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75

<<극단적 흰빛>>

고철 시인의 『극단적 흰빛』은 제목부터가 대단히 극단적이다. ‘극단적’이라는 단어도 극단적인데 ‘흰빛’도 극단적이다. 극단과 극단이 나란하게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과연 극단이 치닫는 세계는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극단적‘인’도 아닌 그저 ‘극단적’에 매료되었다.‘흰빛’ 또한 ‘흰색’과는 달리 가시적이지 않은데 극단과 흰빛은 어떤 모습으로 조화를 이룰까.  표제작 「극단적 흰빛」은 한 공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병치시킨다. 시의 화자는 그 두 세계에 머물며, 들숨과 날숨을 쉬듯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경험한다. “깜깜해서야 집으로 왔”는데, “딸깍 소리가 무서워 불을 켜지 않았”고, “주방이 보이고 아침 먹던 숟가락이 보였”고, 그때 “실감 나지 않은 빛이 생겼다”“엄마, ..

퓰리처상

사진처럼 즉각적이며, 강렬하며, 감각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매체도 드물 것이다. 『퓰리처상 사진』은 사진의 백미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책이다. 332쪽의 두꺼운 이 책에는 사진/사진기의 발전과 그에 따른 역사적 맥락이 간단명료하게 적혀 있다. 또한 사진기자들의 열정과 애환, 순간의 포착을 위해 생명을 건 스토리도 간략하게, 그러나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재난현장의 사진을 볼 때 충격을 받으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도 한다. “저 순간에 사진이나 찍고 있었다니” 혹은 “사진 찍을 때 한 사람이라도 구하지” 그러나 ‘다만’ 사진 한 장이 아니다.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로 전송되면 그 파급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예컨대 반전시위를 이끌어 내기도 하고, 인종차별을 규탄하기도 하고, 그로 인..

<<세상을 바꾼 사진>>

사진의 발명은 가히 인간사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사진은 순간을 정지시킨 생생하고도 확고부동한 증명서다. (사진을 조작하는 기술이 나오기 전에나 통할 얘기지만, 지금도 이 말은 사실이다.)  『세상을 바꾼 사진』엔 그야말로 세기적 혼란기라고 할 수 있는 1900년대 사진이 주를 이룬다. 사진에는 권력과 희생, 노동 착취와 전쟁에 따른 폭력의 이미지가 충격적으로 나온다. 1908년 미국 아동의 노동 현장의 사진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이륙에 관한 사진과 대조적이다. 1910년대로 넘어가면 멕시코 혁명의 사진이, 1915년엔 오스만제국이 아르메니아인을 대학살한 사진이, 1916년엔 독일이 프랑스 베르됭시를 대대적으로 공격한 사진이 실려 있다. 실로 가공할 참사는 100년이 넘는 시간을 넘어 당시를 증언한다..

동시집 『넉 점 반』

친구 추천으로 윤석중의 동시집 『넉 점 반』을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넉 점 반』을 여는 순간 가슴에 지진이 납니다. 주인공 아가의 그림은 그냥, 앙~ 깨물어먹고 싶다, 그게 전부입니다. 반복, 반복, 앙~ 깨물어먹고 싶다,입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눈이 그림에 박혀 나올 줄 모릅니다. 아가는 엄마 심부름을 갑니다. 지금 몇 시나 됐나 물어보는 심부름입니다. 아가는 구복상회라는 가겟집으로 가 “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묻습니다. 돋보기를 쓴 가겟집 할아버지는 “넉 점 반이다” 알려줍니다. 아가는 시간을 잊지 않으려 “넉 점 반” “넉 점 반”을 외우며 집으로 갑니다. 가는 도중 아가는 개미가 노는 것도 보고, 닭이 물을 먹는 것도 보고, 잠자리 떼가 나는 것도 보고, 꽃이 핀 데..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는 1930년 장편소설 『레베카』를 출간한다. 지금(2023년)으로부터 93년 전의 작품이다. 세월을 건너 그 시대를 읽는다는 건 대단한 즐거움이다. 환경적 배경은 영국의 대저택 멘덜리이고, 인물적 배경은 귀족과 하층민이다. 인물적 배경을 더 파고 들면 산 자와 죽은 자의 갈등과 욕망이다. 이 소설은 1인칭으로 서술되는 ‘나’가 멘덜리로 가는 길을 회상하는 걸로 시작한다. ‘나’는 귀부인의 시중을 드는, 하녀는 아니지만 그와 다름없는 신분이다. ‘나’가 시중을 드는 벤호퍼 부인은 몬테카를로 호텔로 휴가를 온다. 그 호텔에서 ‘나’는 드윈터 맥심이라는, 멘덜리 대저택의 귀족을 만난다. 멘덜리 대저택은 그림엽서에 나왔고, ‘나’는 어린 시절 그 그림엽서를 간직했던 터다. 그 으리짜한 귀족은 ..

