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기 5

『고비에서』

시가 무엇이라는 정의는 많다. 내게 시는, 사건과 내면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추상화에 속한다. 다행히, 고운기 시인의 『고비에서』는 조금이나마 사건으로 내면을 유추할 수 있고, 내면으로 사건을 짐작할 수 있는 시들의 집이다. 2023년 6월에 나왔으며 등단 40년 기념 시집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우선 고비 사막이 떠올랐고, 그 다음엔 인생의 굽이진 고비가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중의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시들은 고비라는 장소에서 인생의 고비로 넘어가고, 다시 인생의 고비에서 고비 사막이라는 장소로 이동하길 거듭한다. 그러니까 고비 사막은 일종의 내면의 장소인 셈이다. 사막이 척박하긴 해도 생명이 깃들어 있듯, 시인은 암 수술과 치료, 퇴원이라는 사막을 거치면서..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고운기 시인의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에 나온 ‘시인의 말’은 인상 깊다. 뭐랄까, 웅성거리는 속내를 고운기 시인 특유의 나직하고도 간결한 음성으로 썼다고나 할까. 1987년 1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에 쓴 ‘시인의 말’을 옮겨본다. 기쁨은 때로 두려움을 동반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나만큼이나 소심한 사람은 기쁠 때도 저편의 슬픔을 생각한다. 정작 슬픔 속에선 기쁨의 저편을 노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죄스럽다. 내 아직 어리므로 잘못은 두고두고 고쳐가리라. 2022년 10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개정판에 쓴 시인의 말도 마음에 남는다. 이생에 나는 가을을 좋아했나보다. 가장 철든 계절이 가을이다. 35년여 만에 첫 시집을 다시 내려 유심히 읽어보니 그렇다. 다시 오는 생이 있겠는..

『모든 책 위의 책』

어느 한때, 나는 신라 문무왕에 대한 소설을 쓰고자 『모든 책 위의 책』 저자인 고운기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는 역사소설이 붐을 타고 있을 때였다. 역사소설을 쓴다는 건 가당치도 않을 일이었으나, 나름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싶었다. 해서, 삼국유사(일찌감치 읽었지만)는 물론, 삼국시대와 가야에 관한 여러 책을 읽었다. 거기다 중국 서안까지 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백에 가까운 나의 도전력은 여러 책을 읽으면서 꺾였다. 신라만 해도 혈육끼리의 결혼이 빈번해, 족보가 꼬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누가 누구의 자식이고 왕이고 왕자가 되는지 알았지만, 차츰 복잡해지면서 도저히 기억할 수 없게 됐다. 중국과 일본과의 역사적 지식 또한 있어야 했다.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책 위의 책』을 읽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