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느낌표

유리벙커 2012. 8. 14. 19:13

누가 그런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람은 있어도 때렸다는 사람은 없다고.

맞는 말이다.

나 역시 뒤통수를 맞았다고 말한 적은 있어도 때렸다고 말한 적은 없다.

이것은 아마 인간의 자기보호본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프랑수아 라블레는 『팡타그뤼엘』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소포스가 ‘교훈담’에서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목에 두 갈래로 갈라진 배낭을 걸고 다니는데, 앞쪽에 달린 주머니에는 나의 잘못과 불행이 들어있어 언제나 우리 눈에 띄어 알 수 있는데 반해서 우리 자신의 잘못과 불행은 뒤쪽에 달린 주머니에 들어 있기 때문에 하늘의 특별한 혜택을 받은 자들이 아니고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고 말한 것은 대단히 현명한 지적이라네”

자, 이쯤 되면 약간의 위로가 되지 않을까.

인간은 자기 방어에 대한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정도로.

 

 

한동안 ‘뒤통수’ 때문에 속앓이를 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데 어째서 그리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한껏 예의를 차리더니

또 몇 시간 후엔 낯빛 하나 바꾸지 않고 언제 봤냐는 식이다.

손익계산이 따랐던 때문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이런 급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으론 나한테 그렇게 대한 사람이 딱하기도 했다.

얼마나 뒤통수를 맞고 살았으면 저렇게 자기 방어에 충실하다 못해 상대를 칠까.

그것도 대단히 싸구려 방식으로.

 

 

말은 이렇게 하나 나는 잠을 설칠 정도로 힘들었다.

앞으로 사람을 어떻게 믿으며 살아야 하나 한심한 생각도 났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병도 나처럼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 많아서 그래졌다는,

다소 믿지 못할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말이다, 사람의 본성이란 그리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나는 다시, 또다시 사람을 만나면 나의 행동방식을 바꾸지 못할 듯하다.

그게 편하니까.

그렇게 사는 게 옳다고 여기며 살아왔으니까.

내게 그렇게 대한 사람 역시 손익계산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역시나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며 살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다쳐있는 때에 하나의 선물을 받았다.

지인이라고 하기엔 미흡하나

지인보다 더한 지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분에게서 큰선물을 받았다.

그분은 일면식도 없는 분이고 피차 아는 바도 거의 없다.

그분은 해남에 사시는데 해남표 ‘밤호박’을 직송으로 보내주셨다.

내가 마트에서 호주산 단호박을 사먹는다는 댓글을 보시고 안타까우셨던 모양이야.

선뜻 주소를 달라고 하시더니 그 자리에서 부쳐주셨다.

단호박이 아니고 무공해 ‘밤호박’이라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내가 말씀만으로도 감사히 먹었다고 사양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누어 먹은 일은 제게 복을 짓는 일입니다. 제게 복을 지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세상에 감사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라고 문자를 보내오셨다.

‘뒤통수’만 운운하던 나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분은 ‘사람’을 믿었던 것이다.

뒤통수나 치고 불신이나 일삼는 게 사람이 아니라,

복을 짓는 게 사람이고 감사한 게 사람이라는 신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라고 뒤통수 맞은 일이 없었을까.

그분이라고 세상일이 다 넉넉하기만 했을까.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배웠으면 이럴까 싶다.

잠시나마 사람을 불신했던 내게 그분이 보내온 ‘밤호박’은

사람을 믿어보라는 느낌표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이 ‘느낌표’를 나누어 줄 지인들을 머릿속으로 헤아려본다.

그분이 아무 대가도 없이 내게 주었던 것처럼

나도 그분처럼 그 큰선물 느낌표를 가까운 이웃에게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