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126

책은 관절

강대진 교수님이 쓴 『브런치 인문학』이 출판되었다는 걸 알았다.북길드 출판사 배경완 대표의 프사를 통해서다.마음이 달떴다. 부랴부랴 인터넷 서점에 주문을 넣었다.책이 오길 기다리는데 이런저런 일들이 스크린으로 떠오른다. 2010년을 전후해서 나와 배 대표는 강대진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다.그때 우리는 소위 벽돌책이라 일컫는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아르고 호 이야기』를 통독하며 꽤나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강의가 끝나면 강대진 교수님과 우리는 뒤풀이를 했다.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해 안주만 축내고, 배 대표는 그 특유의 입담으로 우리를 웃겼다. 몇 년 후, 배 대표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제주도로 터전을 옮겼다.연고도 없이 제주도로 가는 건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제주도로 간 어느 날 배..

나의 이야기 2025.02.25

굿바이 거제

거제살이 4년을 마치고 살던 집으로 갑니다.굳이 거제를 택해 몸을 부린 건, 연고가 없고 풍경이 좋아서였습니다. 거제는 대단히 매력적인 선택지였습니다. 젊어서는 살고 싶은 데를 정해 이사도 참 많이 다녔지만지금은 그런 낭만적인 현실이 아닙니다.이사에 따른 비용지불이 꽤 되고, 큰 것부터 자질구레한 모든 것을 예약해야만 이사가 가능합니다. 거제에선 세입자로 살고, 살던 집엔 세입자가 있습니다.거제 집과 살던 집의 이삿날을 맞추기가 꽤나 어렵습니다. 신경이 과부하를 일으켜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닙니다.오래 된 친구는 말합니다.“거제로 간 거, 후회하지 않니?”후회라니요, 천만에요.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고 대답합니다. 바다와 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집을 구한 건 행운입니다.하루 날을 잡아 거제에 와서 집을 보..

나의 이야기 2025.02.18

관광객 아닌 관광객

거제도에서 산 지 4년이 다 돼 간다.문서상 거제도 주민이긴 한데 정서상 거제도 주민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그 점은 인정한다. 특히 재래시장에 가면 나는 그저 관광객일 뿐이다. 재래시장에서 생선을 살 때면 나는 생물인지 해동인지 묻는 버릇이 있다.마트에는 생물과 해동을 정확하게 쓴 라벨이 붙어 있지만 재래시장 좌판엔 싱싱해 보여도 해동일 때가 종종 있어서다. 한 번은 통영 어시장에서 제법 큰 병어가 있어서 생물인지 해동인지 물었다.당차게 생긴 생선가게 여주인은, 당차게도 생물이라고 대답했다.집에 와 구워먹는데 냄새도 살짝 나고 생선살도 보드랍지 않고 단단했다.이런 삽화를 굳이 관광객으로 보느냐 마느냐로 엮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거제나 통영이 관광도시다 보니, 뜨내기 관광객쯤으로 봤을 일을 얘기하는 거..

나의 이야기 2024.12.30

합천박물관과 해인사를 다녀오다

비실하던 몸이 봄과 함께 깨어납니다. 거제로 올 때만해도 이러저러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계획이라기보다 잘 놀고 잘 쓰자는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제 3년차가 됩니다. 몸이 부대끼는 날이 많아집니다. 한동안 집에 쿡 박혀있었습니다. 기운을 차리자. 이번엔 기어코 합천 해인사를 가보자. 먼저 합천박물관으로 갑니다. 박물관 입구엔 링과 화살이 놀이로 던져보라고 놓여 있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동해 링도 던져보고 화살도 던져봅니다. 링 열 개, 화살 열 개를 던졌지만 단 한 개도 넣지 못했습니다. 제기도 있어 휙 던졌다 발로 차봅니다. 다 꽝입니다. 꽝은 꽝인데 어째 이리 웃음이 나오는지요. 박물관을 나와 위로 올라갑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가야 시대의 다라국 옥전고분군이 보입니다. 이처럼 ..

