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엄마야 뭐해?

유리벙커 2013. 9. 5. 23:47

 

자식 입장에서 엄마는 항상 애잔하다.

엄마라는 단어 자체가 슬픔이다.

계절이 옷을 갈아입는 때라 그런가, 엄마 생각이 자꾸 난다.

봄부터 엄마가 계신 용미리 납골당엘 가자 하면서도

여름을 나고 가을 입구까지 와버렸다.

엄마였다면 그랬을까.

 

우리는 엄마를 모른다.

살아계실 때에도, 돌아가신 후에도, 엄마를 모른다.

엄마가, 가족을 위해 엄마의 전부를 던졌다는 것도,

가끔은 외롭고 허전해 한다는 것도 모른다.

엄마는 그저 엄마일 뿐.

밥상을 차리고, 다림질을 하고, 청소를 하고,

걱정과 근심을 도맡아하는 사람 정도로만 알았다.

엄마에게도 첫사랑이 있고, 감상이 있고, 회상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 엄마로 대할 수 있고, 그래야 편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우린 ‘엄마’에게 잔인한 존재다.

‘엄마’라는 단어가 가진 숙명이라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엄마에게 끔찍하게도 잔인했던 나.

삐삐조차 없던 시절, 언제 올지도 모를 막내딸을 버스 정류장에서 마냥 기다리던 엄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도시락을 마루에 놓았을 때,

반찬 뚜껑을 열어보고 반찬이 시원찮다 싶으면 도시락을 그대로 둔 채 팽하니 학교로 갔던 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었을 무렵, 막내딸이 언제 전화해 주려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엄마.

툭하면 신경질을 부리고, 울기도 잘 울고, 가시 돋친 말로 쏘아붙이던 나.

엄마였다면 그랬을까.

 

엄마가 다시 돌아온다면, 나/우리는 엄마를 잘 모실 수 있을까.

그러저러한 회한 때문에라도 잘 모실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우리는 장담하지 못한다.

‘엄마’라는 단어가 가진 숙명이 있는 한,

나/우리는 똑같은 실수를, 똑같은 상처를, 알면서도 혹은 몰라서, 엄마에게 전가할 게 뻔하다.

 

 

그래도 나는 엄마가 보고 싶다.

목이 메게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야. 지금 뭐해?

난 엄마랑 놀고 싶은데.

언제 어느 때 불러도 지체 없이 달려오던 엄마.

자식에게만큼은 자존심도 모르던 엄마.

엄마의 머리를 빗겨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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