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잃어버린 연근

유리벙커 2016. 4. 3. 22:09

연근은 생긴 모양부터가 다른 채소와는 다르다.

연한 살색에다 구멍이 빵빵 뚫린 것이 꽤나 매력적이다.

헌데 지금까지 연근조림을 해본 게 서너 번 되나?

참 말도 안 되는 얘기다.

그보다 더 복잡한 음식은 잘하는 편인데, 예를 들어 잡채라든지, 녹두전은 쉽게 하는데

우엉조림이나 연근조림은 생각 자체를 못 먹었다.

특히 우엉조림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우엉조림은 좋아하는 편이다.

헌데 우엉의 경우, 막대기처럼 생긴 것을 깎아 음식을 만든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다. (김밥 재료로 나온 우엉은 뭔가 가미한 맛과 간이 좀 세어 유감이다.)



그러던 중 큰마음을 먹고 연근조림을 하게 되었다.

연근조림에 무슨 큰마음까지야.

까닭은 이렇다.

아주 오래 전에 연근조림을 해봤는데 실패였다.

좋게 말하면 아삭아삭이요, 솔직히 말하면 설컹설컹이다.

그 후 두어 번을 더 해봤지만 간장이 배어들지도 않고 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들은 연근조림을 좋아했다.

연근조림은 내 메뉴에서 이미 아웃되고 말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동창들과 공동으로 하는 카톡에 연근조림 레시피와 사진이 올라왔다.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 왈, 아무개는 6시간을 ‘고았’으니 그 정도의 시간은 생각해두어야 한다나....

아니, 연근이 무슨 인삼이냐 녹용이냐?

인터넷에 올라온 정보에는 30분 정도면 된다고 했다.

일단 레시피대로 식초를 넣은 소금물에 연근을 투하한 다음,

조금 지나 꺼내서 찬물로 헹구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

간장과 물을 넣은 후 연근을 넣고 졸이기 시작했다.

간장물이 거의 바닥이 났을 때 젓가락으로 연근을 찔러봤다.

음... 아직.

다시 물을 붓고 ‘달이기’ 시작.

물이 졸아들었을 무렵 또 젓가락으로 찔러보기.

으... 아직.

그렇게, 거짓말 보태지 않고 6시간을 졸였다.

말다했다.

덕분에 내가 원하던 ‘쫄깃쫄깃’한 연근조림이 나오긴 했다.


다음 날.

속초에서 일박 여행을 하러 집을 나섰다.

콘도에 도착하자마자 연근조림부터 냉장고에 넣었다.

콘도에서 밥을 해먹을 것도 아닌데 연근조림을 가져간 이유는 간단하다.

일박 여행을 마치는 저녁에는 아들과 만나기로 했고,

아들이 연근조림을 좋아했고,

몇 십 년 만에 해본 거라 뿌듯뿌듯했고,

6시간을 참을 인忍으로 성공시켰고,

그 기분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거다. 


 

체크아웃을 하는 날.

나보다는 훨씬 찬찬한 옆지기가 냉장고에 든 물건들을 챙겼다.

콘도를 나와 아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갔다.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속초에서 산 닭강정과 오징어순대, 씨앗호떡 등을 아들에게 주었다.

다 주고 차를 타는데 뭔가 허전했다.

“아, 연근조림!”

그 말을 듣는 순간 옆지기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어... 두고 왔다!”

옆지기는 내가 6시간을 주방과 거실을 오가며 조림하던 걸 본 장본인.

그런데 이게 말이 되나?

연근조림을 완성한 후 나는 말했었다.

두 번 다시 연근조림은 안 할 거라고, 한 개 씹어 먹을 때마다 6시간에 감사하라고.

연근조림을 잃어버린 후 나는 말했다.

이제부터 6시간이 아니라 6년을 연근조림으로 갈굴 거니까 각오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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