨다. 너는 지문이 닳을 걱정에 눈앞이 흐려지는데 갈색9번은 부스럭부스럭 대신 지갑을 연다.

“수고했어. 근데 감동이 부족했어.”

갈색9번이 지폐 몇 장인가를 방바닥에다 날린다. 뭐가 어째? 감동이 부족? 너는 벌떡 일어나 갈색9번의 앞을 가로막는다.

“감동이 부족했다니요. 저는 희망과 꿈을 몽땅 팔아가며 사모님을 모셨습니다. 돈 몇 푼 받자고 그랬겠습니까.”

너의 말은 처절하다. 희망과 꿈을 팔았을 때보다 처절하다. 그러나 그 처절은 너의 것이지 갈색9번의 것은 아니다.

“왜? 수표라도 기대했나? 웃기는군. 이거 비키지 못해?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갈색9번이 너를 밀친다. 너는 양팔을 벌려 갈색9번의 앞을 막아선다. 갈색9번이 막 간 칼날의 음성으로 여지없이 너를 벤다.

“비키지 않음 어쩔 건데? 어차피 군은 내 아들이 아니야. 내 아들이 아닌데 어찌 감동하겠나? 내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봐. 헌데 군은 대학 때 소경이 됐다며? 난 내가 버린 아들을 찾으면 주려고 땅문서를 가지고 다녀. 이제 좀 감이 잡히나?”

감동은 감동이다. 이만한 감동은 천지간에 날벼락 감동이다. 이럴 때 다큐멘터리 피디는 어딜 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없는 피디 기다리느니 관절염 걸릴 때를 기다리는 게 빠르다. 일순, 너는 기다림을 팽개치고 갈색9번을 와락 얼싸안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으흐흐흑, 어머니! 제가 바로 어머니의 아들이에요. 아까 대학 때 눈이 멀었다고 한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어요. 저야말로 어머니를 찾기 위해 안마를 시작한 거예요. 으흐흑, 어머니! 어머니의 아들을 잘 보세요.”

너는 너의 뺨을 찰싹찰싹 때려가며 너의 얼굴을 갈색9번에게 들이민다. 갈색9번이 너를 떼어내며 생선 비린내 같은 웃음을 흘린다.

“그래? 근데 말이야, 내 아들은 아무나 될 수 없어. 내 아들은 귀까지 먹었거든.”

무슨 말이 이런 말도 있단 말인가. 너는 띵한 머리로 절벽 같은 눈을 갈색9번에게 꽂는다. 환호가 보장될 미래가, 끗발 좋게 펼쳐질 꿈이, 독극물 같은 말에 녹아 흐칠흐칠 풀어진다. 단내 나게 안마하던 손길이 거꾸러지고, 간택당한 자로서 더 없이 간드랑거렸던 때는 있지도 않다.

갈색9번이 너를 밀치며 문 쪽으로 간다. 속았다! 너는 황급히 갈색9번에게로 간다. 갈색9번이 문손잡이를 비튼다. 너는 갈색9번의 뒤로 가서 한 팔로 갈색9번의 목을 휘어 감는다. 갈색9번이 윽, 외마디를 지른다. 너는 갈색9번의 뒷목의 혈을 짧고 강하게 누른다. 갈색9번의 목이 힘없이 푹 꺾인다. 너는 갈색9번이 바닥에 쓰러지는 대로 내버려둔다. 참고 참았던 욕이 목줄을 타고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런 거지발싸개 할망구야! 꿩도 먹고 알도 먹고 깃털마저 뽑아 모자여 외투까지 해 입으시겠다? 나야말로 누군 줄 알고 고따구로 나오시나?”

너는 쓰러져 있는 갈색9번을 홈 패인 눈으로 노려본다. 세상이 싱겁기로 이렇게 억지로 싱거우면 안 된다. 세상이 짜기로 이렇게 주름살투성이로 짜면 안 된다. 이윽고, 너는 갈색9번이 꼭 쥐고 있던 악어핸드백을 낚아채 땅문서를 꺼낸다. 땅문서로 훨훨 부채질을 해가며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미치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이 어찌 이리 귀엽고 어찌 이리 살만 하더냐. 클클클!

 

 

우르르 철썩철썩 쏴아, 우르르 철썩철썩, 쏴아....

아까부터 너는 바닷가에 서서 간 내에 온몸이 찌들어 있다. ‘오빠한테만’이 할끔, 너를 보며 중얼거린다.

“이상하다, 여기가 맞는데.... 오빠, 여기가 오빠 땅 맞아?”

너는 입도 무겁게 고개만 끄덕인다. ‘오빠한테만’이 땅문서를 앞뒤로 넘겨보며 또 중얼거린다.

“번지는 맞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땅이 없어. 바닷물밖엔.”

너는 ‘오빠한테만’이 들고 있던 땅문서를 빼앗아 들여다본다. 질기도록 캄캄한 눈엔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다. ‘오빠한테만’이 쫑알거리며 네 속을 뒤집어놓는다.

“바닷물에다 어떻게 별장 같은 집을 지어?”

너는 땅문서를 와락 구기며 침을 퉤 뱉는다.

“기다려봐. 물이 빠지면 개펄이라도 나올 거 아냐.”

바닷물이 빠지고 개펄이 나오고, 다시 바닷물이 차고 개펄이 나오는 동안, ‘오빠한테만’은 네 팔에 매달려 발을 동동 구르는데, 너는 오빠의 카리스마를 유지하려 무진장 애를 쓴다. 네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도 소리는 야속하게도 우렁차기만 하다. 너는 콧잔등까지 흘러내린 태그호이어를 치켜 올리며, 갈색9번을 작신 두들겨 패는 장면에 눈이 번쩍 뜨인다. ☐

 

 

닉스(Nyx) ;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밤의 여신

 

****** 이 글은 창작집 <<곁눈질>>에는 '닉스에게 로그인'으로 나왔지만 <<창작21>>에 발표할 때는 <너의 풍경>으로 나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