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손바닥 소설』은,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음에도, 소설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고, 동화나 전설, 콩트 같기도 한, 애매한 글들이 많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손바닥 소설에 비해 꽤 오래 전에 나온 손바닥 소설이다. 그러니까 가와바타는 오래 전부터 손바닥 소설이라는, 실험적 버전을 구상하고 쓴 셈이다.
과연 소설이 담지하고 있는 구성과 내러티브와 메시지를, 가와바타는 어떻게 원고지 10매에서 15매 정도로 쓸 수 있었을까.
근자에 한국 문단에 나온 몇 편의 손바닥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한마디로 회의적이다. 분량만 짧다고 손바닥 소설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짧은 분량일수록 내용은 충실해야 하며 그만큼 실력이 있어야 한다.
가와바타의 『손바닥 소설』로 들어가기 전 자명한 사실 하나를 짚어본다, 외국 소설을 읽을 때, 그 나라의 정치적 배경, 시대적 상황, 작가의 지향점과 인식, 그 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풍토를 알아야 한다.
『손바닥 소설』이 쓰였을 때는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강점기 시절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에선 지배자 입장이었으며, 세계열강들의 주도권 싸움에선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던 때다. 가와바타는 이 시대적 환경과 갈등을 『손바닥 소설』로 압축했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사회적 약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맹인과 여자가 주를 이룬다. 대부분 3인칭 객관적 시점으로 서술하는데, 극도로 감정을 절제한 상황 묘사는, 그 시대의 일본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가 조금은 벅차다.
자신의 딸을 팔러가는 여자, 온천에 오는 남자를 꼬여 얼마간 체류하다 그 남자가 떠나는 곳으로 가려는 여자, 매춘을 통해야만 생을 이어갈 수 있는 여자, 등등이 나온다. 남자가 주인공인 경우에는 거의 나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어느 면에선 대단히 인간적이다. 가부장적 사회였고 남자의 강인성을 요구했던 때라는 걸 감안하면, 가와바타는 이처럼 먹고 먹히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그런 캐릭터로 이러한 삶에 저항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여러 편 중 인상이 깊었던 소설은 <뼈 줍기>와 <고맙습니다> <가을비 내리는 역>이다.
<뼈 줍기>는 몇 안 되는 1인칭 소설이다. 첫 문장은 “골짜기에는 연못이 두 개 있었다.” 인데 이 연못 두 개는 삶과 죽음이며, 하나의 골짜기(한 번의 삶, 인생)에 동시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일 테다. 즉, 살아있지만 죽음과도 같이 있으며(주인공 나), 죽었지만 살아있는 것으로 있(죽은 할아버지)을 때도 있다는 함축적 의미다.
‘나’는 맹인이었던 할아버지를 화장한 후 뼈를 수습해 유골함에 넣는다. 그런 후 비석 아래 묻고 산을 내려온다. 나는 외톨이가 되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동정한다.
그런 후, 소설 끝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 글은, 내가 세는 나이로 열여섯 살 때 일어난 일을 열여덟 살(1916) 때 쓴 것이다. 지금 문장을 다소 다듬으면서 베껴 써보았다. 나로서는 열여덟 살 때의 것을 쉰한 살에 베껴 쓰는 일이 꽤 흥미롭다.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대한 기록이며, 그 기록을 다시 기록한다는 것은, 생은 여전히 죽음과 함께 진행되는 무한의 시간이라는 뜻이다.
<고맙습니다>는 다각도에서 해석할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다른 건 차치하고, 당시 일본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틀을 살펴본다.
어머니는 입 하나 덜어보려 딸을 팔러 간다. 이때 어머니는 대형 정기 승합차를 타고 150리 길을 나서고자 한다. 승합차 운전자는 “고맙습니다”를 입에 달고 사는 젠틀한 남자다. 외길에서 차를 옆으로 틀어 비켜 설 때도, “10분간 서른 대의 마차를 추월”할 때도, 운전자는 어김없이 “고맙습니다”를 말한다. 이를 본 어머니는 운전자의 됨됨이에 호감을 갖고, 자신의 딸과 살아달라고 애원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판 모르는 사람의 노리개가 될 거라고 매달린다. 운전자는 가타부타 말이 없고, 돌아가는 길에도 올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고맙습니다”만 되풀이 한다.