『고비에서』

시가 무엇이라는 정의는 많다. 내게 시는, 사건과 내면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은 추상화에 속한다. 다행히, 고운기 시인의 『고비에서』는 조금이나마 사건으로 내면을 유추할 수 있고, 내면으로 사건을 짐작할 수 있는 시들의 집이다. 2023년 6월에 나왔으며 등단 40년 기념 시집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우선 고비 사막이 떠올랐고, 그 다음엔 인생의 굽이진 고비가 떠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은 중의적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시들은 고비라는 장소에서 인생의 고비로 넘어가고, 다시 인생의 고비에서 고비 사막이라는 장소로 이동하길 거듭한다. 그러니까 고비 사막은 일종의 내면의 장소인 셈이다. 사막이 척박하긴 해도 생명이 깃들어 있듯, 시인은 암 수술과 치료, 퇴원이라는 사막을 거치면서..

『카메라 루시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는 제목부터 사람을 홀린다. 처음엔 카메라로 루시다라는 여자를 찍어 말하려는 걸까? 참 멋진 제목이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내내 루시다라는 용어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106쪽에 “프리즘을 통과하는 대상을 스케치할 수 있도록 만든 기계 장치의 이름”이라는 문장만 나온다. 그 문장만으론 ‘카메라 루시다’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특별한 프리즘과 거울 또는 현미경 따위를 이용하여 물체의 상을 일시적으로 종이나 화판 위에 비추어 주는 광학 장치”라고 나온다. 광학 장치의 명칭치곤 대단히 문학적이다. 이 책 제목에 끌려 읽고자 했던 때로부터 제법 많은 해가 지났다. 인터넷 서점에선 여전히 절판이었다. (열화당에서 나온 초판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이 작품은 너무나 유명해서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듯한 착각을 준다. 『춘향전』을 읽지 않았지만 읽었다는 착각을 주는 것과 흡사하다. 시간은 많이 흘러 지금은 2023년이다. 1770년대 젊은 베르테르의 사랑이 자본의 힘으로 사는 현대에도 통하리라는 생각은 버거운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랑’이라는 화두는 인간의 기저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임엔 분명하다. 다만, 사랑을 어떤 식으로 행하느냐, 읽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서사는 널리 알려진 대로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약혼자가 있는 로테를 사랑하다 자살했다는 얘기. 당대 이 책을 읽었던 젊은이들에겐 공감대가 컸으리라 짐작한다. 미완의 사랑이 마치 자신과 같아서 베르테르처럼 자살한 사람이 많았다던가. 해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던가. ..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이 단편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단편선에 수록되어 있다. 1860년 대 배경으로, 당시엔 집에서 출산하는 게 적절하다고 여긴 시절이다. 병원에서 출산하는 건 오십 년 정도 시대를 앞선 일로, 여유가 있는 집에서나 할 수 있다. 로저 버튼 부부는 병원에서 출산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는 모두를 경악케 한 기이한 모습이다. 버튼 씨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칠십 대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외양도 그렇지만 태어나자마자 말도 한다. 병원 관계자들은 한시바삐 저 기괴한 생물체를 병원에서 내보내고자 한다. 그때부터 버튼 씨는 곤경에 처한다. 당장 퇴원을 해야 하는데 배내옷이 아니라 양복을 준비해야 한다. 버튼 씨는 허둥지둥 양복을 맞춰 아들에게 입힌 후 집으로 데려온다. 그렇게 노인 아들 벤저민 버튼은 유치원..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읽기란 만만치 않다. 오래 전 『세월』을 읽다 포기한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댈러웨이 부인』은 꼭 읽어보고 싶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몇몇 책을 구입하려다 절판이어서 도서관을 찾는다. 도서관에서도 역시나 구할 수 없다. 그러던 중 『댈러웨이 부인』이 있어 빌리기로 한다. 버지니아 울프 하면, 의식의 흐름을 좇는 소설로 유명하다. 『댈러웨이 부인』도 역시 그렇다. 서사는 뒤죽박죽, 등장인물들은 다양하게 많다. 헌데 이 책은 장편이면서도 소제목이나 챕터가 없다. 소설 한 권이 통째로 이어진 장편이다. 독자들로선 피곤하고, 심지어 괴로움마저 느낀다. 예컨대, 주인공 댈러웨이 부인이 무엇을 보고 그 장면을 서술하는 와중에, 줄 바꿈도 없이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이 등장하는 식이다. 독..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로베르토 볼라뇨의 이 소설은 독특하다. 아니, 소설인가? 하는 의아함이 드는 소설이다. 한마디로 소설의 전형성을 전복시킨 소설이다. 마치 어떤 책을 읽고 줄거리를 소개하는 듯하다. 그만큼 간략하며, 객관적이며, 사실적이다. 소설 특유의 디테일한 표현을 기대했다면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이 소설은 어느 장르에 넣기도 어렵다. 장편소설도 단편소설도 산문도 아니면서, 소설은 소설이다. 그렇다고 소위 ‘손바닥소설’이라고 단정하기엔 미진하다. 각 소설의 분량은 어느 것은 한 페이지, 어느 것은 두어 페이지 정도로 짧다. 그런데 소설의 무게감은 분량과는 다르게 제법 두툼하다. 아마도 작가의 해박한 지식에 더해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독자를 속이는 고도의 기법 때문이 아닐까 한다. 등장인물들은 남미 여러 국가의 ..