나의 이야기 2024.04.13

해변 너머 저기

간만에 해변으로 나왔습니다. 봄바람이 제법 셉니다. 괜히 나왔나 발걸음이 머뭇댑니다. 고집 좀 부리자 마음을 돌립니다. 바다는 언제 봐도 좋습니다. 봄바람은 사람 마음처럼 변덕을 부리느라 부산합니다. 바닷물은 바람이 부는 대로 울렁울렁 무늬를 만들고 있습니다. 후드 티의 모자로 머리를 덮습니다. 하늘은 구름을 띄우고 푸르르하다 흐리흐리하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바다색은 항상 하늘과 짝을 이룹니다. 하늘이 파라면 바다도 파랗고, 하늘이 흐리면 바다도 흐립니다. 오늘은 많이 걷기보다 바다를 실컷 보려고 나온 터라, 바다를 향한 벤치에 앉습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맥락 없이 떠오릅니다. 생각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하나의 생각을 밀어내고 새로운 생각을 자꾸만 던집니다. 며칠 전엔 다 쓴 장편소설을 남편..

나의 이야기 2024.04.02

조금은 슬퍼도 살아볼만 한 집

지인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부활을 믿고 한 분은 윤회를 믿습니다. 그 분들과 통화를 하다 보면 간혹 종교 얘기가 나옵니다. 신앙과 종교에 관해 생각하게 된 계기입니다. 신앙 혹은 종교에 관한 발언은 분쟁을 일으키기에 딱 좋은 소재입니다. 금기의 영역에 포함시켜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름 떠오른 생각에 입을 뗍니다. 먼저, 부활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삼일 후, 예수는 상처 하나 없이 온전한 몸으로 부활합니다. 의미심장하게도, 거기까지입니다. 예수가 부활 후 어떤 일에 종사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결혼은 했는지, 자식은 낳았는지, 예수에 관한 구체적인 행적은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수는 신이 됩니다. 신은, 사람들처럼 일자리에 종사하거나 무엇을 먹거나 배..

나의 이야기 2024.02.18

『카메라루시다』에서 문득

롤랑 바르트의 저 유명한 『카메라루시다』를 읽고 싶었던 건 오래 전이다. 여러 번 기회를 놓친 끝에 얼마 전에야 읽었다. 일단 책을 사려고 알라딘에 들어갔지만 절판된 지는 오래. 중고 가격을 보니 몇 달 전만 해도 3만 원이 넘었는데 한 달 후엔 5만 원이 넘었다. 어제 보니 69,900원을 찍는다. 그만큼 소장 가치가 있다는 말이겠다. 일단 도서관에서 빌리기로 한다. 도서관에 갔지만 없다. 사서에게 말하니, 창원에 있는 도서관에는 있으니 가져다 놓겠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 만에 『카메라루시다』를 손에 넣는다. 가슴이 두근두근. 유감인 것은, 내 책이 아니기에 줄을 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거나, 책에 메모를 끄적일 수 없다는 점이다. 해서, 메모 노트를 옆에 두고 좋은 대목을 써 두기로 한다. 책..

나의 이야기 2023.08.21

메모지로 사용하다 죄송하여

프린트 한 종이가 거짓말 보태 산더미다. 강의를 들으며 받았음직한 페이퍼와 내가 쓴 소설을 프린트한 종이들이다. 어느 한 날을 정해, 두꺼운 높이로 쌓인 프린트 물을 반으로 잘라 메모지로 사용한다. 메모를 하다 뒷장을 보니 어떤 강의 때 받은 페이퍼다. 재발견의 놀라움이랄까. 누구의 강의였는지 반쪽짜리로는 알 수가 없다. 내용을 읽어보니 철학아카데미 수업 때 교수님한테 받은 듯하다. 누구의 강의였을까. 내용을 다시 찬찬히 읽는다. 짐작컨대, 조광제 교수님의 수업 페이퍼 같다. 전문은 잃어버렸지만 무척이나 소중한 내용이고 교수님께 죄송한 마음이 크다. 반쪽짜리에 쓰인 내용은 이렇다. 뜨겁게 달군 쇠를 두들겨 납작하게 만들고 납작하게 된 쇠판을 다시 달군 뒤 구부려 이중으로 접어 겹치게 하여 또 다시 두들겨..