여기서 승합차 운전자는 국가 캐릭터다. 언제나 유니폼을 단정하게 차려입고는 자신의 일, 즉 운전하는 일에만 열심을 다한다. 예의바르게 “고맙습니다”로 운전(국무수행)을 하니, 그런 운전자를 욕하는 사람은 없다. 일본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아이덴티티를 이런 식으로 정한 채 밀고 나간다.
역으로 말하면 국민(어머니와 팔려가는 딸)은 국가(승합차 운전자)가 보여주는 “고맙습니다”를 보고 배워야 한다는, 일종의 ‘국민 길들이기“다. 국가가 우선이며, 국민은 국가가 하는 대로 따라 해야 한다는 묵시적 요구다. 승합차 운전자(국가)는 어머니(국민)의 애원(모르는 사람의 노리개가 될 거라고; 미국의 노예로 추측)에도 그 어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며 직진만 한다. 저항은 꿈도 꿀 수 없게, 정서적 지배를 하는 것이고 당하는 것이다.
<가을비 내리는 역>은 일본의 가정과 그 가정을 지키는 아내들의 욕망과, 그를 바라보는 소설가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보기 드물게 가와바타의 육성이 가감 없이 쏟아져 나온다.
오모리 역에는 비가 오는 날이면 퇴근 시간에 맞춰 여자들(아내들)이 우산을 들고 남편을 마중 나온다. 소설가는 이를 보며 “여러분은 엄청난 유부녀 무리를 본 적이 있는가. - 이는 죄수 무리를 보는 것만큼 측은한 놀라움이다.” “유부녀 무리는 속세의 격리병동 같은 각각의 가정에서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이다.” “이곳은 한 사람의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 시장”이며 “화장과 로맨스를 없앤 결혼 시장의 모형”이라고 일갈한다. 아내들과 아내들이 주는 우산을 받쳐 쓰고 가는 남자들의 모습은 이렇게 말한다. “한 우산을 함께 받치고 일종의 안도감과 한때의 신혼 비슷한 희열에 감싸여 돌아간다.”
가와바타는 소설가의 입을 빌어 역 광장의 풍경도 스케치 한다. “가정적인 너무나 가정적인 사랑을 우산 하나에 드높이 치켜든 부인 군대가 바싹바싹 공격해오고 있다. 그녀들의 잰 발걸음, 그리고 바깥 햇살에 익숙지 않은 고지식한 쇠락. 이 조심스러움은 오히려 죄수들 무리처럼 분노의 결투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러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가정적인 사랑’과 ‘부인 군대’와 ‘바싹바싹 공격’의 비 조합은, 국가가 만든 가정/사랑이라는 제도와 인간의 욕망을 대치 선상에 놓은 시니컬함이다.
소설가 네나미는 아내가 무도장의 무희라 역에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 이때 이웃집 아내는 자신의 남편을 기다리다 소설가 네나미에게 우산을 건넨다. 그녀는 사실 “초라한 남편이 개찰구를 나오지 않을까 흠칫흠칫 겁먹었다.” 그러니까 이웃집 아내는 다른 여자들을 의식해 유명한 소설가가 자신의 남편이길 바랐다.
그때 이웃집 아내의 동창인 적敵이 아는 척을 한다. 이웃집 아내는 네나미가 자신의 남편인 양 거짓을 부린다. 네나미는 두 여자의 대화를 들으며 “개찰구는 사회의 거대한 감옥 문을 연상시킨다. 징역을 사는 남자들은 그 문을 나와, 마중을 나온 환자와 함께 격리병동인 가정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이웃집 여자의 연적은 유명한 신극 배우가 개찰구로 나오자, 마치 자신의 남편인 양 팔짱을 끼며 아내인 척 해달라고 부탁한다.
연적이 가고 얼마 후, 연적의 진짜 남편이 개찰구를 나온다. 이웃집 여자와 연적이 대학 때 경쟁적으로 사랑했던 남자다. 그러나 지금은 “이제 막 감옥을 나온 듯 초라하고 지친 기색으로 두리번두리번 자신의 아내를 찾”는다. 그 모습을 본 이웃집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남은 우산 하나를 받쳐주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국가가 요구하는 아내의 자리, 남편의 자리는, 이토록 허접하며 초라하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출구를 감옥에 빗대며, 일을 마치고 온 남편은 죄수로, 그를 기다리는 아내는 환자로, 가정은 격리병동으로 칭한다. 가와바타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대로 찍혀 나오는 소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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