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탄 선생님께서 김정주 소설집 『바다 건너 샌들』을 읽고 감상문을 페이스북에 올리셨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열정이고, 감상문을 쓴다는 것은 책에 대한 애정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 사실을 알기에 정탄 선생님의 감상문에 고개 숙여 깊이 감사를 드린다.
(특히, 샌들에 관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점을 써주셔서 또 하나를 배운다.)
※ 강자, 승자는 패자, 약자를 소 닭 보듯 대하지 말라
“엄마, 난 개야. 개가 되기로 했어. 날 용서하지 말고 버려줘요.” 아들의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나도 살고 싶어.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싶어. 우리집처럼 말고 다른 집처럼, 보통의 집처럼 살고 싶어졌어. 아버지가 있고 고상하게 취미 생활도 하는 엄마가 있는 그런 집 말이야. 걔네*가 그런 집이야.” *걔네; ‘그 아이네’. ‘그 아이네’는 ‘그 아이의 가족’을 뜻한다. ‘그 아이’는 ‘아들’이 결혼하여 미국에 같이 가서 살려는 상대인 여자 친구를 가리킨다.
-- 소설가 김정주 페친의 2022년 단편집 이름이자 동시에 단편소설의 제목인 「바다 건너 샌들」 139면
처음에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는 ‘샌들’이 신발의 영어 ‘sandal’로 예상했었는데 다 읽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 ‘새 나간들’의 의미로 이해했다. 아들이 결혼하려고 ‘여자 친구와 같이 바다 건너 미국으로 빠져나간들’의 뜻으로 해석했다. 엄마(작가)가 보기에 너도 보통 사람이 되기는 힘들고 엄마처럼 하나의 유기견 遺棄犬에 불과하다는 문맥 아닐까?
유기견, 위의 인용문 <개가 되기로 했어. 날 용서하지 말고 버려줘요>에 보면 ‘버려버린 개’, 즉 유기견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아들이 의식적으로 저지른 잔인하고도 교활한 유기성 遺棄性(엄마를 혼자 남겨둔 채 멀리 떠남)으로 인하여 자기가 엄마를 먼저 포기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마치 그 책임이 엄마한테 있는 듯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프랑스의 장 자크 루소가 젊었을 때 자신이 낳은 아이 다섯을 모두 고아원에 맡기거나 남을 주었었다. 나이 먹은 후 아이들을 찾았으나 그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단다. 루소는 자신의 쓰라린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교육 필독서 ‘에밀’을 썼겠지.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의 철학서 ‘사회계약론’의 자유 사상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의 마중물이었다. 한때의 실수가 나중에 위대한 철학의 뿌리가 된 셈이다. 위의 아들도 루소처럼 미국에 가서 위대한 저서를 남기기를 바랄 뿐이다.
유기견이 갖는 의미의 폭과 같거나 비슷한 용어 중에 ‘이월 상품(김정주 페친의 또다른 단편소설), 잉여 인간(손창섭의 1958년 단편소설), 투명인간(근래 노인층을 가리키는 신조어), 오발탄 誤發彈(이범선의 1959년 단편소설), 기레기(기자 쓰레기), 그리고 봄(조선희 2023년 장편소설)에 등장한 바닥 인생의 아들 친구 등’도 있다.
‘이월 상품’은 생산된 해에 판매되지 못하고 그다음 해로 넘겨서 판매되는 상품을 말한다. 단편 ‘이월 상품’은 강자인 아내한테 늘 쫓기고 밀리는 외판원 남편 ‘탁’과 예단 목록에 있는 명품 시계가 벅차서 결혼이 성사가 안 된 여행 여자 가이드 이월 상품인 ‘나’와의 이야기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닌 쓸모없는 사람’을 ‘잉여 인간’이라 부른다. 손창섭 단편의 인물 익준은 비분강개 정의파이지만 생활력이 약해서 아이들을 굶긴다. 봉우는 능수능란한 아내의 극성 때문에 제 목소리를 못 내며 무기력하게 매일 친구 병원의 소파에서 하루를 보낸다.
노인들은 남녀 구분 없이 다 투명인간들이다. 노인들은 투명하므로, 즉 안 보이므로 승강기에서 나가려 해도 제대로 나갈 수 없다. 승강기 밖에서 기다리던 젊은이는 노인이 나가기 전에 먼저 승강기에 들어온다. 또 젊은이들은 노인이 말을 거는 걸 몹시 싫어한다. 사실은 나도 나한테 말 거는 노인, 노파는 상당히 불편하다.
