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거제는 나를 품고, 나는 거제를 품고

유리벙커 2023. 3. 24. 17:33

내일이면 거제로 온 지 딱 2년이 됩니다. 모레부턴 거제 생활 3년차로 접어듭니다. 그 무엇도 정한 것 없이, 지인 한 사람 없이, 오히려 그러한 까닭에 거제로 왔습니다. 나이는 꽉 찼지만 용기는 무모하다 싶을 만큼 있습니다. 어쩌면 거제 생활이 노마드적 인생을 추구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집 뒤론 산이 있고 앞엔 바다가 있는 집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언덕에 있지만 한눈에 반한 집이 있어 입주했습니다.

조용히 사색하고 글을 쓰자는 원대한, 그것은 정말 원대한 꿈에 가까운 희망이었고 그렇게 살 줄 알았습니다. 헌데 지지고 볶는 일은 경기에 살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툭툭 벌어지고, 그 일을 감당하느라 분노와 우울이 연이어졌습니다.

물론 매일 매시간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글도 좀 쓰고 책도 냈습니다. 친정 형제들과 시댁 형제들이 며칠간 다녀갔고, 그분들을 이곳저곳으로 안내하며 흥분에 들뜬 적도 있습니다. 어판장에 가 싱싱한 해산물을 사 형제들에게 택배로 보내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바다를 가진 마을에서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소중한 풍경과 신기한 눈뜸도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 하나 말해볼까 합니다.

늦은 점심을 먹는데 문득 남편이 말합니다.

오늘 바다가 파래.”

나는 주방 창으로 눈을 돌립니다. 이곳 주방 창은 보통 아파트의 주방 창과는 달리 넓습니다. 바다를 마주하고 있어 종종 갈매기가 나는 것도 볼 수 있고, 어느 밤엔 삼성 조선소에서 완공한 듯한 배가 마치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배 전체에 불을 켜고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이곳이 아니면 결코 볼 수 없는 귀한 순간입니다.

나는 밥을 먹으며 말합니다.

어머, 그으래? 그럼 우리 밥 먹고 해변 갈래요?”

신기한 것은 바다도 해변도 아닌, 그 순간입니다. 해변이 마치 내 것인 양, 앞마당의 꽃을 보러 나가는 양,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인가 결심을 하고, 계획을 짜고, 준비하지 않아도 덥썩 나설 수 있는 것 말입니다.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요. 이러려고 거제에 왔다는, 나름 거만도 떨어봅니다.

거제의 바다는 넘실대는 파도나 집채만 한 파도는 없습니다. 큰 섬과 작은 섬과 더 작은 섬들이 바다에 큐빅을 박아놓은 듯  떠 있습니다. 물은 무척이나 맑아 바다 생물이 자라기엔 모자람이 없습니다.

이곳 주민들보다 많은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절벽과 바다가 맞닿은 둘레길, 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카페, 밤의 해변과 무서우리만큼 아무도 얼씬대지 않는 임도 등등. 행여 이곳만이 줄 수 있는 여유로움을 잊을까 기억에 꼭꼭 넣으려 했습니다.

그렇게 2년이 훌쩍 갔습니다. 곧 이어질 시간에도 슬픔은 있을 테고 기쁨 또한 있을 겁니다. 여전히 글을 쓰는 도 있을 거고, 있고 싶다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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