나의 이야기 2023.07.18

식물의 비밀

봄이다, 봄. 봄 중에서도 오월의 봄, 너도 봄이고 나도 봄이다. 꽃들도 좋지만 연두와 어린 초록도 좋아한다. 연두와 초록을 보는데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오른다. 식물들은 어째서 다 초록일까. 광합성으로 생명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이라는 말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듯한데, 다른 이유가 있길 바라는데, 그게 뭘까. 꽃은 또 어떻고. 초록에 딱 어울릴만한 색이 아닌가. 주로 보색에 가까운 색으로, 인공적으론 흉내 낼 수 없는 색이다. 초록에 하양, 초록에 노랑, 초록에 빨강, 초록에 청보라, 등등. 갈색이나 고동색인 꽃은 본 기억이 없다. 까망의 꽃도 마찬가지. 거기다 꽃술의 색은 다 노랑이다. 어째서일까. 벌레들이 노랑에만 반응하기 때문일까. 생존을 위해서라는 말 말고, 다른 비밀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한다. ..

나의 이야기 2023.05.17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것 하나

김진영의 『조용한 날들의 기록』을 읽다 흠칫 멈춘 문장 하나. “다시 아버지 생각. 아버지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모두가 못다 쓴 편지를 남기는 이들이 아닐까.”-157쪽 “아침에 아버지 생각.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168쪽 이 문장에서 나는 꼼짝도 못한 채 있기만 한다. 내게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이고, 엄마는 그냥 엄마였을 뿐이다. 실은, 자식에게 모든 걸 제공하는 희생의 공급자라는, 사회적 관념이 다였다. 엄마 아버지를 하나의 개체로 생각하거나, 인간적 욕망이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시아버지가 생각난다. 시아버진 평생 철도 공무원으로 묵묵히 일하시다 퇴직하신 분이다. 남편에게서 전해들은 말이다. “아버진 엄마가 싸 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

나의 이야기 2023.05.12

혐오에 관한 의문

미용사가 롤로 머리칼을 만다. 롤 위에 펌 약을 바르고 에어볼을 씌운다. 에어볼은 마치 UFO처럼 가운데는 뻥 뚤린 은색의 둥근 판으로, 360도로 천천히 돈다. 흔히 아우라를 형상화시킬 때 볼 수 있는 그런 모양새다. 둥근 판에서 나오는 자외선과 열이 펌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한다. 바닥엔 앞서 미용을 하러 왔던 사람들의 것이겠는, 커트했던 머리칼이 군데군데 깔려 있다. 늘 갖던 의문이 다시 떠오른다. 몸에 붙어 있을 때는 소중하던 머리칼이 머리에서 떨어지면 혐오가 되는 건 왤까. 몸에 붙어 있을 때는 소중하던 손톱, 발톱이 몸에서 분리되면 혐오가 되는 건 왤까. 그 외에도 많다. 인체의 일부였을 때는 ‘없어선 안 되는’ ‘없으면 탈이 난 증거가 되는’ 똥과 오줌, 방귀, 침, 귀지 따위가 몸 밖으로 나..

나의 이야기 2023.05.09

늙음에 묻다

늙음의 지표는 사진. 사진의 독자성은 기록. 기록의 힘은 역사성. 해서, 우리는 예전에 찍은 사진을 보며 ‘나의 늙음’을 알아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늙음은 늙음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1차 산업이 3차 산업화하면서, 3차 산업이 4차 산업으로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몸’에 많은 투자를 한다. 즉, 늙음을 거부한다. 주름과 잡티를 막으려 썬크림을 바르고, 주름과 동안에 좋다는 화장품을 사고, 주름을 없애려 보톡스와 리프팅을 하고, 주름이 그대로 보이는 사진에 포토샵을 이용해 주름살을 다림질한다. 손가락 몇 번 터치하면 육십 대가 십 대가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진을 SNS 프로필 사진으로 올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하여, 잘 다림질된 사진은 나이를 초월하고, 그러..

