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볼라뇨의 장편소설.
이 소설의 배경은 칠레이며 실화를 바탕으로 형식은 간단하다.
시인이자 평론가이자 신부인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이(필명은 이바카체)가 임종을 앞두고 고백하는 모노로그 소설이다. 일종의 ‘임종의 침상 문학’이다. 임종의 막바지에는 지나온 과거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고 하는데, 그래 그런지 이 소설엔 줄 바꿈도 없고 챕터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특이한 점은,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참회나 반성이 없다. 그만큼 주인공 ‘나’로 대변되는 칠레는 속죄 없이 그저 그렇게 계속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면 칠레의 당시 정치적 상황부터 알아야 이해가 빠르다.
칠레는 스페인에 식민화되어 있다 해방이 된다. 그러나 지주 세력과 유럽 세력, 미국 세력이 침투되면서 극심한 혼란에 빠진다. 이때 아옌데가 사회국가를 탄생시킨다. 사회국가가 되자 그동안 개인이 가졌던 소유권이 바뀌면서 살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이때 피노체트는 아옌데를 축출하고 군사 철권 정치를 시작한다.
그러한 때, 주인공 ‘나’는 신부이며 문학이라는 마약에 취해 그 혹독한 현실을 건너간다. 이 소설은 ‘나’를 통해 종교와 문학에 가래침 뱉기를 한다.
첫 장에서 이바카체는 “고상한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나 자신을 정당화해 줄 행동들을 찾아서”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나’는 끝까지 정당했으며, 침묵에도 정당했다는 외침이다.
주인공 ‘나’는 임종을 앞둔 상태에서 “느닷없이 집 앞에 나타나 딱히 이유도 없이 대놓고 욕을 한 그 늙다리 청년”(10쪽)을 본다. 그 늙다리 청년이 누구인지는 후반부에 나오는데, 이 또한 명확하지 않다. “문득 병마의 그늘아래 있는 내게 그의 사나운 얼굴, 그의 상냥한 얼굴이 보인다. 나는 묻는다. 내가 바로 늙다리 청년인가? 아무도 듣지 않는데 소리 높여 외치는 늙다리 청년이 나라면, 이거야말로 정말 큰 공포가 아닌가? 그러니까 그 가련한 늙다리 청년이 바로 나란 말인가”(156쪽)라고 확정을 내리지 않는다. 늙다리 청년은 ‘나’이기도 하고 칠레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나 혹은 칠레는 구원을 받았냐 아니냐, 문을 열어놓는다.
이야기로 들어가면,
어느 날 나는 사제가 되어 페어웰이라는 유명한 시인이자 비평가를 만난다. 페어웰은 농장을 가진 부자로, 나를 농장에 초대한다. 페어웰은 자신이 칠레의 지주이면서도 “이 야만인들의 나라” “지주의 나라”에서 문학은 별게 아니라고 일갈한다.
나는 페어웰의 농장에서 네루다(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칠레의 민중시인)를 만난다. 나는 시인을 꿈꾸던 차, 네루다와 페어웰을 만나자 몹시 흥분한다. 그들에게 무한한 동경심이 들고 그들의 시를 찬미한다.
그러던 중 나는 페어웰의 농장에서 산책을 하다 길을 잃는다. 그때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하층민과 마주친다. 나는 그곳에서 “싸구려 비누 냄새”(29쪽)를 맡고, 그들의 외모에서 “다크서클. 갈라진 입술. 빛나는 광대뼈. 기독교인의 체념과는 다른 인내심. 다른 차원의 인내심. 칠레 여인들이기는 하지만 칠레적이지 않은 인내심. 외계에서 비롯된 것 같은 인내심”(31쪽) 보면서, “그 인내심이 나의 인내심을 거의 바닥내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나는 가난과 무지함이 얼마나 싫었던지, “다들 추했다. 여인들도 추하고 말은 두서없었다. 가만히 있는 농부는 추하고 두서없이 멈춰 있었다. 멀어져가는 농부는 추하고 두서없이 별나게 지그재그로 갔다”(32쪽)고 말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게 미소를 짓고, 뭔가 이야기하고, 라바 농장 저택에 어떻게 가는지 묻고, 길을 갔다”고 한다. 그때 한 여인이 “제가 호위해 드리죠”라고 말하는데,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런 입술에서 호위하다라는 동사가 나오니 온몸을 들썩일 정도로 웃음이 났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과 헤어져 다시 농장으로 와 거물급 작가들과 자리를 같이 한다. 그 후, 나는 “호메로스 같은 모습의 페어웰”(25쪽)과 관계를 지속하면서 시와 비평을 발표하고 시인을 발굴하고, 작가로 유명세를 떨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데임이라는 사람이 접근해온다. 그는 나를 현대식 카페로 데리고 가는데, 나는 그 카페에서 몇몇 사람을 보며 “돼지들도 고통을 겪는군”(77쪽) “그 고통이 그들을 숭고하게 하고 정갈하게 하는 거니까”라고 생각한다. 또한 실내가 시끄러워 “칠레 억양의 말이 토막토막 들릴 뿐”(78쪽)이었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이었지만 그 자체만으로 내 동포들의 낮은 수준과 무한한 절망을 담고 있었다”고, 내려다보는 자의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오데임은 내 유명세를 알아 하나의 제안을 한다. 성당 보존 연구원의 자격으로 일 년 간 유럽을 돌아다니며 “유럽에서 퇴락 방지 대책의 선두 격 성당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상이한 방법을 비교하고, 보고서를 쓰고 돌아오는 일”(81쪽)이다. 그 일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나의 위치를 한층 격상시킨다.