<<조용한 날들의 기록>>

이 책은 ‘철학자 김진영의 마음 일기’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쓴 일기 형식으로 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도 있지만 아포리즘도 있다. 책장을 열자 첫 문장부터 눈을 사로잡는다. “눈이 내리면서 가르쳐주는 것. 고요히 사라지는 법.” ; 이 문장에서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윤리의 한편을 전달받는다. 2월에 쓴 문장. “노예란 누구인가? 그는 혀가 잘린 사람이다.”(롤랑 바르트 ) ; 나를 포함해 바른 말을 해야 할 순간에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존엄한 목소리를 듣는다. 다른 문장. “멜랑콜리는 우울이 아니다. 특별한 정신의 상태다.” ; 흔히 쓰는 우울증, 우울감에 대한 특별한 대우를 받는 느낌이 든다. 생활에서 겪는 솔직한 이야기도 있다. “눈뜨면 나보다 먼저 깨..

나를 보내지 마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중 『녹턴』과 『남아 있는 나날』을 읽었는데 이번엔 장편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다. 한마디로 최고의 작품이다. 이렇게 섬세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도 드물다. 시종 일관 잔잔한 톤이지만 핵심을 향해 나아가는 그 꾸준함과 성실함은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고도의 경지다. 글을 쓰다보면 머릿속에 든 내러티브나 표현이 자꾸 보채는 까닭에 디테일한 부분을 놓치기 쉬운데, 가즈오 이시구로는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하나하나 펜 끝으로 세밀화를 그리듯 쓴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글 전체가 디테일 덩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점은 내공이 탄탄하지 않으면,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없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힘이다. 그런 힘의 또 한 부분은, 화자(주인공 ‘나’)와 청자(독자)와의 거..

그토록 먼 여행

로힌턴 미스트리는 현재 캐나다에 살며 인도 태생의 작가다. 그의 장편소설 『그토록 먼 여행』은 처음 접해보는 인도 소설이다. 인도 소설이라는 점이 적잖게 궁금증과 부담을 준다. 헌데 웬걸. 우리나라 작품을 읽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읽힌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점은 번역에 있다. 손석주의 번역은 그야말로 최고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읽는 내내 번역자에 대한 고마움이 새록새록 올라온다. 독자의 뇌를 쥐어짜는 게 아니라 편안하면서도 작품의 진가를 자연스레 녹여, 독자와 작품을 하나로 만든다. 원작을 이해하고 작가와 함께 호흡하지 않으면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없다. 즉,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 없이는 훌륭한 번역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로힌턴 미스트리의 글 솜씨다. 작가의 탁월한 ..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고운기 시인의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에 나온 ‘시인의 말’은 인상 깊다. 뭐랄까, 웅성거리는 속내를 고운기 시인 특유의 나직하고도 간결한 음성으로 썼다고나 할까. 1987년 1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에 쓴 ‘시인의 말’을 옮겨본다. 기쁨은 때로 두려움을 동반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나만큼이나 소심한 사람은 기쁠 때도 저편의 슬픔을 생각한다. 정작 슬픔 속에선 기쁨의 저편을 노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죄스럽다. 내 아직 어리므로 잘못은 두고두고 고쳐가리라. 2022년 10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개정판에 쓴 시인의 말도 마음에 남는다. 이생에 나는 가을을 좋아했나보다. 가장 철든 계절이 가을이다. 35년여 만에 첫 시집을 다시 내려 유심히 읽어보니 그렇다. 다시 오는 생이 있겠는..

