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만해축전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초청되어 발표한 글을 옮긴다.
심포지엄 토론자로 초청되긴 첨이다. 나름 의미가 깊다.
발표자는 심영의(소설가, 전남대 교수)이며,
그의 글 '지역문학에서 생명과 평화에 대한 인식-영.호남 지역작가들의 근작 소설을 중심으로' 을 반박한 글이다.
나는 창작자이기에 창작에 따른 불편한 상황, 왜곡된 제도적 현실을 발언했다.
입장마다 다르겠지만, 듣기에 따라선 거북할 수도 있고, 속이 시원할 수도 있겠다. ^^
<2016년 만해축전 세계평화문학 학술심포지엄>
지역문학의 현장과 방향성에 따른 탐색
심영의 교수의 <지역문학에서의 생명과 평화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김 정 주 (소설가)
지역문학과 자본주의의 관계
지역문학에 관한 아쉬움과 문제점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심영의 교수도 그러한 점을 조목조목 짚어낸다. 지역문학을 “타자(the other)”로 지칭하면서, “중앙과의 상관관계”임을 전제한다. 이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중앙에서의 지역문학은 마이너리티이자 “게토(ghetto)”라는 뜻이 함의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역문학이라는 ‘타자’ 입장에서 ‘중앙’은 무엇인지부터 살펴본다. 중앙이란 권력/권력집중을 의미한다. 권력이란 주체를 내포하고 그 주체는 태생적으로 소수이다.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다수로 말할 수 있는 그들은 피라미드의 하부구조를 이룬다. 피라미드의 제일 상층에 위치한 소수라는 권력은, 제일 하층에 위치한 다수가 있어야 성립된다. 역사시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이 권력구조는 그런 면에서 속성이라 부를 수 있다.
문학은 이러한 권력구조에서 어떻게 작동되는지 본다. 소위 메이저 출판사라 불리는 소수의 집단은 돈이 되는 작가/작품에 편중한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이 공공연히 불리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철학자 김진영은 “예술가는 자기 욕망을 실현하는 자인데, 자본주의가 돈이 되는 어떤 작품을 원하면 돈 때문에 해야 하는 딜레마가 생긴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우리의 문학 현장은 이미 스노비즘(snobism)에 오염되어 있다.
이런 현상이 무한 지속되는 근저에는 자본주의가 있다. 심 교수가 이를 뒷받침한다. “문화나 예술은 자본주의 구조로부터 더 이상 독립적일 수 없”고,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 경제적 문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에 불과하다”고 애덤 로버츠의 말을 인용한다.
이제 자본주의는 70년대에 발생한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담보로 보편시장을 추구한다. 자본의 논리를 극대화시켜 인간과 사물을 파편화하고 “게토”의 영역을 넓힌다. 자본의 논리로 보면 ‘타자’가 자본/경제로부터 소외되는 건 당연하다. 일찍이 벤야민은 “자본주의는 종교”라고 했고 “신은 죽은 게 아니라 자본에 편입되었다”고 일갈했다. 또한 아도르노는 “우리는 파충류가 되었다”고, 즉 뇌가 없이 사는 것에만 관심을 보인다고 갈파했다. 기실, 자본주의는 400년 남짓의 역사를 가진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본주의에 속했고, 죽을 때도 자본주의 안에서 죽는다. 우리는 이 거대한 캐피털리즘(capitalism) 앞에서 그저 ‘타자’로만 있어야 하는지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역문학 혹은 지역문학인들은 무패의 전적을 보유하는 이 자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되지 않는 것은 무가치하게 여긴다. 자본이 자본을 증식해야 하는 게 자본주의의 생리다. 따라서 중앙이라 일컫는 문학 권력 역시 자본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당연하게도, 상업성이 없는 작품은 설 자리가 비좁아진다.