그 일을 마치고 나는 다시 칠레로 돌아온다. 일상은 그럴 수 없이 평온했지만 내면은 뭔지 모를 불안에 시달린다. 그때 다시 오데임이 찾아온다. 그는 내게 피노체트 장군과 그 급의 장성들에게 마르크스를 강의해 줄 것을 요청한다. (피노체트는 1973년 군사 구테타를 일으켜 칠레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을 잡아 들였고, 좌익 세력을 말살했다. 그러나 한편 자유 시장 정책을 시행해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도 했다.)
나는 비밀 아지트에서 피노체트와 장성을 기다리며 “땟자국 하나 없는 벽에 찻잔을 던져 버리고 싶고, 무릎 사이에 찻잔을 끼고 울고 싶고, 난쟁이가 되어 따뜻한 차에 풍덩 빠져 설탕 알갱이가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알처럼 가라앉아 있는 밑바닥으로 잠수하고 싶었다”(110쪽)고 되뇐다. 그랬음에도 나는 피노체트라는 당대 최고 권력자를 위해 마르크스를 10번 강의한다. 이때 피노체트는 “아옌데가 무슨 책들을 읽었는지”(117쪽) 묻고 아옌데를 잡지 나부랭이나 읽는 자로 폄훼한다. 그러면서 “내가 왜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배운다고 생각하시오?”(121쪽) “칠레의 적들을 이해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그들이 어디까지 갈 작정인지 짐작하기 위해서요. 확실히 말하건대, 나는 내가 어디까지 갈 작정인지 알고 있소.”라고 말한다. 피노체트의 이 발언은 갈 데까지 가겠다는 무서운 말이며, 실제로 피노체트가 집권하면서 많은 고문과 학살이 있었다. ‘나’는 피노체트가 그러한 말을 했음에도 바른말을 해주기는커녕 예,예, 비위를 맞춘다.
나는 마르크스 강연을 끝낸 후, “그 철권통치와 침묵의 시절”임에도 시와 논평을 꾸준히 발표하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예찬한다. 나는 “마침내 내가 세계의 공항을 누비는 시절이 도래했다. 세련된 유럽인들과 진중한 미국인들 사이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이탈리아와 독일과 프랑스와 영국의 멋쟁이 신사들 사이를 누볐다. 그들 사이를 나는, 신의 존재를 느낀 듯 갑자기 열리는 자동문 때문에 혹은 에어컨 바람 때문에 휘날리는 사제복 차림으로 다녔다”(126쪽) “세계를 누비고 난 후에는 늘 그렇듯이 칠레로 돌아왔다. 돌아오지 않으면 그 <빛나는 칠레인>이 아닐 테니까”라고 말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후, 나는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여자 작가를 알게 된다. 그녀는 미국인 남편을 가진 매력적인 여자로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 당시 통금 시간(오후 10시) 때문에 작가들은 마음 놓고 만나 얘기할 장소가 없었는데, 그녀는 자신의 저택을 공개해 작가들의 모임을 주선한다. 나는 그 저택에 자주 갔지만, 그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모든 작가들이 그랬듯, 자주 간 적이 없다고 부인한다.
사건이란 어느 작가가 화장실을 찾아 헤매다 그 집 지하실로 들어가서 본 장면에서 시작한다. 지하실에는 한 사람이 벌거벗긴 채 눈에 천을 두르고 침대에 손발이 묶여 있었다. 온몸은 고문을 당해 처참했는데, 그 장면을 본 작가는 못 본 척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피노체트 군부 독재가 끝나자 그 때의 일은 다른 작가들도 본 것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사정인 즉, 마리아 카날레스의 남편은 미국의 정보요원으로 칠레 정부를 위해 반체제 인사들을 데려다 고문했던 것. 그 사실을 마리아 카날레스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와중에도 작가들과 밤샘 파티를 연다. 그녀는 등단한 작가이긴 하나 글 솜씨가 형편없는, 남편의 세에 힘입어 작가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정권이 바뀌어 남편이 미국으로 가고 형을 받자, 살던 저택을 비워줘야 하는데도 자신은 문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집을 비워주기가 곤란하다고 말한다.
작가 볼라뇨는 그녀가 말한 “제 문학 경력은요?”(151쪽)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한다”(153쪽)는 대목에서 문화신비주의에 철저히 중독된 사람/칠레를 비판한다. 문학에 대해 객관적이지 못한 숭배의식은 사람을 도외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컨대, 지하실에서 전기 고문이 있는 날도 카날레스와 아이들은 티브이를 본다. 그때 전기가 나가다 들어오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카날레스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티브이를 본다. 살과 뼈를 가진 사람을 소외시키는 문학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저택을 나오며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하지. 하지만 어디 칠레에서만 그런가.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 우루과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 푸르른 영국과 즐거운 이탈리아에서도 그런걸.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153쪽)라고 말한다.
저 대목에서 한국이라고 자유로울까. 한국의 문학판 또한 저보다 낫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이 침묵으로 일관했듯, 우리나라의 작가들 역시 침묵을 좋아한다. 정권과 권력에 부역함으로 명성을 얻는 것, 그것이 문학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소설은 자기비판을 하기 보다 남을 탓하거나 시대를 탓한다. 소설을 쓰는 내 입장에서 이 책은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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