나의 이야기 2023.05.04

달려라 오토바이

거제로 집을 보러 와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주차장이다. 주차장이라기보다 주차 칸이다. 일반 차량의 주차 칸보다 아주 작은 칸이 한쪽 공간에 그어져 있다. 대체 저 작은 칸은 뭘까. 답은 이사를 한 후에야 알았다. 오토바이 전용 주차 칸.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 친절한 아파트네, 오토바이 전용 주차 칸까지 있고. 그렇게 무심히 얼마를 지난 후 차도를 달릴 일이 생긴다. 퇴근 무렵이다. 차량 사이사이로 많은 오토바이가 달리고 있다. 진풍경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오토바이 행렬은 본 적이 없다.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헬멧을 쓰고 아래위 회색 작업복 차림이다. 그제야 거제가 조선소의 도시라는 걸 실감한다. 내가 사는 사곡엔 삼성조선소가, 옥포엔 대우조선소가 있다. 조선소 근처엔 하청업체들이 ..

나의 이야기 2023.04.23

비오는 날, 서이말등대

4월하고도 14일 금요일입니다. 금세라도 비가 올 듯합니다.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집을 나섭니다. 거제 면사무소에 앞에 이르자 몇 방울의 빗낱이 비칩니다. 하늘은 구름장이 두텁고 바람은 몇 낱의 빗방울처럼 간간이 불다 그치다 합니다. 거제 면사무소에다 주차한 후 근처를 산책하기로 합니다. 우선 거제초등학교로 갑니다. 116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학굡니다. 당시엔 다리가 놓이지 않은 섬이었을 텐데 섬의 학교치곤 규모가 꽤 큽니다. 정문에 들어서자 5공화국 때의 흔적이 오롯이 보입니다. 그때엔 목숨처럼 강조되던 국민교육헌장과 충효라는 글이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많이 아쉽습니다. 역사를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도 역사 나름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들이 하교합니다. 소중한 미래들입니다..

나의 이야기 2023.04.18

빨래 놀이 좀 할게요

오늘의 날씨는? 흐림. 딱 으등크리 우리 아버지 같은 날씨. 우리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대체로 찌부둥한 편이다. 툭하면 태권도 도복 띠처럼 생긴 끈을 이마에 꽉 동이곤 세상의 근심을 쓸어 담고 있는 듯하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버지 저기압이다.”라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듯 경고성 발언을 날린다.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에게 발뒤꿈치를 들고 다니라고 한다든지, 입술에 집게손가락을 대곤 “쉿!” 하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언니 둘은 “에그, 으등크리 우리 아버지.”라고 속닥댄다. 짐작컨대, 으등크리라는 말은 충청도 사투리다. 나는 저기압도 싫고 발뒤꿈치도 싫다. 집안 분위기가 납덩어리에 눌린 꼴도 숨이 막힌다. 조용히,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듯한 행위는 강제노역이 따로 없다. 그때부터였으리라. 나는 엄..

나의 이야기 2023.04.12

그래서 바위는 바위

‘언제나 거제’라는 말을 쓸 수 있는 데를 말하라면, 서슴없이 신선대와 선자산을 꼽는다. 언제 어느 때 가도 좋은 곳, 편안함과 경이로움을 주는 곳. 기어이 벚꽃 계절이다. 신선대를 가는 도로엔 벚나무들이 환호성을 지르듯 피어있다. 캄캄한 밤마저 화사하게 만드는 벚꽃의 신비로움. 요즘 잘 쓰는 ‘환장’이라는 말을 써서 말하면, 어감은 별로지만 ‘환장꽃’이 아닐까 싶다. 벚꽃 길을 지나 신선대에 이른다. 신선대는 전면을 바다에 두고, 날카로운 바위들과 켜켜이 층을 이룬, 팥 시루떡 같은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선선대 바위에서 바다를 보면 항상 느끼는 게 있다. 웅장함과 두려움과 기쁨과 놀람. 신선대에 오르면 지구의 탄생을 몇 억 몇 천만 년이라고, 숫자로 환산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 고생대 중생대 신생..

