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안의 풍경이 바뀌었다.
예전처럼 신문이나 책을 읽거나 잠을 자는 대신 이어폰을 꽂고 있거나
스마트폰을 하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졌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문득 안 사실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일곱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까닭은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스마트폰을 해서이다.
그때 좌석수를 세어보게 됐다. 너무나 똑같은 광경 때문에.
그들 일곱 명은 앉기 무섭게 스마트폰을 꺼내 뭔가를 하고 있었다.
저들은 과연 무엇을 찾아 저리 스마트폰을 뒤지고 있는 것일까.
스마트폰에는 애플리케이션이 들어있다.
그 애플리케이션은 일종의 세상이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터치만 해도 스마트하게 세상은 열린다.
통장의 잔고나 이메일을 검색하고, 결재를 하고, 오늘의 날씨를 보며, 교통정보와 게임과 다운 받은 그림들을 보며 심심함과 고민을 던다.
스마트폰만한 친구가 없다.
그러나 그 친구는 일방적이다.
‘나’가 문을 열지 않으면 열지 못하는 그런 친구다.
그 친구와 교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다.
손가락 터치만 가능하고 ‘나’를 전달할 수 없는데,
그런 일방정인 사이를 어찌 친구라 할 수 있을까.
잠시의 무료함, 어디다 눈을 두기 곤란한 상황, 그러한 것만 해결해주지
소통다운 소통은 애플리케이션 그 어디에도 없다.
물론 육성으로 통화를 하거나 페이스북을 할 때는 다르다.
실시간 자신의 움직임을 올리고, 그에 따른 반응을 그 자리에서 확인한다.
소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 소통이라 할 수 있을까.
무료함을 달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안 드는가?
눈이 아프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봐도 그 안에 ‘나’는 없다.
‘나’의 존재는 겨우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단문에나 들어있다.
그것이 진정, 내가 찾는 ‘나’의 존재라면 모를까.
‘나’의 존재는 유보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며 존재감을 찾아내고자 하는 게 ‘나’이다.
그에 가장 적합한 것이 현재로선 스마트폰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스마트폰을 열고 무언가를 하는 그 행위는
시대의 흐름에 동떨어져 살고 있지 않다는 애처로운 웅변이기도 하다.
이만한 위로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잠시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해서 못 견딘다.
약속 시간에 늦어도 다시 집으로 가 챙겨 나오는 게 스마트폰이다.
우리가 스마트폰을 가진 게 아니라 스마트폰이 우리를 소유했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돼버렸다.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앞으로 스마트폰을 능가하는 어떤 기기가 생기면 우리는 또 ‘나’를 찾아내려
그 기기에 종속되리라.
‘나’가 없는 ‘나’를 ‘나’ 인줄 알고 열광하는 그때, 지하철의 풍경은 어떻게 될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