하지만 심 교수는 “지역문학을 중심에 대한 주변의 문학으로만 보는 단순논리는 극복되어야 한다”고 선을 긋는다. 이는 주체(중앙)와 타자(지역)를 이항 대립으로 보기보다 작품 자체와 창작행위에 중점을 두자는 언술이다. 그러나 이미 주체와 타자로 분리된 현 문학의 행정적․구조적 문제를 보면 이 언술은 원론적이기까지 하다. 당장 글을 써서 발표해야 할 창작자 입장에선 위안이 되지 못한다. 발표할 지면이 없는 작품과 작가는 잉여로 전락되고, 순문학을 지향하는 작가들은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심 교수가 제시한 지역문학작품은, 지역 창작자들이 무자비한 자본주의에 맞서 어떻게 고군분투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지역문학에 나타난 서사의 투쟁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 발표된 34편의 단편을 읽고 분석하는 일이란 분명 고단한 작업이다. 그런 작업을 통해 우리는 여러 작품을 읽을 수 있고, 그들이 토해내는 소멸과 상처를 본다. 소멸과 상처는 ‘타자’로 밀려난 것에 기원한다. ‘타자’로 밀어낸 것은 “화폐나 권력”이며 그것들은 “게토”라는 시공간을 창출해 ‘타자’임을 공고히 한다.
이를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 중 손병현의 <오아시스>와 장정옥의 <어느 고물상의 노트북>, 조상현의 <밀고자>, 이룸의 <울어라, 개굴 개굴>을 선정해 본다. 이 작품들은 심 교수가 지적한 대로 “법/제도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문학)의 은유”로 적절할 뿐만 아니라 “화폐나 권력”, “게토”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오아시스>의 경우, 심 교수는 “‘오아시스 이용원’이라는 변종 성매매업소” “어두컴컴하고 밀폐된 장소” “퇴폐의 공간이면서 배제에 의해 양산된 잔여물” “현실에서의 도피이면서 갈증(그것도 가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공간” “생활공간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화폐나 권력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폭력적인 공간”이라고 설파한다. 특히 “게토로서 환유하고 있는 ‘오아시스 이용원’”이라는 표현은 독일 나치의 게토를 생생히 오버랩 시킨다. 또한 <어느 고물상의 노트북>에 나오는 고물상은 중심부에서 밀려난 비하된 장소이다. 변주된 또 하나의 게토이다. 다른 하나 <밀고자>는 지방사립대학에서 일어난 ‘밀고자’에 관한 일을 다룬다. 심 교수가 말한 “공익을 위한 제보자가 아니라 배신자, 밀고자가 되는 것이다”라는 대목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와 맥락을 같이한다. 여기에 김진영 교수의 말을 빌면 “고발해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 고발에는 희생이 따른다”로, 진실을 알고 있는 자의 고통을 말한다. 그 고통이란 고발자가 ‘밀고자’로 추락되는 과정이며, 밀고로 바뀐 현장은 게토가 되는 것이다. 거기다 <울어라, 개굴 개굴> 역시 또 다른 게토를 보여준다. 배경은 “청나일강 기슭의 작은 악어농장”이며 그곳은 “자본의 확장과 침투로 인한 식민화된 공간”이다. 심 교수의 이러한 비평은 자본주의의 폭력을 환기(喚起)시킨다.