『페스트』의 전언

카뮈가 『페스트』를 발간한 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1947년이다. 카뮈야말로 전쟁의 고통을 겪었고, 그로 인한 인간의 파괴를 여실히 느꼈을 터다. 『페스트』는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그 지역에 퍼지기 시작한 페스트와의 투쟁을 그린 것이나, 1,2차 세계대전이 메타포인 것만은 여실하다. 페스트균에 의해 도시는 폐쇄되고 그에 따른 생이별, 도시에 갇힌 감옥살이, 저항과 무기력의 과정은, 전쟁과 페스트균을 동일 선상에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서술자’라는 호칭으로 전개된다. 어느 특정 인물을 주인공으로 정하지 않고 ‘서술자’를 택한 것은, 페스트는 보통의 누구라도 겪을 수 있으며, 겪고 있으며, 누구라도 서술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따라서 ‘서술자’의 입을 통해 바라..

『토니오 크뢰거. 트리스탄.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말하는 예술과 현실

토마스 만의 이 작품집은 두께만큼이나 조금은 무겁고 신중하다. 대체로 자전적 성격이 두드러지는데 「토니오 크뢰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주인공 토니오 크뢰거는 어려서부터 예술적 기질이 풍부했으나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음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친구 한스를 이상형으로 여겨 애정을 주나 그에 충족된 반응은 끝내 얻지 못한다.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간단하고 쉽게 비교를 하면, 토니오 크뢰거를 예술과 특수성, 고독과 소외, 비실용성으로 말한다면, 한스는 문명과 현실, 보편성과 인기, 실용성으로 말할 수 있다. 토마스 만은 두 지점을 하나로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음도 자각하며 고통스러워한다. 「마리오와 마술사」는 다른 작품에 비해 수월하며 재미와 흥미를 준다. 주..

소설 <<인간 실격>>과 드라마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드라마 민음사에서 나온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2004년 초판으로 시작해 2021년에는 무려 89쇄를 찍는다. 소설의 무엇이 이토록 많은 독자를 끌여들였을까. 다자이는 1909에 태어나 1948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39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그는 다섯 번 자살을 시도한 끝에 비로소 죽음에 이른다. 그가 죽음에 천착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그의 소설로 유추해 볼 따름이다. 『인간 실격』은 자전적 요소가 짙은 소설이다. ‘서문’으로 시작해 첫 번째 수기, 두 번째 수기, 세 번째 수기, ‘후기’로 이어진다. 서문에서 ‘나’는 사진 석 장을 보는데, 한 장은 열 살 전후의 사내아이이고, 다른 한 장은 교복 차림의 동일인물이고, 마지막 한 장은 나이를 짐작하기..

『아름다운 단단함』을 발견하다

흔히, 아름답다는 것은 연약하고 고우며 보드라운 이미지를 고정관념으로 내포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만큼이나 진부하기도 하다. 그에 비해 단단하다는 것은 외부/내부로부터의 충격에 견디는 힘의 이미지다. 책 제목은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은유를 품고 있다. 수소원자 2개(H2)와 산소 원자 1개(O1)가 결합하면 물(H2O)이 되는 그런 류는 아닐 테고, 원소의 결합만큼이나 신비로운 것도 없지만 그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은 오길영 교수가 쓴 산문집으로, 세상살이와 문학과 영화, 읽은 책에 관한 글이 편하고 다채롭게 나온다. 머리 싸매고 읽을 필요가 없게 챕터는 짧고 내용은 간결하며, 그런데 던지는 메시지는 날카롭다. 머리맡에 두고 짬이 날 때마다 펼쳐보..

<<손바닥 소설>>을 짚어보며

『설국』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손바닥 소설』은,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음에도, 소설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고, 동화나 전설, 콩트 같기도 한, 애매한 글들이 많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손바닥 소설에 비해 꽤 오래 전에 나온 손바닥 소설이다. 그러니까 가와바타는 오래 전부터 손바닥 소설이라는, 실험적 버전을 구상하고 쓴 셈이다. 과연 소설이 담지하고 있는 구성과 내러티브와 메시지를, 가와바타는 어떻게 원고지 10매에서 15매 정도로 쓸 수 있었을까. 근자에 한국 문단에 나온 몇 편의 손바닥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한마디로 회의적이다. 분량만 짧다고 손바닥 소설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써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짧은 분량일수록 내용은 충실해야 하며 그만큼 실력이 있어야 한다. 가와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