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설/독서감상문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유리벙커 2017. 3. 20. 02:00



노벨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장편소설.

마르케스 자신이 최고의 작품이라 꼽은 소설.

마르케스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서구에 의해 약탈당한 남미의 해방 의지에서 나타난 문학 운동을 일컫는다. 미국과 유럽에서 시장을 얻었으며 문화 식민주의의 한 형태이다. 서구의 우월성은 열성을 무시하고 지배하면서, 다른 한쪽에선 칭찬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그 열성을 포섭하기도 한다. 소설 형식 자체가 서구적이며 우리나라도 이를 도입했다. 이러한 서구적 우월성(즉 지성의 요소)은 신춘문예에서 이런 형식이 아니면 낙방시키기도 한다. 소설은 합리성의 사물이다. 이런 형식이 지속되면 그것이 옳다는 절대성을 가지게 되는데, 그 점을 탈피하려 생겨난 것이 포스트모던이다.

 

 

이 소설은 마르케스가 친구인 까예따노의 실제 죽음을 재구성해서 쓴 것이다.

제목부터가 죽음이 예고되어 있다. 예고된 죽음이라는 건 어찌 보면 빤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데 대뜸 예수부터 떠오른다. 예수야말로 예고된 죽음의 원형이다. 도입부 그들이 그를 죽이기로 한 날 산띠아고 나사르는에서, 나사르는 히브리어로 수호자’ ‘파수꾼을 의미하며, 나사르 예수를 상기시킨다.

 

 

서술자이자 산띠아고 나사르의 친구인 나는 그 살인 사건의 의문을 풀고자 27년이 지난 후에야 그 날 그 시각에 있던 동네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한다. 동네 사람들은 오전 615분에 집을 나서 한 시간 뒤에 돼지처럼 난도질을 당할 때까지”(10) 산띠아고 나사르의 기분은 좋아보였다고 한다. 산띠아고 나사르는 자신의 죽음을 몰라서였을까. 그것은 아니다. 뒤에 보면, 나사르는 쌍둥이인 비까리오 형제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동네방네 떠들어댄 것을 안다. 그렇다면 왜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을까. 나사르는 자신은 세도깨나 있는 부자인데, 일개 동네 백정인 비까리오 형제가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영문을 모르겠는 걸로 나온다. 하지만 알면서도 살인하고, 알면서도 죽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나사르가 비까리오 형제의 여동생을 강간했기에 명예살인을 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지만, 석연치 않은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비까리오 형제의 여동생 앙헬라 비까리오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를 나사르라고 지목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앙헬라가 가족에게 두들겨 맞으며 문득 떠오른 이름이 나사르여서 나사르라고 대답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앙헬라나 나사르, 나사르의 친구들은 이런 오해를 해명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해명하지 않는다.

살인사건이 나던 그 날, 콜롬비아의 작은 마을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다. 하나는 앙헬라의 결혼식이요, 다른 하나는 주교가 마을을 방문한다는 사실이다. 두 사건은 이미 예정된 상태다.

앙헬라의 남편 바야르도 산 로만은, 좋은 신붓감을 찾아 이 마을에 온 사람이고, 앙헬라는 이 마을에서도 아주 가난하고 인기 없는 여자다. 남자 경험은커녕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여자로 늘 어머니의 감시를 받으며 조신하게 살림만 한다. 그런데 결혼 첫날 밤, 앙헬라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안 남편 로만은 앙헬라를 친정에 데려다 준다. 그로인해 앙헬라의 쌍둥이 오빠는 명예살인을 공표하며 마을을 돌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살인을 예고 받은 후에도 나사르에게 알리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시도한 몇몇 사람들조차 이런저런 이유와 우연에 맞물려 예고된 살인을 나사르에게 알리지 못한다. 그 사건은 주교가 오는 이른 아침에 벌어진다. 동네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주교를 기다리는 한편 나사르의 죽음을 구경하고자 한다. 성스러운 주교의 방문과 살인이라는 극한 대비는, 성스러움과 피조물의 속됨이 하나라는 의미다.