그럼에도 영․호남 작품을 “상대적 박탈감을 갖고 있는 지역작가라는 공통된 문제의식”으로 읽는 점에는 아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지역문학을 중심에 대한 주변의 문학으로만 보는 단순논리는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시공간을 확장해 적용해 보면 상대적 박탈감은 영․호남이라는 공간적 배경에만 있지 않다. 발표 지면을 얻지 못한 작가들, 발표했지만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밀쳐난 작품들 또한 상대적 박탈감의 노마드(nomad)들이다. 그러나 ‘버려진 것들’은 ‘버려졌기’ 때문에 저항한다. 모든 생산력은 충돌을 통해 나오고, 예술가는 버려진 것에 본질적으로 관심을 가진다. 지역문학을 공간이 아닌 소외문학으로 볼 때, 지역문학은 그 나름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를 가진다. 불행의식이 있을 때에 발전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역작가들의 퍼스낼리티는 지역작가이기에 가능하다. 자기가 살아온 삶과 맞물릴 수밖에 없는 현실적 스크래치(scratch)이다. 그런 면에서 지역문학의 내러티브는 작가 자신과 시대를 대변한다. 그들은 그 지역에 대한 고유문화와 환경, 사고를 전달하는 매개항이자 변별적 탈주/탈주자이다. 심 교수는 이를 “지역작가들이 권력이나 자본에 대해 많이 쓴다”는 말로 함축한다. 지역작가들의 사유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지역문학의 상생과 대안에 관한 모색
심 교수는 “지역작가들의 소설들은 우선, 삶의 토대인 지역이라는 공간을 퇴락의 이미저리와 배제된 게토로서의 환유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는 부적정인 의미에서 문제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헤겔의 말을 인용하면 “나를 부정해주는 자가 있어야 절대지(絶對知)로 올라갈 수 있고, 모든 부정을 통하면 절대지(絶對知)로의 긍정이 된다”고 했다. 앞의 작품들에서 봤듯 ‘타자’들의 목소리는 골방의 한숨이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부당한 생을 향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호소이자 행진이다. 문학은 절망을 그대로 제시하기도 하면서 절망과 대치해야 희망을 볼 수 있다. 절망은 확실하게 해야지 포즈/제스처로 하면 전혀 힘이 없다. 소설은 문제를 일으키는 게 목적이지 의식(儀式)을 행하는 제의가 아니다.
이때 심 교수가 인용한 주디스 허먼의 “외상의 완결에는 종착지가 없다는 것, 완성된 회복이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는 말은 트라우마에 관한 본질일 뿐, 그에 따른 현상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은 상처를 꺼내 그 상처를 직시하며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해부하는 게 근간이다. 역설적이게도 소설은 트라우마 혹은 콤플렉스라는 상처를 통해 회복을 지향한다. 이로 볼 때 지역문학/소수자문학을 단순히 ‘타자’라는 프레임에 가두기보다 닫힌 문을 열러 가는 순례자로 보는 게 마땅하다. 이럴 때의 조건은 있다. 행정적․제도적 차원에서 지원을 해줄 때에라야 ‘건강한 순례자’가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역문학 작가들에게도 기회를 주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줘야 한다. 그러자면 제도가 필요하다. 그 중 ‘예술인 복지법’과 ‘문학진흥법’은 미약하나마 지역문학, 주변부문학, 소수자문학에 비전을 제시한다.
문학진흥법은 2015년 연말에 국회를 통과했다. 큰 틀에서 보자면 한국문학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있다. 당장 지역문학에 수혜가 돌아가긴 어렵다. 그러나 문학진흥법을 잘 운용하면 소외된 작가 뿐 아니라 소규모 출판사에도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교환이 안 되면 무용지물이다. 교환은 출판사/매체를 통해야 할 수 있다. 여기에 걸림돌이 있다. 2016년 상반기 호『내일을 여는 작가』에는 작가들과 국회의원 도종환의 대담이 나온다. 도종환 의원은 “출판사가 매체를 다 가지고 있어서 실제로 권력인데, 매체가 권력”임을 지적한다. 하지만 문학진흥법이 그 매체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인지에 대한 대안은 없다. “출판, 도서관, 문학이 같이 가야”한다는 제시만으로는 요원하다. 문학진흥법이 통과된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니, 구체적인 사항을 거론하기엔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해서, 문학진흥법이라는 피가 지역문학이라는 실핏줄에까지 공급되자면 시일이 걸린다. 관심을 두고 지켜볼 일이다.
다른 한편, 지역문학은 지역문학끼리 연대하며 상생을 꿈꾼다. 그 연대는 중앙과의 소통과 맞물려야 진정한 상생이 될 수 있다. 중앙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모색하고, 지역문학 혹은 소수자문학이 그들만의 퍼스낼리티를 유지할 때 조화를 이룬다. 한국문학이라는 대동맥이 지역문학을 ‘제대로’ 흡수할 때에라야 문학의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이 길이야말로 최고의 상생이자 평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