나의 이야기 2023.04.01

거제는 나를 품고, 나는 거제를 품고

내일이면 거제로 온 지 딱 2년이 됩니다. 모레부턴 거제 생활 3년차로 접어듭니다. 그 무엇도 정한 것 없이, 지인 한 사람 없이, 오히려 그러한 까닭에 거제로 왔습니다. 나이는 꽉 찼지만 용기는 무모하다 싶을 만큼 있습니다. 어쩌면 거제 생활이 노마드적 인생을 추구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집 뒤론 산이 있고 앞엔 바다가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언덕에 있지만 한눈에 반한 집이 있어 입주했습니다. 조용히 사색하고 글을 쓰자는 원대한, 그것은 정말 원대한 꿈에 가까운 희망이었고 그렇게 살 줄 알았습니다. 헌데 지지고 볶는 일은 경기에 살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툭툭 벌어지고, 그 일을 감당하느라 분노와 우울이 연이어졌습니다. 물론 매일 매시간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글도 좀..

나의 이야기 2023.03.24

금포마을 빈터에는

산책. 이 말이 참 좋다. 고요하고 진지하나 자신을 놔버릴 수 있어서인 모양이다. 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좋다. 경등산화를 조인 후 집을 나선다. 오늘의 산책 코스는 금포마을. 금포마을에는 바다가 있고 산등성 어디쯤엔 빈터가 있다. 빈터에는 오래 된 나무와도 같은 할아버지가 앉아 있다. 사등성에서 출발해 마을로 들어선다. 사등성을 품고 있는 마을은 망치산 자락에 위치한 대리마을로, 자금자금한 시골집과 꽤 정성들여 지은 전원주택이 군데군데 있다. 마을 입구엔 반듯하게 구획 정리된 논과 밭이 있고, 꽃모종을 기르는 비닐하우스와 묘목을 심은 곳이 더러 자리하고 있다. 2월 하순. 햇볕은 따스하나 바람은 차다. 등산복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잘 닦인 시멘트 길을 걷는다. 길 양 옆 논엔 올해 농사를 준..

나의 이야기 2023.03.01

Stand By Me (노래: Ben E King)

거두절미하고, 이 노래만 들으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동창입니다. 그 친구는 예쁘다고 할 순 없지만 지금 생각하면 개성 있는 캐릭터입니다. 봄 소풍 때입니다. 여학생들은 자유 시간을 끝내고 모두 모여 앉습니다. 일종의 장기자랑 순서입니다. 말이 장기자랑이지 노래가 주를 이룹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쟤요~ 쟤요~ 라는 손가락질 추천도 없이 자진해서 나옵니다. 그 친구가 나오자 여학생들은 뜨악해집니다. 그닥 존재감이 없던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 친구와 말을 나눈 적은 없습니다. 그 친구가 마이크를 잡습니다. 선생님이며 같은 학년의 친구들이 일순 조용해집니다. 그 친구는 한 손은 교복 스커트 주머니에 푹 찌르고 한 손은 마이크를 잡고 Stand By Me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나의 이야기 2022.07.27

장날

장날에 맛 들였습니다. 벌써 두 번째 고성 장날에 갔다 왔거든요.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가면 고성이 나옵니다. 장날만 구경하긴 뭣해서 간 김에 공룡화석지도 가보고 이번엔 소가야의 고분이 있다는 송학동에도 갔댔습니다. 장날 이야기를 할까요. 이번엔 살 것도 별로 없어서 장바구니 한 개만 달랑 들고 시장에 들어섰습니다. 주로 좌판에 늘어놓고 파는 물건들을 둘러보는데, 어쩌면 좋아요. 살 게 자꾸 늘어납니다. 싱싱해서, 싸서, 사는 재미가 마구 붙습니다. 고구마도 사고, 포도도 사고, 마른 오징어며 고등어도 사고, 작은 통배추 묶음도 사고, 통배추를 사니 열무와 쪽파도 사게 됩니다. 장보기가 본격적으로 들어간 겁니다. 이럴 바엔 국수라도 먹고 하자 싶어 칼국수 집엘 들어갑니다. 옛날 칼국수를 시킨 후 칼국..

나의 이야기 2021.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