오발탄(잘못 쏜 탄환). 전쟁 직후의 혼란 속에서도 정직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방향을 잃고 방황하다 권총 강도가 되어 버린 남동생,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린 어머니, 아이를 낳다 죽은 아내, 영양실조에 걸린 어린 딸 등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의 오발탄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봄’에 등장한 바닥 인생의 아들 친구. 아들 동민과 아빠 영한(전 대학교수 출신)과의 이념 및 진영 싸움으로 아들이 식구들과 합의 하에 가출한다. 동민은 학교 친구와 함께 고시원 생활을 하는데 이 친구의 알바 현장이 바로 인간 마모트(흰쥐) 현장이다.
교실 만한 크기의 방에 침대 몇 개가 있고 인간 흰쥐들이 침대에 누워 있다. 한 달 내내 약 먹고, 주사 맞고, 외부 출입 못 하고 물론 술, 담배는 금물이다. 세 번 걸리면 보수 없이 퇴실, 추방이다. 이런 바닥 인생은 알바생을 엄청나게 부러워한단다.
우리나라에는 예나 지금이나 비인간, 잉여 인간, 인간 유기견, 인간쓰레기가 왜 이리 많은가? 50, 60년대에는 6.25 직후라서 인구의 70프로가 못 살고 빈곤했으니 비인간이 그리 많았겠지. 박정희 등장 직후의 일 인당 소득이 700달러였었다.
근데 2024년도인 요즘은 GDP(PPP) 일인당이 $62,960, GDP(명목) 일인당이 $36,131란다. 그 옛날에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부자 나라인데도 6.25 직후처럼 왜 이리 여기저기 비인간 투성이인가? 아니 지금은 추정컨대 인구의 80프로가 인간 유기견들 아닌가?
자본주의, 상업주의 등의 풍조가 판을 치는 세상이니 소수의 엘리트 특권층이 승자, 강자가 되어 패자, 약자를 인간 유기견으로 알게 모르게 밀어붙여서 인간 유기견들이 넘쳐나는 게 아닌가? 경제의 문외한이지만 정치 경제 전문가들이 성장과 분배를 51 대 49로 추구한다면 이 정도로 인간쓰레기가 넘치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지금 윤 정권은 입으로만 국민, 국민 하면서 실제로는 성장과 분배를 80 대 20 장도로 처리하고 있다. 우리 동네 골목 경제를 보면, 상가의 상당수가 빈집이거나, 중요한 길목인데도 4년째 ‘임대 문의’가 늘비하다. 악을 쓴 채 ‘나 좀 봐줘요’ 하며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소위 진보 정권, 보수 정권이 미국처럼 이 땅에도 민주, 공화가 교대로 들어선다면 이런 기울어진 운동장은 없어질 터인데 말이다. 여기 정권은 미국을 존경하면서 왜 이런 공정한 운동장은 채택하지 않는가? 자신들의 사고 체계에 얼마나 기울었는지, 얼마나 쏠렸는지를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바보, 백치 아닌가?
전화기에 잠시 뜬 뉴스를 흘깃 보니 <“넷이서 한방 써요.” ... 치솟는 월세에 발동동>이 안타깝다. 내가 어린 시절, 1954년부터 1964년까지 인천에서 세 살 때 우리 식구 나까지 다섯이 한방에서 먹고 잤었다. 어떻게 세상이 70여 년 전 거꾸로 과거로 역주행하냐? 지난 12월 3일 윤석열의 불법 계엄은 세상을 60여 년 전 전두환 군사 독재 시대로 되돌려놓으려 발버둥 치냐?
정권 연장이 아니라 정권 교체가 화급하다. 그래야 이월 상품, 잉여 인간 덩어리가 확 줄어든다!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유기성 遺棄性 세습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단편소설 「바다 건너 샌들」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주인공 숙은 골목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음식도, 물도 안 먹는 어미 유기견이 새끼를 낳는 장면을 목도한다. 어미 유기견은 숙의 아바타다. 어느 선진 사회에서도 잉여 인간이 최소한 있게 마련이지만 이 땅은 그 부조리가 최소한이 아닌, 최대한 아닌가?
사진
*소설가 김정주의 단편집 「바다 건너 샌들」 겉표지
*소설가 김정주의 단편집 「바다 건너 샌들」 1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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