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누구를 탓하랴

유리벙커 2013. 10. 26. 00:51

컴퓨터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쓴 글을 날려봤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그 상황에 처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도 몇 번 그랬다.

그런 일을 겪고 나면 행여 또 날릴까 잔뜩 신경을 쓴다.

그런데 지금 또 그런 일이 벌어진 거다.

당혹감이라거나, 화가 난다거나, 미치겠는, 아니 딱 죽고 싶은 심정이다.

이번엔 단편소설도 아닌, 중편소설이었다.

새벽 4시까지, 몸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까지 쓴 글이 0.1초 만에 날아갔다.

내 부주의다.

습관대로 하면, 나는 글을 쓸 때 하드와 다른 폴더와 usb에 저장하며 쓴다.

어느 한곳에서 글이 날아가더라도 다른 곳에 저장된 것이 있으면 그래도 낫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하드에만 저장하며 썼다.

그러니 돌이킬 수 없게 돼 버렸다.

 

글도 순간 작업이다.

글이 날아갔다곤 하나 큰 틀의 서사나 어느 부분의 맥락은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나 한 번 날아간 글은 아무리 초고라 해도 다시 쓰기 어렵다.

일단 흥이 나지 않고, 디테일하게 묘사한 부분은 정말이지 다시 써지지 않는다.

더구나 거의 다 쓴 중편소설이다.

그 많은 분량을 처음에 썼던 대로 다시 쓰기란 인내의 한계를 요구한다.

 

돌발 상황, 돌발사고, 인재, 안전 부주의, 뭐 그런 말이 떠오른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은 돌발 상황도 돌발사고도 아닌 인재이며 안전 부주의에 속한다.

알면서도 준비를 게을리 한 대가가 이렇듯 크다.

 

 

나는 지금 안절부절 못한다.

애꿎은 커피만 축내며 이렇게라도 몇 자 끄적이는 걸로 나를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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