당시 콜롬비아 사회는 명예살인을 인정했다. “살인을 할 당시 칼로 수없이 찔러 대서 흠집투성이가 된 쁠라시다 리네로(나사르의 엄마)의 집 현관문을 공공자금을 동원해 가며 수리해 주어야만 했다는 대목은 명예 살인을 사회적으로 인정했다는 뜻이며, 명예 살인자를 보호해주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인에 대한 집단적 무의식, 혹은 숨은 광기다. 명예살인을 주도한 쌍둥이 형제의 심리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이 공공연히 살인을 예고하며 다닌 것은, 살인을 막아달라는 일종의 호소였다.

여기서 예수를 대입해 볼 수 있다. 예수는 이미 예고된 살인의 희생 제물이었으며, 예수를 죽인 것은 공식적으론 빌라도지만(소설에는 비까리오 형제) 사실은 유대인들(소설에는 동네 사람들)이다. 앙헬라가 나사르를 찍은 것도 그 동네에서 보자면 이방인 가문이기에 그렇다. 이때 치안판사는 앙헬라에게 진짜 나사르냐고 묻고 앙헬라는 진짜 나사르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앙헬라가 말한 나사르는 특정 남자라기보다 남자들이다.

    

 

이 사건은 우연이라는 그물이 촘촘하게 쳐있다. 우선 앙헬라 비까리오가 자신의 순결을 밟은 인물로 우연히 떠오른 산띠아고 나사르라는 이름을 대고, 나사르는 그날따라 우연히 집안 식구들이 보지 않는 사이에 집을 나온다. 동네 사람들은 살인을 알리려 하나 우연히 어떤 일들이 벌어져 알리지 못하고, 산띠아고 나사르의 엄마는 그날따라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자 대문을 걸어 잠근다. 그런 후 2층으로 올라 창밖을 보는데, 칼을 들고 뛰어오는 쌍둥이 형제는 보이나, 쌍둥이 형제에 쫓겨 집으로 오는 아들은 보지 못한다. 창에서 봤을 때 아들이 오는 각도는 보이지 않아 아들이 침실에 있는 걸로 안다. 나사르는 결국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살해당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 광경을 목격한다. 우연을 가장한 집단 살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공동체가 생겼을까.

남미는 내전을 겪었다. 내전은 인간을 피조물로 만든다. 쌍둥이 형제가 나사르의 창자를 마구 찌른 것처럼, 창자를 찔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혈통을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고, 해방이 됐지만 또 자기들끼리 내전을 치르는 상황으로 간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동체에 있다. 공동체는 역할대로 사는 것이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돌아간다. 쌍둥이 형제가 자기 역할을 한 것처럼, 동네 사람들도, 나사르의 엄마도, 다 자기 역할을 한 것뿐이다. 나사르조차 그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채 죽었다”(129)는 것도 역할대로 한 것이다.

알았는데 모른 척하는 것은 폭력의 마술성으로, 이 사회를 돌게 한다. 이것은 일종의 폐쇄정치이며 공동체의 속성이기도 하다.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구분할 수 없고, 가해자와 피해자 둘의 착종의 힘이 사회를 굴러가게 한다.

또 다른 하나를 보면,

마르케스는 이 소설에서 주교가 마을에 축복을 내려주려 오는 것이지만, 주교는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주교가 좋아하는 수탉 스프만 먹고 간다고 말한다. , 주교의 방문은(서구의 자비/구원) 쓸데없는 짓임이라고 래디컬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남미는 서구에서 온 천주교라는 정신적 식민 상태(주교의 수탉 수프처럼)를 겪고, 쌍둥이 형제처럼 죽여라는 원칙으로 살지만, 그것을 하지 않으려는 이중적 심리 상태에 처해 산다. 예컨대 살인을 방조했던 마을 사람들, 살인을 저질렀던 쌍둥이 형제, 살인을 알리지 못했던 친구들은 양심의 가책으로 불면에 시달리거나 악몽을 꾼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 소설은 내전을 겪었던 공동체의 집단 무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지금의 이 사회나 종교, 국가 역시 여전히 그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고발한다.