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려운 소설이다.
1966년 미국을 배경으로 쓴 토머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 엔 여러 버전이 있다.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억압과 자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등. 핀천은 그것들이 어떤 모양으로 조화 혹은 부조화를 이루는지 다룬다.
읽기가 만만치가 않다. 상징과 암시는 일렬이 아니라 방사형으로 뻗었다는 느낌을 준다. 이 복잡한 것을 어찌 꿰어야 소설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까 싶어 키워드를 적어나간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에디파 마스는 신경병적 타입의 여자로, 어느 날 터퍼웨어 파티에서 돌아온다. 터퍼웨어 파티는 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유행하던 것으로, 가전제품이나 요리기구 등을 어느 한 집에서 시연해보이고, 거기에 참석한 주부들이 사는 그런 스타일의 영업이다. 주인공이 그 파티에 있다 온 것은 그녀가 중산층 여자로, 고민 없이 사는 캐릭터를 의미한다.
에디파 마스는 터퍼웨어 파티에서 돌아오자 옛 애인이었던 피어스 인버라리티의 유산관리인으로 위촉되었다는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조금 황당했지만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피어스 인버라리티의 재산이 흩어져 있는 샌나르시소로 간다. 그때부터 그녀의 여행은 시작된다. 오디세우스가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면, 에디파의 여행은 모르는 것을 찾아가는 탐정적 요소를 담고 있다. 그녀는 한 모텔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공동 유산관리인으로 위촉된 메츠커라는 남자를 만난다. 그는 전직 배우이자 현재는 변호사다. 그녀는 그가 어린 시절 배우로 나왔던 영화를 보며 섹스를 하게 되는데, 그 섹스는 티브이에 나온 영화의 줄거리를 맞추는 것으로 시작해, 맞추지 못하면 옷을 하나씩 벗는 게임이다. 이 이상하고도 자유분방한 섹스는 일종의 카니발로, 그동안의 일상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 후, 그녀와 메츠커는 술집을 가는데, 그녀는 그곳 화장실에서 우편 나팔 모양의 약음기가 그려진 낙서와 W.H.S,T.E라는 글자를 본다. 그녀는 그녀만의 예민함으로 그것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려 한다. 그 과정에서 연극을 보러가고, 연극 내용에 트리스테로라는 말이 나온다. 그녀는 그 말의 뜻을 알고자 연극배우이자 연출가를 만나고, 그를 통해 헌책방에 있다는 원본을 찾으러 간다. 그러나 원본은 없고, 트리스테로는 툰과 탁시스에게 공식 우편제도의 지위를 빼앗겨 지하로 잠적한 비정규 우편제도의 명칭(259쪽)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편제도는 신성로마제국에서 귀족이 우편제도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후 국가가 독점하게 된다. 핀천은 이것을 인간교류의 통제로 본다.(259쪽) 트리스테로라는 집단은 이런 통제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위조우표를 만들어 그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녀는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피어스의 유산이 집중적으로 있는, 우주산업 기업인 요요다인 우주공학 회사를 찾아간다. 그 회사에서도 그녀는 약음기의 그림을 보고 뭔가 비밀조직이 작동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트리스테로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 사건과 마주치게 되는데 마지막엔 트리스테로가 만든 위조우표를 경매하는 자리에 가게 된다. 그 우표가 경매 번호 49호다. 그녀는 경매장에서 누가 그 파란만장한 사연을 내포하고 있는 우표를 사러오는지 기다린다. 작품은 거기서 끝이 난다.
이 소설은 왜 끝을 주지 않았을까.
소설에 끝을 주면 더 할 말이 없게 된다. 결과가 이러니 이렇게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뜻이 작동된다. 어떤 생을 위해서라도 끝/마감은 주지 말아야 한다. 생은 어떤 방식으로도 끝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기본 개념이다. 포스트모던 소설은 나만이 알고 있는, 새로운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다 아는 것을 재조합(패러디)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려 한다.
이 소설이 어렵지만 감탄하게 하고, 탁월한 작품이 되는 이유는, 이러한 열린 의식이 치밀하게 직조한 그물로 구성되어 있기에 가능하다. 거기다 핀천의 구절은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워(우리가 흔히 아는 겉의 美가 아니라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미를 말한다) 찬탄이 절로 나온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외부 신경조직 말단 촉수가 서로 간섭하면서 발산하는 듯한 부드럽고 우아한 혼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98쪽) 이라든지, “그의 눈은 엷은 검정색이었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선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었다. 마치 눈물 속에도 지성이 있는지 연구하기 위해 설치된 실험용 미로처럼”(99쪽)이라든지, 언덕에서 바라본 집들을 가리켜 “건전지를 갈아 끼우느라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열자 처음 보았던 전기 배선이 생각났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집과 거리는 라디오의 전기 배선처럼 놀랄 만큼 질서 정연했다”(26쪽)가 그런 경우다. 그 외에도 여럿이 있지만 생략하기로 하고, 핀천의 방대한 지식을 맛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예를 들면, 요요다인이 있는 호수 아래엔 뼈들이 있고, 그 뼈들이 어떻게 거기에 있게 되는지, 연극을 보며 나오는 뼈들을 통해 “그들의 뼈는 다시 건져 올려져 숯으로 만들어졌고, 그 숯이 다시 잉크로 만들어졌다”(94쪽)는 대목이 그렇다. 열역학 이론과 매트릭스 이론도 이 소설이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 말한다. 실재와 허구를 의심하면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토머스 핀천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대표 작가이다.
그에게 중요한 건, 경매장에서 그 복잡다단한 위조우표를 사는 게 누구냐가 아니다. 소설에 자주 나왔던 W.A.S.T.E 약어 “우리는 조용한 트리스테로 제국을 기다린다”라는 게 핀천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즉, 인간을 하나의 제도로 규격화하려는 세력에 저항해 자유로운 인간, 다양성을 지닌 인간을 그대로 살게 하는 세상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소설은 이렇게 시작해 이렇게 마감해야 한다는 어떤 공식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마감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셈이다. 핀천은 그러한 프레임을 이 작품으로 멋지게 깼다고 본다. 특이하게도 우편제도를 소재로 거미줄처럼 얽어놓고는, 그것도 생각이나 이념이 거의 없는 여자를 등장시켜, 여자만의 그 예민성으로 갇힌 세계를 탈출하게 한다.
책을 덮으며 수없이 생각했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문학은 무엇인가. 특히 우리나라 문학의 질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핀천이 지향하는 열린 문학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언제쯤 우리나라 문학은 자본의 시장을 떠나 문학만이 주는 힘, 그것을 구현해 낼 수 있을까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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